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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⑩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박정희 대통령, ‘근대화’ 앞세워 교수들 정권 참여 유도…‘10월 유신’의 나팔수가 된 지식인들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유신정권은 유신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목적 아래 국무총리기획조정실 산하에 유신정책심의회의를 설치했다. 국무총리 자문기관인 이 심의회의에는 전국 대학교수들이 조사연구위원으로 참여했다. 1976년 2월 28일 유신정책심의회의 교수단과 평가교수단의 합동 심포지엄에서 최규하 국무총리서리(왼쪽)가 치사하고 있다.

5·16 군사정권(군정)과 제3공화국 이후 ‘근대화’가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을 때, 이를 지켜보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적 근대화의 상’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들이 쏟아졌다. 한국 근대화의 내용이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의미하는가와, 정치 민주화·문화 선진화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하는가로 갈라진 시기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이 문제는 공화당 정권의 근대화 정책이 경제 발전 위주로 진행되면서 불거진 것이었다. 이전까지 근대화란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개념이었다.

공화당 정권의 산업화 드라이브는 지식인을 선택의 상황에 놓이게 했다. 정권에 ‘참여’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정책 방향에 대항지점을 형성할 것인지. 이에 따라 실제로 지식인 사회에서도 분화가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과 이승만 정권 사이의 중요한 차이 한 가지가 대학교수들의 정치 참여다. 5·16 군정은 군인들의 정치인 동시에 대학교수들의 정치이기도 했다. 대학교수가 행정부와 입법부에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는 ‘전통’이 생긴 것이 5·16 군정과 공화당 정권부터였다.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한태연은 한국헌법학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한국헌법학회 고문 시절 모습. 황산덕은 성균관대 총장 재임 중인 1974년 제24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돼 25대까지 연임한 뒤 22대 문교부 장관까지 지냈다. 77년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청와대 대변인) 시절의 임방현(왼쪽부터).

법학자 한태연과 황산덕의 정치 입문

대학교수 가운데 새로운 정권에 참여해 한국 사회 근대화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이들이 등장했다. 분야의 특성상 법학계가 가장 앞섰다. 한태연과 황산덕이 대표적인 인물들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1916년생 한태연과 17년생 황산덕은 학병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학병세대 맨 윗자리에 속하는 연배다. 한은 함경도, 황은 평안도 출신으로 둘 다 이북이 고향이다. 마흔 즈음 관록이 붙을 무렵 ‘사상계’ 편집위원도 함께 했다. 한태연이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가 49년부터 61년까지, 황산덕은 52년부터 ‘정치교수’로 파면되던 65년까지 역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으니 직장 동료로서도 10년가량을 함께 지냈다. 이런 공통점들은 시차를 두고 두 사람 다 공화당 정권에 참여함으로써 정점을 이룬다.



한태연은 1943년 9월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했고 황산덕은 그보다 이른 41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지만, 두 사람이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것은 같은 해인 43년이었다. 한태연이 와세다대를 졸업한 43년 9월은 학병 징집 직전이었다. 이런 까닭에 간신히 학병을 피할 수 있었다. 한태연은 공화당 정권이 시작된 63년부터 67년까지 공화당 소속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고, 유신정권에서 다시 국회의원을 했다.

황산덕도 일제강점기 말 일찌감치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경북도청에서 근무했던 터라 학병 징집과는 무관한 자리에 있었다. 서울대 교수로 있던 이승만 정권기부터 1960년대 중반 무렵까지 자유당 정권과 5·16 군정에 비판적인 태도를 확고히 했던 황산덕이 정권에 참여한 시기는 놀랍게도 유신의 깃발이 극으로 휘날리던 74년이었다. 그해 9월 법무부 장관으로 입각한 황산덕은 76년 12월까지 재직하다 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1년을 더 각료로 일했다.

