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0

2014.08.11

리더 갈증 시대가 ‘이순신’을 다시 불렀다

안팎으로 불안한 사람들, 국가에 헌신 ‘믿고 따를 지도자’로 대리만족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4-08-11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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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 갈증 시대가 ‘이순신’을 다시 불렀다
    영화 ‘명량’을 보는 관객의 심정은 아마도 이순신(최민식)의 아들 이회(권율)와 같았을 것이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선조의 지시까지 거스르며 ‘제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장계를 올리는 남자의 신념은 무쇠보다도 강해 태산도 움직일 것만 같다.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라는 이회의 질문에는 관객도 답이 궁금했을 것이다. 대체 그는 왜 싸운 걸까.

    8일. 영화 ‘명량’이 7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7월 30일 개봉한 최민식 주연의 영화 ‘명량’의 흥행 돌풍이 심상치 않다. ‘명량’의 700만 돌파(8월 6일 기준)는 ‘괴물’ ‘도둑들’ ‘관상’의 700만 돌파 기록보다 닷새 앞선 기록이다. 10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변호인’보다 빠른 관객몰이는 물론이고,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개봉 첫 주 동원 관객(475만) 역시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개봉일부터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68만)와 역대 최고 평일 스코어(98만), 역대 최고 일일 스코어(125만)를 쓰더니 최단 기간 100만~7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진 600만 관객도 가뿐히 넘겼다.

    1일 영화 관객 100만 명 시대

    이쯤 되면 “유례를 찾기 어려운 흥행 속도라 마케팅을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던 투자배급사 관계자들의 말이 이해가 간다.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첫 1000만 영화가 되는 건 시간문제. ‘명량’이 1000만 관객을 넘기면 국내 영화로는 열 번째 1000만 영화가 된다.

    일각에서는 개봉일인 7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 문화융성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문화가 있는 날’이라 전국 주요 영화관이 저녁 시간대에 반값 할인을 했다는 점과 투자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의 스크린 독점을 예로 들며 작품 성과를 깎아내리기도 하지만, 재미가 없으면 아무리 물량 공세를 해도 흥행에 실패하는 게 이 바닥 생리. 개봉 2주 차에 접어들었지만, 영화는 여전히 객석점유율 70%대를 유지하고 있다.



    ‘명량’은 충무공의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를 본 건 작품이 200만 관객을 넘기기 전이었는데, ‘흥행하기에는 조금 무겁지 않나’ 싶었지만 앞서가던 초등학생 무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부모에게 “진짜 재밌어! 이순신 짱이야!”라고 말하는 걸 보고 ‘먹힐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주위에서도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연인보다 가족 관객이 높은 편이다.

    이순신,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늘 손꼽혀왔지만 지금의 열풍은 놀라울 정도다. 500년도 지난 역사 속 인물에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김한민 감독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이야기다. 다 안다고 착각하면서 화석화된 인물이 이순신 아닌가. 우리가 지금 분열과 갈등 시대에 살고 있는데, 통합의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구심점을 어떤 인물에게서 찾는다면 훨씬 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이순신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2007년경 이순신에 대한 작품을 구상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보여주기식 전투보다 이순신의 정신을 전투에 담아내자는 생각이 컸기에 상영시간(128분) 절반에 가까운 61분을 해상 전투에 안배했다. 드라마 60분에 해전 60분. 투자자들에겐 생소한 스타일의 영화였기에, 투자를 받기도 쉽지 않았다. 김 감독은 “700만 명을 동원한 전작(‘최종병기 활’)이 없었다면 ‘명량’은 어림도 없는 프로젝트였다”고 누차 말했다. 이후부터는 재작업의 연속. 후반 작업을 가까스로 마무리한 건 언론 배급 시사회 하루 전이었다.

    리더 갈증 시대가 ‘이순신’을 다시 불렀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의 아들 이회는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고 아버지의 의중을 말로 풀어내는 구실을 한다(왼쪽). 김한민 감독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는 다른 질감과 스케일을 보여주려 해상 전투신에 집중했다.

    출판계로 이어진 이순신 열풍

    ‘명량’홍보를 담당한 강효미 퍼스트룩 이사는 “초반에는 기대감 때문에 영화관을 찾았다면, 지금은 입소문 덕에 신드롬적인 열풍이 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이사는 “그만큼 작품이 관객 기대에 부합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메시지를 주는 데에만 치우치지 않고, 국내 영화에서 보기 어렵던 해상 전투 장면의 완성도도 높아 연령대 불문하고 만족도가 높다.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어른들에게는 텍스트로만 접하던 역사를 영상으로 보는 재미를 준다”고 말했다.

