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03

2019.08.23

포커스

홍콩 우산시위에서 돋보인 ‘소셜미디어 혁명’, 그 제3의 길

13만 명 참여하는 대화창 통해 지도부 없어도 폭력 비화를 스스로 견제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8-23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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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뉴시스]

    [AP=뉴시스]

    6월에 시작돼 벌써 11주째 이어지고 있는 홍콩 시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2014년 홍콩 학생들의 점거시위에 대해 서구 언론들이 쓰기 시작한 ‘우산혁명’이라는 말은 아직 성립하기 어렵다. 

    영어로 혁명에 해당하는 revolution에는 사상이나 방법의 급격한 변화라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revolution은 물론, 그 한자 번역어인 革命(천명을 바꾼다는 뜻)에는 기본적으로 왕조 교체 내지 체제 전환을 동반하는 정치 격변의 의미가 포함된다. 

    하지만 2014년 9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79일간 홍콩 금융 중심지 센트럴(중완)과 쇼핑가인 코즈웨이베이, 주룽반도 중심지인 몽콕 거리 3곳을 점거한 학생시위는 꽃만 피우고 결실을 맺지 못했다. 2017년 홍콩 행정장관(행정수반) 선거의 완전 직선제 요구는 묵살됐고,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한 조슈아 웡(黃之封) 등 지도부는 구속됐다. 게다가 홍콩인들은 혁명이라는 말이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체제 전복의 의미로 비칠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우산운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혁명을 갖다 붙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산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이유는 당시 시위대가 경찰의 최루가스 분사에 우산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우산은 국지적 호우(스콜)가 자주 발생하는 홍콩 날씨의 특성상 야외에서 시위할 때 필수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촛불을 들고 참가한 한국의 촛불집회에 비견해 우산시위로 부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 우산시위가 5년 만에 부활했다. 3월 31일부터 홍콩 행정청이 입법 추진한 범죄인인도 법안(한자어로 도범조례 · 逃犯條例 · 송환법)에 반대하며 시작된 ‘반조례운동’이다. 



    도범조례는 홍콩인이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홍콩으로 도주한 경우 이를 체포해 해당 국가에서 재판받게 하는 법을 말한다. 외형적으론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될 때 향후 50년간 ‘일국양제’(一國兩制 · 한 국가에 두 정치 제도)를 보장한 중국과 관련될 경우 이 법이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 홍콩인들의 우려다. 중국 정부에서 자신들을 비판하는 정치적 또는 사상적 활동을 하는 홍콩인을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만으로도 중국으로 끌려가 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시위대를 향해 홍콩 경찰이 폭력진압에 나서고, 흰옷을 입은 채 시위대로 가장한 일단의 무리가 무차별적 폭력을 휘두르는 백의(白衣)테러까지 벌어지자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시위대 규모는 점점 더 커졌다. 2014년 우산시위 때는 2030세대가 주축을 이뤘는데, 이번에는 당시 시위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느낀 중장년층과 노년층까지 가세했다. 특히 송환법 2차 심의를 앞둔 6월 들어 시위대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졌다.

    5년 만에 부활한 우산시위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AP=뉴시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AP=뉴시스]

    문화인류학자로서 홍콩 민주화 운동 과정을 추적해온 장정아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에 따르면 여성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100만 명이 반대해도 강행하는 이유는 제멋대로인 자식을 엄마로서 내버려둘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 것에 분노해 6월 14일 별도의 집회를 개최한 엄마부대의 등장이 변곡점이 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중국어로 개사한 ‘우산행진곡’이 불린 이 집회에서 “인민은 당신의 자식이 아니다. 당신은 한 지역의 수장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라며 “자식이 죽고 30년 뒤에도 ‘우리 자식들은 폭도가 아니다’라는 말을 해야만 하는 중국 톈안먼사태 희생자들의 엄마가 되지 말자”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자 “아이야 두려워 마라, 아빠가 여기 있다”며 아빠부대가 등장했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로 구성된 ‘흰머리부대’까지 지지시위에 나섰다. 

    특히 6월 16일에는 200만 명이 운집해 홍콩 단일집회 역대 최대 참가자 기록을 세웠다. 종전 최대 시위 인원은 올해 30주년을 맞은 톈안먼사태 지지시위 당시 100만 명이었다. 현재 홍콩 인구가 700만 명이므로 7명 중 2명이 시위에 참가한 셈이다. 