두 사람은 한국 법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한태연은 교수 시절 한국 헌법학의 제1인자로 인정받았고, 1969년 한국헌법학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함경남도 영흥 고향마을 율산(栗山)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로 삼을 만큼 정이 많았던 한태연은 제자도 많이 길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산덕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내 법학박사(서울대)로 알려져 있다(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는 역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유기천 미국 예일대 박사). 법철학과 형법학을 전공했던 황산덕은 한국 법철학 분야의 태두로 공인되며 형법학에서는 유기천과 일인자를 다툰다는, 그야말로 초기 대한민국 최고 법학자였다. 한국법철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근대화의 상징이 된 강원 춘천 소양강댐. 박정희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은 소양강댐을 ‘3대 국책사업’으로 정하고 1972년 11월 25일 담수식에 직접 참석했다.

오늘날 두 사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중에는 이들의 정권 참여를 개인의 ‘변절’ 차원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최소한 유신 이전까지는, 즉 1960년대에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하나의 논리가 있었다.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이었다. 공화당 정권 출범 이후 현실화돼가는 ‘근대화’에 맞닥뜨려 ‘지식인의 임무’와 관련해 ‘비판적 지식인론’과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이 대립해서 등장했다. 정권의 근대화 정책 방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대항지점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 비판적 지식인론이라면, 반대로 정권에 참여해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운영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쪽이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이었다.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의 대표 논객은 임방현이다. 후일 유신정권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한 임방현은, 1970년 대통령 특보(국내정치 파트)가 되기 전까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다. 논설위원 시기 쓴 글 중 특히 60년대 중·후반에 발표한 몇몇 글은 정권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줌과 동시에,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이 지식인의 정권 참여 논리가 됨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임방현이 주로 기댄 논리가 에드워드 실스(Edward Shils)의 이론이었다.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과학 영역에서 미국 학계의 영향은 상당히 중요한데, 구조기능주의로 잘 알려진 하버드대 파슨스 못지않게 시카고대 실스의 영향도 대단한 것이었다. 파슨스와 실스의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들을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이론 모델의 핵심이 근대화론이다.

“근대화의 중심 세력은 젊은 장교”

임방현은 제3세계 지식인이 정부 정책에 주체로 참여하게 되는 근거를 실스의 근대화론으로부터 가져왔다. 그중 지식인의 정권 참여 논리를 가장 자세하게 피력한 글이 1968년 5월 ‘정경연구’에 발표한 ‘혁명과 지식인 : 정치지도세력과 지식인의 관계’다. 이 글에서 임방현은 “오늘날 저개발국가들에 일고 있는 총체적인 사회변동 과정을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바, 이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의 정치 지도세력과 지식층 간의 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이 글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이 글에서 사실상의 결론이자 핵심 주장은 “한국 인텔리겐치아는 4·19와 5·16이라는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근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지도 세력과 근대화라는 기본 목표에서 공동 목표를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라고 표현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째서 처음일까. 임방현의 글에는 장준하 등 많은 지식인이 군사쿠데타 이후 상당 기간까지도 5·16을 4·19혁명의 연장으로 이해했던 주요 근거가 정리돼 있다. 해방 후 한국 정치사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2차 대전 종결 후 한국의 경우도 ‘반공’에 편승하여 해방 전의 구질서 구지배세력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비록 독립은 되찾았으나 사실상 한국을 지배하는 정치세력이 근대화와는 관련이 없는 구세력이었다. 한국의 지식인들의 염원은 새로운 국가, 근대화를 향한 민주주의적 사회 건설이었다. 이 박사 영도 하의 집권세력은 친일관료세력과 미국화된 관료세력의 혼합체였다. 4·19혁명을 계기로 한국 지식인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잔재와 봉건적 잔재를 거부하고, 구질서 구지배세력의 정체를 폭로하고, 사회 경제적 개혁을 통한 조국의 근대화와 이를 수행할 새로운 정치 지도세력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어 민주당 정권이 출현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은 체질적으로 구질서에 속하는 세력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장면 정권도 구질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민주당이 과거 지주 등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한민당으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해보면 충분히 수긍 가능한 논리였다. 장준하도 비슷한 논리를 편 적이 있다. 장준하는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후인 1961년 9월호 ‘사상계’ 권두언에서 민주당에 대해 “일제 관료 출신들과 친일 경향의 인물들 중심으로 구성된 지도집단”이라고 규정했다. 사실 민주당은 그 뿌리가 한민당에 있는 만큼, 장준하의 규정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장준하는 제1공화국의 여야였던 자유당-민주당의 구도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었던 것일 수 있다. 기존 정치권 전체에 대해, 말하자면 해방 이전 세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임방현의 이야기는, 친일 구세대 정치인은 5·16으로 일소되고 새롭게 등장한 ‘정치지도세력’이 근대화를 열망하는 새 세대 지식인과 결합해 민족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지도세력이란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가. 실스를 인용해 임방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신생국들의 경우 구질서를 전복하고 근대화를 꾀할 세력은 조직화된 젊은 장교들일 것”이다. 5·16은 실스의 이론에 기댈 때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임방현은 이후로도 비슷한 시각의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70년 5월 ‘정치변동과 엘리트’에서는 지식층을 향해 보다 분명한 주문을 했다. 지식인이 근대화의 기간요원이자 지도기능이 돼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들 지식층과 정치 엘리트 간 대화와 협조가 개발도상국 근대화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임방현은 이 글을 발표하고 약 6개월 후 대통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됐다.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는 70년 12월 처음 시행됐는데,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한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교육문화 부문)와 함께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임방현도 자리하게 된 것이다. 임방현의 나이 불과 마흔일 때였다.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1972년 12월 27일 중앙청에서 거행된 유신헌법 공포식(왼쪽)과 73년 6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사진 앞줄에서 왼쪽)이 백두진 유신정우회 회장과 함께 유신정우회 간판을 거는 모습.

