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4

2015.04.20

10개의 숨은 보석 크뤼 보졸레

사연 많은 와인, 가메

  • 김상미 와인칼럼니스트 sangmi1013@gmail.com

    입력2015-04-20 13: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조금은 생소하지만 와인 전문가와 애호가가 제2의 피노 누아르(Pinot Noir)라고 그 진가를 인정하는 포도 품종이 있다. 바로 가메(Gamay)다. 그런데 가메에겐 아픈 역사가 있다. 그래서일까. 약한 듯 강하게 다가오는 가메 와인을 마실 때면 왠지 애잔한 마음이 들곤 한다.

    가메 고향은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이다. 지금은 부르고뉴에서 피노 누아르와 샤르도네(Chardonnay)가 대세지만 예전에는 가메가 가장 사랑받는 품종이었다. 까다롭고 병치레가 잦은 피노 누아르에 비해 가메는 튼튼하고 잘 자라기 때문이다. 수확량이 중요했던 농노들은 가메를 선호했지만 귀족들은 가메보다 더 섬세한 맛이 나는 피노 누아르를 좋아했다.

    결국 피노 누아르를 더 많이 생산하고자 14세기 말 귀족들은 부르고뉴에서 가메 재배를 금지했고, 그렇게 쫓겨난 가메는 남쪽으로 내려가 보졸레(Beaujolais) 지방에 안착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석회질 토양의 부르고뉴와 달리 화강암 기반에 기후도 더 따뜻한 보졸레에서 가메는 매력적인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세기 후반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와인의 폭발적 인기가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이다. 보졸레 누보는 신선한 와인을 빨리 맛보려고 갓 수확한 가메로 숙성 없이 담근 와인이다. 김치로 치면 겉절이인 셈이다.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을 보졸레 데이로 선포하는 등 성공적인 마케팅으로 전 세계에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보졸레 누보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산뜻하다는 장점보다 깊이가 없다는 단점이 부각되면서 보졸레에서 생산되는 가메 와인 전체가 싸구려 이미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억울한 곳은 아마도 크뤼 보졸레(Cru Beaujolais) 마을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보졸레 북부에 위치한 10개의 최우수 마을로 보졸레 누보와는 완연히 다른, 다양한 매력의 저력 있는 가메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 마을들은 지금도 보졸레 누보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레이블에 보졸레를 명기하지 않고 마을 이름만 적을 정도로 고군분투 중이다.



    브루이(Brouilly), 레니에, 시루블(Chiroubles) 마을의 와인은 대체로 가볍고 섬세하며 체리와 라즈베리향이 매력적이다. 코트 드 브루이(Cote de Brouilly), 플레리(Fleurie), 생아무르(Saint-Amour)의 와인은 적당한 무게감에 과일향과 꽃향이 잘 어우러져 있다. 셰나, 쥘리에나, 모르공(Morgon), 물랭아방의 와인은 가장 무겁고 남성적인 스타일로 복합적인 아로마향이 나는 게 특징이다.

    크뤼 보졸레 마을들이 생산하는 가메 와인은 이제 세계 시장에서 조금씩 인정받는 분위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묵직하고 힘 있는 스타일을 좋아해서인지 국내에선 모르공, 물랭아방 와인이 가장 많이 수입된다. 10개 마을의 와인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낼 정도로 개성 넘치지만 가격은 4만~7만 원 수준이다. 비싸고 유명한 와인도 좋지만 크뤼 보졸레 마을들의 가메처럼 착한 가격에 좋은 품질을 갖춘 와인을 찾아 마셔보는 건 어떨까. 그것이야말로 와인을 마시는 참된 즐거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10개의 숨은 보석 크뤼 보졸레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