    이런 열기는 8월 5일 정경 분리의 전통이 강력한 홍콩 역사상 첫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항공관제탑 요원, 버스운전기사, 공무원, 교사, 자영업자를 망라해 50만 명이 참여한 이날의 총파업으로 홍콩을 오가는 수백 편의 항공편이 취소됐고, 홍콩 도심에서는 교통대란이 벌어졌다. 그러자 중국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인접한 선전에 집결하며 톈안먼사태 때와 같은 무력 진압 가능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폭우 속에 홍콩 도심 빅토리아 공원과 인근 코즈웨이베이 등에서 열린 8월 18일 집회에 다시 170만 명이 운집하며 여전히 뜨거운 투쟁 동력을 과시했다. 


    8월 18일 170만 명이 운집한 홍콩 우산시위. [AP=뉴시스]

    8월 18일 170만 명이 운집한 홍콩 우산시위. [AP=뉴시스]

    이를 ‘2차 우산시위’로 호명하는 것은 집회 참가자들 손에 어김없이 우산이 들려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시위가 2014년 시위의 연장선상에 있어서다. 

    2차 우산시위의 핵심 목표인 송환법 폐지는 사실상 달성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7년 800명의 추천 선거인단의 간선투표로 당선돼 반조례운동에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던 람 행정장관은 6월 15일 법안 처리를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19일엔 TV 카메라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했다. 7월 9일에는 “송환법은 죽었다”고 사망선고까지 했다. 

    하지만 홍콩시민은 이에 멈추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5개 조항으로 압축했다. 홍콩 재야단체연합으로 6월부터 11주째 주말집회를 개최한 ‘민간인권전선’이 제시한 5대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송환법 완전 철폐 △시위대 ‘폭도’ 규정 철회 △체포된 시위대 조건 없는 석방 및 불기소 △경찰의 강경 진압에 관한 독립적 조사 △행정장관 직선제 실시(직능대표제 폐지). 

    앞의 4개 항은 송환법 철폐 및 그 사후 처리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러나 마지막 1개 항은 2014년 우산시위 때와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결국 2차 우산시위는 송환법 철폐와 직선제 관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1차 우산시위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비, 유수식, 일제주

    하지만 시위 전개 양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홍콩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1차 우산시위는 특정 장소에 진을 치고 버티는 점거 시위였다. 또 시위 지도부를 옹위하면서 그와 함께 옥쇄도 마다않는 결사항전의 양태를 띠었다. 이와 달리 2차 시위는 ‘화이비(和理非)’ ‘유수식(流水式)’ ‘일제주(一齊走)’라는 3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화이비는 평화·이성·비폭력의 약자다. 중국 정부와 그들의 사주를 받은 홍콩 경찰이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것에 맞서 비폭력평화주의를 견지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8월 11일 경찰의 빈백건(bean bag gun·알갱이가 든 주머니탄)에 맞아 한 여성이 오른쪽 눈 실명 위기에 처하는 등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인한 부상자가 속출하자 흥분한 시위대가 이틀간 홍콩국제공항을 점거해 979편의 항공편이 취소되는 이례적인 사태도 벌어졌다. 이 때문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홍콩 진입과 유혈 진압에 빌미를 주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8월 18일 시위는 일절 폭력 행사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돼 이런 우려를 불식했다. 이때 시위대가 내건 모토가 유수식이다. 시위 참가자들이 한곳을 계속 점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집회 장소에 15분만 머무르다 빠져나가면 그 자리를 다른 집회 참가자들이 채워 전체 집회가 흐르는 물처럼 이뤄지게 하자는 뜻이다. 

    유수식은 개별 집회에 적용되는 전술적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1차 우산시위가 배수의 진을 치고 승부가 날 때까지 결사항전의 농성전을 펼치는 ‘고인 물 전략’이었다면 2차 우산시위는 그때그때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통한 장기 저항이라는 점에서 ‘흐르는 물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달리자’라는 뜻의 일제주는 홍콩의 중국 반환 기념일인 7월 1일 홍콩의회 난입사건 때 터져 나온 구호다. 6월 말 개최된 G20 정상회담에서 홍콩 문제가 외면받자 심한 좌절감을 느낀 시위대 중 100여 명이 의회에 난입했다. 그런 와중에도 화이비 원칙을 지키고자 의회 자료와 집기를 훼손하지 않고 의회 식당 내 음료수를 마신 뒤에도 ‘우리는 도적이 아닙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동전을 남겨뒀다고 한다. 그러다 자정까지 자진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 진압하겠다는 경찰의 최후 통보를 받자 폭도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얼굴을 공개하겠다는 사수대 4명을 제외하고 모두 철수했다. 하지만 자정을 7분 남겨두고 철수했던 시위대는 다시 의회로 들어가 4명의 사수대를 번쩍 들고 나오면서 “같이 들어갔으니 같이 나오자”라고 외쳤다. 이후 일제주는 ‘누구도 다른 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공동체 의식의 확산을 낳으며 시위대의 단결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고 장정아 교수는 전했다. 


