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3

2017.08.30

<새 연재> 황승경의 on the stage

“모피 입고 군림하는 사랑의 여신을 위하여!”

연극 | 비너스 인 퍼 (Venus in Fur)

  • 공연예술학 박사  ·  동아연극상 심사위원회 간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7-08-28 17:12:34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비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서양예술에서 그녀의 풍만하고 육감적인 나체는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선망의 대상이다. 예술작품 속 비너스는 손이나 천으로 여성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고 있지만 공통점은 모두 나체라는 것이다. 그런 비너스가 모피를 입고 있다? 연극 제목부터 흥미롭다. 

    1870년 오스트리아 소설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L. R. von Sacher-Masoch)는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로 발표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쿠셈스키는 벤다라는 여인과 노예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학대를 치료 과정으로 이해한다.

    작가 이름에서 유래한 ‘마조히즘’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 고통받으며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병적인 심리상태를 뜻한다. 극 속 벤다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인 동시에 모피를 입고 군림하는 이상적인 존재다. 자허마조흐는 실제로 파니 피스토어 남작부인과 노예계약을 맺었고, 그녀는 모피를 입고 그를 매우 잔인하게 다뤘다. 140년이 흐른 뒤 극작가 데이비드 아이브스(David Ives)는 이 소설을 각색해 연극무대에 올렸다. 그는 원작에 쏟아진 무수한 비난과 혹평을 의식해서인지 ‘극중극’의 액자형식 구성으로 만들어 원작의 변태 논란을 객관적 시각으로 희석시켰다.



    극작가와 배우의 은밀한 ‘권력 줄다리기’

    지금도 여전히 소설 속 그들이 부르짖는 마조히즘적 사랑은 보편적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시간이 약이었는지, 극작가의 탁월한 설정 때문이었는지 아이브스의 연극에는 원작에 쏟아진 혹평은 없었다. 2010년 브로드웨이 등용문인 오프브로드웨이(Off-Broadway)에서 초연을 성황리에 마쳤으며, 이듬해 브로드웨이에 입성해 2012년 토니상 최우수연극 후보에 오르고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등 승승장구했다. 2013년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이 희곡을 영화로 만들었다. 연극은 19세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소설 ‘비너스 인 퍼’를 연극화하려는 극작가 토마스(이도엽, 지현준 분)와 여배우 벤다(방진의, 이경미 분)만 무대 위에 있는 2인극이다. 그런데 여배우가 오디션에 늦는 바람에 대사를 맞춰줄 상대역이 없어 극작가가 대신 맡았다.



    오디션을 보려고 온 여배우 벤다는 소설 속 여주인공 벤다와는 이름만 같을 뿐. 천박한 여배우 벤다에게는 뇌까지 섹시하고 발끝까지 고결한 소설 속 벤다 같은 다중적인 깊이를 찾아볼 수 없다. 처음에 토마스는 시간낭비처럼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녀의 세계에 늪처럼 빠져든다. 연출가와 여배우의 ‘갑을(甲乙)관계’는 완벽하게 뒤바뀐다. 모피 입은 벤다에게 압도된 토마스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제목만으로 자칫 외설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김민정 연출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미학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치 패션쇼 ‘런웨이(runway)’ 같은 무대를 가운데에 두고, 객석은 양쪽으로 길게 배치돼 있다. 말끔한 이 연극에서 관객은 긴 무대를 오가는 두 주인공의 은밀한 ‘권력 줄다리기’를 바라본다. 그렇게 몰입된 관객은 상식적 도덕과 독단적 위선 사이에서 쟁취 과정의 주체가 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