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지구상 가장 위대한 쇼’의 인권유린

北 9 · 9절 70주년 맞아 ‘제2의 아리랑’ 집단체조 공연 부활

  • 입력2018-07-10 10: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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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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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서 9월 9일은 정권 창건 기념일로 9·9절 또는 국경절로 불린다. 9·9절은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과 함께 북한의 5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한은 1948년 8월 25일 의회격인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거를 실시한 뒤 같은 해 9월 2일 최고인민회의 제1기 1차 회의를 소집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9·9절을 맞아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군사퍼레이드도 해왔다. 특히 이번 9·9절은 ‘공화국’ 수립 70주년인 만큼 대규모 행사를 벌일 것으로 보인다. 3월 북한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9·9절에 대대적인 경축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도 1월 1일 신년사에서 정권 수립 70주년을 ‘대경사’로 기념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북한이 준비 중인 대규모 행사는 집단체조(매스게임) 공연으로, ‘아리랑’이 대표적이다. 북한은 2002년 김일성의 제90회 생일을 맞아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아리랑’을 처음 선보인 이래 2004년과 2006년을 제외하고 2013년까지 거의 매년 체제선전과 외화벌이 목적으로 집단체조 공연을 벌여왔다. 북한은 2014년부터 지금까지 핵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감행에 따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조치 등으로 외국인 관광객이 급감하자 ‘아리랑’ 공연을 중단한 상태였다.

    세계 최대 규모 야외공연

    북한의 2012년 ‘아리랑’ 공연 마지막 장면. 북한의 어린 학생들이 집단체조 공연을 위해 공을 이용한 체조와 다리 찢기 연습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중국 고려여행사 홈페이지]

    북한의 2012년 ‘아리랑’ 공연 마지막 장면. 북한의 어린 학생들이 집단체조 공연을 위해 공을 이용한 체조와 다리 찢기 연습을 하고 있다(왼쪽부터). [중국 고려여행사 홈페이지]

    ‘아리랑’은 집단체조와 예술이 결합된 세계 최대 규모 야외공연으로, 다양한 음악과 함께 무용, 체조, 서커스, 카드섹션 등으로 구성돼 있다. 공연마다 10만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해 2007년에는 세계 최대 집단체조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아리랑’의 내용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업적을 찬양하고,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것이다. 또 미국을 비판하고 핵과 탄도미사일 등 군사력도 과시한다. 특히 수많은 무용수가 똑같은 동작으로 춤추는 ‘칼군무’와 스크린화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카드를 펼쳐 만드는 대형 그림인 카드섹션이 공연의 백미로 꼽힌다. 

    5년 만에 재개되는 집단체조 공연의 주제는 경제적으로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4월 20일 개최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3차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 건설 노선’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고 ‘경제건설 총력 노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북한은 이번 공연에서 ‘정상국가’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하는 내용을 선보일 것으로 관측된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점은 3대 세습을 정당화하고 김 위원장의 리더십을 강조할 것임은 분명하다. 실제로 중국 베이징에 사무실을 둔 북한 전문 여행사인 고려여행사는 새 집단체조 공연 제목이 ‘빛나는 조국’이라고 밝혔다. 고려여행사는 이번 공연은 그동안 ‘아리랑’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던 집단체조와는 다른 내용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고려여행사는 또 북한의 새 집단체조 공연은 9월 30일까지 하기로 확정됐으나 10월 초로 연장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시작도 안 한 공연의 기간 연장 얘기가 나오는 것은 한국이나 미국 최고위층이 깜짝 초청돼 공연을 관람할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갈 수도 있다고 밝힌 적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은 가을에 평양에서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10월 3일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저녁시간에 ‘아리랑’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비판에도 관람을 강행했다. 

    이번 공연은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벌써부터 예약 판매가 잘되고 있다. 고려여행사는 “이번 공연의 티켓 가격은 최저 80유로(약 10만3000원)”라며 “이번 공연을 관람하는 여행상품 2개는 이미 예약이 마감됐다”고 밝혔다. 최근 들어 북한 관광상품은 중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중국 정부는 6월 19일과 20일 김 위원장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제3차 북·중 정상회담 이후 북한 관광을 확대하는 등 제재 완화 움직임을 보여왔다. 중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강력한 경고로 대북제재 완화 조치의 속도를 어느 정도 조절하고 있지만, 중국인의 북한 관광은 앞으로 대폭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한의 이번 집단체조 공연은 외화벌이용으로는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이번 공연이 반미나 핵무기 과시 등이 아닌, 한반도 평화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성될 경우 국제사회에서 북한 이미지를 세탁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북한이 집단체조 공연을 재개한 노림수가 바로 이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루 10시간씩 6개월 동안 연습

    하지만 이번 공연에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가 있다. 국제사회는 과거 ‘아리랑’ 공연에 심각한 인권유린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2014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북한 정권은 어린 학생들을 집단체조 공연을 위해 10시간씩 6개월 동안 연습시켰다’면서 ‘공연 참가자들이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 아래 콘크리트 바닥에서 연습하다 기절하는 일이 흔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어린 학생들이 4~6개월간 학교 수업시간을 희생하고 하루 종일 연습한다’며 ‘자기가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는 어린 학생들은 체벌을 받거나 저녁에 추가로 연습해야 한다’고도 밝혔다. 

    당시 공연에 참여했던 한 탈북자는 “급성 맹장염의 고통을 참아가며 연습한 8세 소년이 제때 치료받지 못해 사망했다”면서 “사망한 아이는 김정일이 지켜보기로 한 행사를 위해 생명을 바쳤기에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 증언했다. ‘아리랑’ 공연에 동원된 어린 학생들은 화장실에 드나드는 횟수를 줄이고자 물과 음식이 제한되는 등 행동을 엄격하게 통제받았다. 이 때문에 일사병으로 사망하거나 방광염, 심장병 등에 걸리는 사례가 속출했다.
     
    COI는 보고서에서 ‘긴 시간 혹독한 환경에서 엄격한 연습의 반복을 거쳐 거행되는 집단체조는 어린이들의 건강과 행복에 위험한 일’이라며 ‘이는 유엔 아동권리협약 제31조와 제32조에 위반된다’고 지적했다. 제31조는 ‘모든 아동은 적절한 휴식과 여가생활을 즐기며,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한다. 제32조는 ‘모든 아동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해서는 안 되며, 건강과 발달을 위협하고 교육에 지장을 주는 유해한 노동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북한은 1990년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했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북한이 ‘지구상 가장 위대한 쇼’라고 선전하는 이번 집단체조 공연을 앞두고 올여름 북한의 어린 학생들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고 피눈물 나는 고통을 참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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