    2016년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시위집회 행렬(왼쪽)과 2011년 
1월 23일 튀지니 수도 튀니스에서 열린 반정부시위. [신화=뉴시스]

    2016년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시위집회 행렬(왼쪽)과 2011년 1월 23일 튀지니 수도 튀니스에서 열린 반정부시위. [신화=뉴시스]

    21세기 들어 아시아 대륙의 서편과 동편에선 소셜미디어를 토대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변화를 이끌어낸 2가지 사례가 존재한다. 하나는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돼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중동에서 시민들의 반정부시위로 독재자들이 대거 퇴출된 재스민혁명(‘아랍의 봄’)이다. 다른 하나는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해 벌어진 촛불혁명이다. 

    전자는 튀니지의 벤 알리,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 예멘의 살레 등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독재자들의 몰락과 정권교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성과를 올린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 나라에서 이후 권력 공백기를 대체할 민주화 세력을 구축하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미완의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촛불혁명은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과 탄핵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이후 평화적 선거를 통해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안착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는 가장 성공한 소셜미디어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정권교체만 이뤄졌을 뿐, 헌정질서 자체가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혁명이라 부를 수 없다는 비판도 상존한다. 

    이런 촛불혁명에 대한 국제적 연구를 진행 중인 임채원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는 8월 18일 홍콩시위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왔다. 임 교수는 “지도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최대 13만 명까지 참여하는 소셜미디어 집단 대화창을 통해 집회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함께 논의하고 자발적인 참여로 집회가 진행돼 자칫 폭력시위로 비화할 소지를 시민들 스스로가 견제하고 차단한다는 점에서 촛불집회의 쌍둥이나 다름없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촛불을 매개로 심야 시간대에 집회가 이뤄진 반면, 홍콩에선 우산을 매개로 낮에 시작돼 밤 9시 전후로 끝났다는 차이점도 거론했다.

    우산시위는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능가하는 본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재스민혁명과 촛불혁명은 적대적 정치세력의 전면적 교체를 요구한 반면, 우산시위는 외부에서 생각하는 반중시위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내용과 목적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가림 호서대 교양학부 교수는 “중국 강경파들은 우산시위를 중국 공산주의 체제의 전복을 노리는 ‘색깔혁명’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홍콩인들은 중국 정부의 일국양제 체제 아래서 자율성을 좀 더 보장받으려는 자치권 보장운동으로 국한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람 행정장관의 사퇴를 직접적으로 요구하기보다 행정장관의 직선제 선출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이를 수용할 개연성은 매우 낮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50년의 유예기간을 홍콩인은 홍콩의 독립성과 자율성 보장 기간으로 해석하는 반면, 중국은 ‘홍콩의 중국화’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무력 진압 가능성도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전 교수는 5가지 불가론을 들어 설명했다. 첫 번째는 올해가 톈안먼사태 30주년인데 다시 홍콩 시위를 무력 진압할 경우 향후 톈안먼사태의 잠재적 폭발력을 급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미·중 무역분쟁 와중에 홍콩을 무력 진압할 경우 국제적 봉쇄로 인해 중국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부담이 배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홍콩의 일국양제를 대만에도 적용하겠다고 선전해왔던 것을 스스로 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중국과 자본주의 국가 간 금융거래 창구 역할을 하던 홍콩의 상실이 중국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 구성통화로 편입된 중국 런민화에 대한 재평가가 내년 실시될 예정인데, 홍콩 사태로 런민화가 SDR 구성통화 자격을 잃게 될 위험이 커진다는 것이다. 

    이를 감안해보면 중국 정부와 우산시위대는 물리적 충돌이라는 파국적인 상황을 피하되 현재보다는 홍콩시민의 자율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게 어떤 형태가 될까.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람 행정장관이 물러나고, 직선제는 아니되 홍콩시민들의 목소리가 좀 더 반영되는 진일보한 간선제를 통해 새로운 행정장관을 선출하며, 홍콩 경찰 최고책임자가 사죄하는 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온다. 그런 점에서 우산시위는 실패한 재스민혁명과 성공한 촛불혁명의 중간 지대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화를 모색하는 소셜미디어 정치운동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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