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0

2014.08.11

위기 닥쳐도 “나를 따르라”

이순신, 화합과 믿음 리더십으로 수많은 어려움 극복하고 승리 쟁취

  •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 저자

    입력2014-08-11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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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닥쳐도 “나를 따르라”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왼쪽)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난중일기’ 친필 초고본은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보관 중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도덕보다 물질적 이윤 추구에 집착한다. 그 결과 개인주의가 팽배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기심을 버리고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절실히 요구되는 게 도덕성 회복이다. 진나라 말기 병법가 황석공이 “도란 사람이 밟아가는 것이다(道者人之所蹈)”라고 했듯 올바른 도리란 인간이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이다. 특히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책임을 다하는 도리는 항상 누구에게나 귀감이 된다.

    우리는 어려운 위기가 닥칠 때마다 충무공 이순신을 첫 번째로 떠올린다. 예측하기 어려운 전쟁을 매번 승리로 이끈 그의 남다른 지략을 본받기 위해서다. 이순신은 무과 출신 장수이지만 본래 유학을 배워 문인적 소양을 쌓은 인물이다. 문인으로 출세할 수 있었음에도 붓을 던지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능력을 계발해나간 것이다.

    아첨하여 얻는 영화 부끄러운 일

    이순신은 평소 주관과 소신이 분명했다. 인생 여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지만, 나아가야 할 운명을 잠시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초극의 의지로 일에 임했으며 항상 당당한 기백과 집념을 갖고 생활했다. 그는 자신의 꿋꿋한 소신을 이렇게 드러냈다.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충성으로 목숨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초야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丈夫生世 用則效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권세 있는 이에게 아첨하여 영화를 훔치는 일은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최유해, ‘충무공행장’)



    이순신이 사회에 막 들어설 때쯤 한 말인데, 윤휴는 ‘충무공유사’에서 “(이순신이) 과거에 급제해 벼슬할 때부터 대장이 될 때까지 이 뜻을 굳게 지켰다”고 적었다. 벼슬에 나가면 열심히 일하겠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결코 불평하지 않고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는 데 만족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이순신은 사는 것이 어렵다고 권력자에게 아부하면서 한때의 부귀를 얻는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공자가 말한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와도 의미가 통하는 부분이다. 그의 삶에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욕심 없이 살겠다는 안분지족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마라

    위기 닥쳐도 “나를 따르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이상봉 패션디자이너가 함께한 ‘대한민국 영웅 프로젝트’ 제2탄 주인공인 충무공 이순신의 대형 걸개그림이 충무공 탄신일을 하루 앞둔 4월 2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옆 KT사옥 외벽에 걸려 있다.

    이순신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설령 반대하는 이가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고 관철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를 늘 강조했다. 남송 때 고종 신하인 이강이 그 당시 금나라와 타협하지 말자는 조건으로 항금(抗金)정책을 주장했으나, 반대세력인 화의파에 의해 거절당해 마침내 떠나게 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자기주장이 당장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먼저 반대의견에 따라 맞춰가며 대책을 강구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현실 도피를 하기보다 미봉책이라도 현실 참여 속에서 방법을 모색해나가는 것이 올바른 처세방법임을 말한 것이다. 제갈량이 “용병의 방법이란 남과 화합함에 달렸다(夫用兵之道 在於人和)”고 했듯 상하 간 서로 화합해 단결하면 전쟁에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은 부하들과의 신의를 매우 중요시했다. 항시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될 때마다 거듭 약속하며 다짐했던 것이다. 황석공은 “신의는 이견을 하나로 만든다(信足以一異)”고 했는데, 신의란 중론통합의 구실도 한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 8월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궤멸한 뒤, 전남 회령포에서 우수사 김억추에게 배 13척을 모아 거북선 모양으로 장식하게 해 군대의 기세를 높였다. 이때 이순신이 장수들과 약속하기를 “우리가 임금님 명령을 함께 받았으니, 의리상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 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는가. 오직 죽고야 말 것이다”라고 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인 9월 15일에는 전라 우수영 앞바다에서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오자’ 가운데 ‘치병’), 또 ‘한 병사가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여사’),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정유일기’ 9월 15일)

    이순신은 국가의 최대 위기상황에서 부하 장수들과 결사적으로 싸우기를 다짐했다. 그 결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전공을 세울 수 있었다. 신의로 독려했기에 병사들이 결사적으로 싸운 것이다. 심지어 피난민까지 배를 이끌고 와 수군 배 뒤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인간사에서 신의란 도덕 실천에 기본이 되는 덕목이다. 신의가 없다면 뜻한 일이 아무리 좋아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순신의 리더십이 위대한 이유는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 부하들이 잘 따르도록 항상 신의를 보여줌으로써 화합과 단결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위기 닥쳐도 “나를 따르라”

    조선 후기 영·정조 시기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거북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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