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58

2018.10.05

인터뷰 | 신각수 전 주일 대사

“약속어음 받고 현금 내준 평양공동선언”

“‘우리 민족끼리’라는 감성에 빠져 북 비핵화 목표 잊어선 안 돼”

  • 입력2018-10-09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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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2018년 가을 대한민국에는 ‘평화가 왔다’는 감상적 평화 무드가 한창이다.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협력과 교류도 본격화하고 있다. 10월 4일에는 10·4 남북공동선언 11주년을 기념하고자 대규모 방북단이 평양을 찾았다. 

    남북 해빙 분위기와 달리 일각에서는 ‘우리 민족끼리’가 강조되면서 남북대화를 시작한 이유이자 목표인 비핵화가 국민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잖다.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낸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판문점 및 평양공동선언에도 비핵화는 여전히 약속어음 상태에 있다”며 “비핵화의 첫 단계인 핵동결 조치조차 이뤄지지 않은 만큼 남북협력과 교류는 어음이 현찰로 바뀌는 것을 봐가면서 진도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를 앞세워 과속하다간 우리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에 균열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10월 2일 오후 법무법인 세종 회의실에서 신 전 대사를 만났다.

    비핵화 5단계 중 첫 단계도 안 이뤄져

    9·19 평양공동선언이 북한 비핵화를 앞당기는 데 어떤 기여를 했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10월 방북이 성사되고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이 높아져 북핵 대화 모멘텀을 되살렸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비핵화 자체만 놓고 보면 뚜렷한 진전이 없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공동선언에서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폐기하고,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에 따라 영변 핵시설도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으로 볼 때, 그리고 비핵화를 위한 과정에서 볼 때 현 조치는 너무 작은 부분들이다. 비핵화는 동결→신고→검증을 위한 사찰→불능화→폐기 순으로 진행된다. 북핵 교섭이 시작된 지 6개월이 됐다. 그런데도 비핵화 첫 단계인 핵동결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의 잘게 쪼개기 전술인 ‘살라미’에 말려들면 우리의 목표인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에 이르지 못한다. 비핵화는 여전히 약속어음 상태인데, 우리는 현찰을 너무 많이 내줬다.” 

    어떤 점에서 현찰을 내줬다는 것인가. 

    “비핵화 교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레버리지’(압박카드)다. 국제사회가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유일한 수단이 제재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과 경제협력에 합의하면서 국제사회에 ‘한국이 대북제재를 위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았다. 두 번째는 남북 간 군사합의다. 상호 신뢰를 위한 조치라고 하지만 공중정찰을 금지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한강 하구를 완충지역으로 하겠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밀타격 능력도 무능화된다. 북한 비핵화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북한의 재래식 무기, 생화학 무기에 대한 위험은 그대로 남는다. 그런데 비핵화 여부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가 압도적 우위에 있는 정찰 능력과 그에 따른 정밀타격 능력을 먼저 무능화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신 전 대사는 평양회담에서 남북이 군사 분야 이행합의서를 교환하기 전 미국과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점은 한미동맹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그는 “지금은 비핵화 문제뿐 아니라 동북아 세력 균형 및 전환 차원에서도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中 견제할 나라는 미국뿐

    “지금 미국과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세력 경쟁을 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우리가 북한에 치우치거나, 중국에 기운 것으로 비치면 미국이 한미동맹을 달리 보지 않겠나. 현재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의 2.5배다. 2020년이면 3배로 더 벌어진다.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 모두를 합해도 중국 경제력에 못 미친다. 경제력 격차가 커지면 군사력에서도 차이가 난다. 국제정치에서 얘기하는 이른바 하드파워가 커지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존재가 우월적으로 커질 때 이를 견제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미국이 여기(동아시아)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한미동맹이 비핵화 후에도 중요하다는 얘기로 들린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와 유교라는 가치를 공유했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다.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와 인권을 중시한다. 그런데 중국은 어떤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가치를 보전하고 국익을 증대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한미동맹 못지않게 한중협력이 중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한중협력도 중요하다. 하지만 근간은 한미동맹이어야 한다. 한미동맹 없이 우리가 홀로 서 있다면 중국이 우리를 제대로 상대해주겠나. 일례로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두 번이나 북·중 정상회담을 했고, 북·미 회담 이후 또다시 북·중 회담을 했다. ‘내 뒤에 중국이 있다’는 점을 과시함으로써 미국이 가벼이 여기지 못하도록 한 조치 아닌가. 역지사지해보면 우리에게 한미동맹이 갖는 의미를 알 수 있다. 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자체도 중요하지만, 한반도가 자리한 동북아에서 우리가 앞으로 전략적 공간을 확보해나가는 데 한미동맹만큼 중요한 자산은 없다. 남북협력을 통해 체제 간 갈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은 좋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남북은 분단국가이고 체제 경쟁관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신 전 대사는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도 미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독일 통일 때도 미국의 역할이 컸다. 통일을 이루는 데 독일 자체 역량도 있었지만 대외적으로 전폭(fully) 지원하고 지지한 것은 미국이었다. 통독에 반대하는 프랑스와 영국을 설득했고 소련 고르바초프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우리 주변을 보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 가운데 우리를 진짜 도와줄 나라가 어디일까. 미국은 역외세력이라 영토적 야심이 없다. 그런 미국도 지금 미국 우선주의로 변화하고 있다.” 