    최민식을 비롯한 주연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순신에 ‘빙의한’ 수준으로 연기해놓고도 “아직 내 연기가 개운치 않다”는 최민식도 그렇지만, 대사 한 줄 없이 붉은 치맛자락을 흔들며 울부짖는 것만으로 관객을 울린 정씨 여인 이정현이 주는 울림도 상당하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판단과 분석 이전에 공감대나 카타르시스, 감성을 건드리는 영화가 1000만을 넘는 경우가 많았다”며 ‘명량’의 1000만 관객 돌파를 긍정적으로 봤다. 그는 “김한민 감독은 병자호란이 배경인 ‘최종병기 활’에서도 치욕의 역사 속에서 공감하고 공분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낸 감독이다. 이번에도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승리를 잘 그려냈는데, 그런 부분이 이순신을 다룬 기존 작품들과 다르게 접근한 점이다. ‘성웅 이순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더 와 닿고 감각적으로 구체화된 이순신을 그려냈기 때문에 관객이 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김 감독의 연출력에도 높은 점수를 줬다.

    충무공 열풍은 출판계로도 이어졌다. 영화를 소설로 옮긴 ‘명량’과 국내 첫 완역판 ‘난중일기’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의 제국’ 등 이순신을 다룬 신간 출간이 이어지고 있다. 이순신을 다룬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원래도 스테디셀러지만 ‘명량’개봉 이후 판매량이 3~4배 늘었다.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지난달 재출간됐다. 대형 서점에는 이순신 관련 서적 진열대가 등장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7월 이순신 관련 서적 판매량은 1705권으로 1년 전(1102권)보다 54% 증가했다.

    영화 개봉 전 작품을 바탕으로 한 소설 ‘명량’을 출판한 21세기북스 역시 영화 개봉 전후로 달라진 독자들의 반응을 실감하고 있다. 소설 집필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김호경 작가가 맡았다. 21세기북스 박정효 편집자는 “출간 이틀째 2쇄에 들어갔고, 영화 개봉 이후 3쇄에 돌입, 현재 4쇄를 준비 중이다. 이런 건 최근 소설, 문학 분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양상이 아니기에 내부적으로도 ‘이순신 신드롬’이 확실히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한다. 단순한 스크린셀러(screenseller)를 넘어, 문학적 가치를 높이고 제대로 된 역사소설을 만들고자 영화에서 표현되지 않은 부분이나 역사적 사실을 추가하고 내면의 고뇌를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부분이 영화와 다른 소설의 재미라는 평이 많다”고 말했다.

    386세대인 김호경 작가는 ‘성웅 이순신’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 어려서는 인물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도 있었지만 이번 소설 집필 과정에서 선입견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는 “‘난중일기’를 완독한 후 충무공이 무신으로서도 훌륭하지만 전쟁을 앞두고 인간적인 고민도 많고 주위 환경이 좋지 않았음에도 나라만을 생각하는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아 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 흥행에 대해 그는 “일단 작품 자체가 재미있어서 보는 것 같다. 8·15 광복절이 다가오면서 관객에게 극일 감정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명량’에 대적할 만한 작품이 없기도 하고, 최민식이라는 배우를 믿고 극장을 찾는 관객도 많은 것으로 본다”고 평했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캐릭터

    충무공 열풍은 문화계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시국이 어수선한 이때 필요한 것이 ‘이순신의 경천위지’(經天緯地·세상을 다스릴 만한 능력)라는 것이다.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은 이 같은 현상을 “과거 인물이지만 오늘날 사회에서 강력한 리더를 바라는 염원, 바람이 투영된 것”이라고 봤다. 그는 “이순신이 위인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사사로운 감정보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자세 때문이다. 거기에 무신인데도 지략까지 갖춘 보기 드문 인물이다. 세월호 참사와 군 가혹행위 사건 등을 겪으며 국민의 애국심이 옅어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황에서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애국심을 고취하는 캐릭터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사회 전반의 이순신 열풍에 대해 “세월호 참사와 유병언 사태, 육군 28사단 장병 구타 사망 사건 등이 터진 총체적 난국에서 국민이 난세의 영웅 같은 리더를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상황(명량해전)에서 고독과 두려움을 극복하며 위기를 돌파해나가는 리더(이순신)의 모습에서 국민이 애타게 찾던 참된 리더의 모습을 본 것”이라며 “영화 ‘명량’이 흥행 돌풍을 일으킨 건 지금의 대한민국 리더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나라와 백성을 진정 사랑하는 면모를 이순신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리더 찾기에 실패한 국민이 비록 작가가 만들어낸 이순신이지만 대리만족이라도 하려는 듯 극장가로 몰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답했다. “의리” 때문이라고. 이순신은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라야 하고 그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에게 있다”고 말했다. 영화 흥행이 작품성이나 완성도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애국주의 마케팅의 승리다’ ‘너무 직접적이라 불편하다’ ‘해전만 남고 캐릭터는 죽었다’는 평도 분명 일리가 있다. 확실한 것은 속수무책으로 침몰하던 세월호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민이라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줄’ 리더를 스크린에서라도 보고 싶어 할 거라는 점이다.

    리더 갈증 시대가 ‘이순신’을 다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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