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9

2017.10.18

베이스볼 비키니

가을에 미쳤던 남자들

김유동· 김정수·김재걸 등 포스트시즌에 유독 빛났던 선수들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입력2017-10-17 10: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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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에서는 ‘누구나’ ‘그 순간에는’ ‘한 방’을 기대해도 좋다. OB(현 두산) 출신 김유동(63)을 통산 타율 0.235인 타자로 기억하는 팬은 없다. 김유동은 만루홈런이다.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 때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인 삼성 라이온즈 이선희를 상대로 때린 그 쐐기 홈런 말이다.’

    2013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쓴 제 기사 중 일부를 가져온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야구에서는, 특히 ‘가을야구’에서는 ‘누구나’ ‘그 순간에는’ ‘한 방’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구선수라면 기꺼이 추남(秋男)이 되기를 꿈꿉니다.

    김유동은 타자 중 최고 추남이라 할 만합니다. 김유동은 이 프로야구 첫 번째 한국시리즈를 타율 0.400(25타수 10안타), 3홈런, 12타점으로 마쳤습니다. 당연히 첫 번째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는 그의 차지였습니다.



    ‘걸사마’의 추억

    가을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정규리그 때는 실력을 잘 감추고 있어야 합니다. ‘걸사마’ 김재걸(45·현 삼성 코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김재걸은 1995년 삼성이 실업 야구팀 현대 피닉스와 법적 소송까지 벌인 끝에 데려온 선수였지만 타격에 재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정규리그 통산 타율 0.230). 97년 삼성 지휘봉을 잡은 백인천 감독은 타격 강화를 이유로 그를 주전 라인업에서 제외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001년부터는 ‘대수비’ 요원으로 분류했습니다.

    2005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 그가 출전했던 것도 주전 선수의 부상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삼성 주전 2루수 박종호(44  현 LG 트윈스 코치)가 2-2 동점이던 5회 말 스퀴즈 번트를 시도하다 공에 손가락을 맞아 더는 한국시리즈에 출전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2루 수비를 볼 수 있던 김재걸이 대타로 불려 나오게 되는데….

    김재걸은 첫 타석부터 우익수 키를 넘기는 1타점 2루타를 때려냈습니다. 그는 7회 말에도 2루타를 추가하며 3타수 2안타, 2타점, 1득점으로 이 경기를 마감했습니다. 김재걸은 이 한국시리즈 4경기에서 12타수 6안타, 5볼넷, 2타점, 4득점을 기록했고 삼성은 4전 전승으로 우승했습니다.

    기자단 투표로 뽑는 한국시리즈 MVP는 오승환(35·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이 차지했지만, 삼성은 이와 별도로 ‘팬들이 뽑은 한국시리즈 최고 선수’라는 상을 만들어 김재걸에게 선물했습니다. 김재걸은 이때 활약을 바탕으로 이듬해 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에 승선해 4강 주역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투수 쪽에서는 김정수(55·현 KIA 타이거즈 코치)가 단연 추남입니다. 김정수는 2014년 삼성 배영수(36·현 한화 이글스)가 24번째 한국시리즈 경기에 등판하기 전까지 한국시리즈에 가장 많이 출장(23경기)한 투수였고, 여전히 7승(3패 1세이브)으로 한국시리즈 최다승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입니다.

    김정수가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빛을 본 것은 선동열(54·현 야구대표팀 감독) 덕분입니다. 선동열은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지만 9이닝 3실점으로 무너졌습니다. 김정수는 이 경기 연장전에 구원 등판해 2이닝을 4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 승리투수가 됐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수확하며 신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습니다. 김정수는 그 후로도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7개를 더 낀 뒤 유니폼을 벗었습니다. 그래서 야구팬 중에는 “한국시리즈에선 선동열보다 김정수가 뛰어났다”고 평가하는 이가 적잖습니다.

    그럼 여기서 퀴즈 하나. 김정수와 선동열 가운데 한국시리즈 통산 평균자책점이 더 좋았던 선수는 누구일까요. 정답은 선동열(1.74)입니다. 김정수는 2.44로 선동열보다 0.7점 높았습니다. 또 김정수는 포스트시즌에서 볼넷을 가장 많이(62개) 내준 반면, 선동열은 유일하게 삼진 100개를 넘은(103개) 투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가을에는 선동열보다 김정수’라는 인식이 퍼진 것일까요. 문제는 선동열이 통산 자책점 1.20(정규리그 기준)으로 커리어를 마친 ‘국보급’ 투수였다는 것. 그래서 선동열은 정규리그보다 가을에 약했던 이미지가 남아 있고, 3.28에서 2.44로 평균자책점을 끌어내린 김정수를 가을만 되면 ‘언히터블(unhittable)’ 투수로 기억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벼도 아닌데 고개 숙인…

    거꾸로 가을만 되면 고개를 숙이던 남자들도 있습니다. 삼성 김시진(59·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은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먼저 100승 고지를 넘어선 투수였지만 포스트시즌에서는 승리 없이 9패, 평균자책점 5.14를 기록하는 데 그쳤습니다. 9패 중 7패를 한국시리즈에서 당해 ‘새가슴’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삼성 투수 가운데 김시진만 가을야구에 약했던 건 아닙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삼성은 정규리그에 강하고 포스트시즌에 약했던 팀. 김진웅(37·포스트시즌 통산 평균자책점 6.90)도 통산 9패로 김시진과 함께 가을야구 최다 패전 투수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삼성은 가을야구에서 93패로 가장 많이 진 팀입니다.

    타자 중에서는 제이 데이비스(48·당시 한화)가 가을을 많이 탔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7년 동안 뛰면서 통산 타율 0.313, OPS(출루율+장타력) 0.915를 기록한 데이비스였지만 포스트시즌 32경기에서는 타율 0.188, OPS 0.578이 전부였습니다. 김태균(35·한화)도 가을에 약한 남자입니다. 타율은 0.325에서 0.202로, OPS는 0.963에서 0.702로 내려앉았습니다.

    사실 ‘야잘잘’(야구는 잘하는 X이 잘한다는 속어)은 진리입니다. ‘홈런왕’ 이승엽(41·삼성)은 가을야구에서 통산 홈런 14개를 쏘아 올려 포스트시즌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포스트시즌 최다승(10승) 투수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옛 현대 유니콘스의 정민태(47·현 한화 코치)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추남을 찾느냐고요? 그건 가을야구는 기록을 찾아보는 재미보다 ‘누구나’ ‘그 순간에는’ ‘한 방’을 터뜨릴 수 있다고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재미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조동화(36·SK 와이번스)는 2007년까지 통산 홈런이 딱 1개뿐이던 ‘쌕쌕이’ 타자였지만(현재까지 9개) 그해 한국시리즈에서만 홈런 두 방을 날리며 ‘가을동화’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물론 이름이 동화가 아니더라도 가을야구에는 누구나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과연 올해는 누가 가을동화를 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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