    비핵화 문제는 남북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에게 잘해줘 북한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문재인 정부의 시도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선후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비핵화다. 정말 비핵화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을 북한 측에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

    “선언에서 비핵화 순서라도 앞으로 바꿔놓지…”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판문점선언도 그렇고, 평양공동선언도 그렇고 비핵화는 합의문에서 늘 후순위로 밀려 있다. 

    “순서라도 앞으로 바꿔놓지…. 판문점선언 나왔을 때 왜 그렇게 뒤쪽에 배치했는지 그게 제일 불만스러웠다. 남북 문제를 다룰 때는 같은 민족으로서 따뜻한 감성이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는 분단국이고,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혀 있는 곳이다. 따뜻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이 균형을 이뤄야 하고, 민족 문제이자 국제 문제라는 인식 속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두 가지 관점에서 균형점을 찾지 못하면 비핵화를 이루지 못하고, 남북관계도 진전을 보지 못한다. 무엇보다 북한이 변화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는 불안정한 평화에 그치고 만다.”

    평양공동선언에서 경협과 인도적 지원을 하기로 남북이 합의했다. 

    “지금은 비핵화에 집중해야 할 시기다. 남북관계 개선은 비핵화를 촉진하는 범위에서 완급을 조절해가며 조심스럽게 추진해야 한다. 비핵화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중·장기적으로는 남북관계 자체가 흐트러질 수 있다.” 

    만약 북한 비핵화에 실패하면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북한이 파키스탄처럼 사실상 핵무장 국가로 인정받으면 우리는 미국 핵우산에 더욱 기대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동맹은 우리가 미국을 돕고, 미국도 우리를 돕는 대등한 관계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동맹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우리가 월남에 파병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고심 끝에 이라크에 파병한 이유가 뭔가. 미국 요청에 응해서 대등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들 아닌가. 동맹은 쌍무적일 때 오래가고 건전하다. 그런데 북한이 핵무장을 완성하면 우리는 더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뭔가. 


    “미국 ‘블룸버그’에서 ‘한국은 북한의 대변인’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 결코 좋은 뜻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인식이다. 우리가 북한 핵 문제의 당사자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어야 한다. 북한은 우리의 목표인 비핵화로 끌고 올 대상이다. 우리가 국제사회에 미국과 북한 사이의 메신저로 비쳐서는 안 된다. 중재자가 아닌 비핵화 촉진자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가 먼저 사회 내부적으로 비핵화에 대한 컨센서스를 이루고자 노력해야 한다. 북한을 설득하고 북한과 합의하려는 노력을 우리 내부에서 먼저 해야 한다. 내부적으로 의견 통일이 안 된 상황에서 어떻게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을 설득할 수 있을까. 초당적 입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 안보 문제는 공론화를 많이 할수록 좋다. 초당파적으로 외교무대에서 한목소리를 내야 우리의 국익을 확보할 수 있다.” 

    국제사회와 협력도 중요할텐데…. 

    “북한 비핵화를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컨센서스를 기본으로, 남북과 한미관계가 1차적으로 중요하다. 다음으로 한일, 한중, 한러 등 주변국과 관계도 모두 활용해야 한다. 한아세안, 한EU(유럽연합) 관계도 중요하다. EU에는 영국과 프랑스 등 2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있다.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전체적으로 조율해가면서 북한 비핵화를 위해 외교력을 총체적으로 발휘해야 한다.”

    “과거사에 발목 잡혀 현재와 미래를 포기해선 안 돼”

    신각수 전 주일 대사는 “북한 비핵화를 촉진하려면 일본의 힘까지 빌려야 한다”며 “과거사에 발목 잡혀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북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일본의 역할이 있을까. 

    “북핵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당사국은 한국과 일본이다. 미국이 본토에 대한 북핵 공격 능력 제거에 초점을 맞춰 북핵의 CVID를 이루지 못하는 상황을 막는 데 한국과 일본은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 양국은 긴밀히 협력해 미국이 북한과 비핵화 협상을 할 때 완전한 비핵화 목표에 이를 수 있도록 함께 견인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비핵화에 따른 대가를 요구한다면 일본의 역할이 있을 것 같다. 

    “북 비핵화의 종착점에 북·일 수교 문제가 있다. 현실적으로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우리가 대일배상금으로 8억 달러를 받았듯,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북·일 수교를 하게 되면 막대한 대일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 그 돈은 북한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꼭 필요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북한 비핵화로 상호 윈윈(win-win)할 수 있는 관계다.” 

    비핵화 국면에 ‘저팬 패싱’이 이뤄지는 것을 반기는 시각도 있다. 

    “저팬 패싱은 안 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근간이 일본에서 출발하고 있다. 북한 문제를 다뤄가는 과정에서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고, 일본도 우리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또 한 가지는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 경쟁관계가 부각된 세력 전환기에 한국과 일본은 같은 이해를 갖고 있다. 아시아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집합체가 OECD 회원국 아닌가. 그런 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가치적으로 매우 가깝다. 중국이 책임 있는 이해당사국으로서 법치에 의한 동아시아 질서를 형성하도록 하는 데 한국과 일본은 같은 이해관계에 놓여 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와 미래까지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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