유신정권의 이데올로그 임방현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과 지식인의 변절 논쟁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지속적 개혁을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정치를 시작했다. 사진은 1972년 11월 계엄령으로 해산된 국회 앞에 탱크가 주둔해 있는 모습.

그런데 임방현이 주로 기대고 있던 실스의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은 이미 1950년대 말 사상계 그룹의 근대화론에서 거론되던 것이었다. 실스의 글들은 60년쯤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실스의 연구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 이전에 이미 지식인 사회에 널리 공유됐던 것이다. 어느 면에서 근대화 인텔리겐치아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국가들에서 필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군정의 등장 여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현상이었다.

임방현은 이후 청와대 대변인을 맡으면서 유신정권의 이데올로그가 됐다. 홍윤기에 의하면, ‘유신(維新)’이라는 용어는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던 박종홍과 임방현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가져온 표현이라고 한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역설하는 임방현의 1973년 책 서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확실히 10월 유신을 계기로 우리 사회 도처에는 조국의 좌표를 직시하고 정신의 국적(國籍)을 되찾아 근면성실하게 무실역행하는 기풍이 크게 진작되고 있음이 사실이다”(임방현의 ‘근대화와 지식인 : 한국적 민주주의의 이념과 실천’). 임방현의 ‘근대화 인텔리겐치아론’은 이렇게 유신의 합리화로 귀결됐다.

한편, 한태연은 1973년부터 80년까지 유신정권 내내 유신정우회(유신체제 하에서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준정당의 원내교섭단체·유정회) 국회의원으로 있었다. 유정회는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이르는,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전국구 의원 집단이었다. 한태연은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기 전인 72년, 법무부 헌법심의위원으로 유신헌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한태연이 헌법 조문을 직접 기초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신헌법 제정의 실무는 당시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김기춘(훗날 박근혜 정부 대통령비서실장) 법무부 과장 등이 담당했다고 한다.

황산덕은 어떻게 됐을까. 한국 사법사에서 최악의 오점이 된 사건 하나가 황산덕의 법무부 장관 시절에 일어나고 말았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 사건 결심 공판이 있었던 다음 날 새벽, 사형 판결이 확정된 8명에 대해 재판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가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재판이 한창 진행되던 75년 2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진상 공개 요구에 황산덕이 “이를 문제 삼으면 반공법으로 의법 처리하겠다”고 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박태순·김동춘 공저 의 ‘1960년대의 사회운동’은 박정희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평을 내렸다. “이들(정권에 참여한 쪽)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판 개화론’의 입장에 서게 되었으며, 이후 10월 유신을 정당화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들은 정말 놀랐을 것이다. 이론과 현실은 다른 것이었다.



주간동아 2015.10.19 1009호 (p64~67)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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