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5

2013.09.16

알맹이 삶은 남고 껍데기 집은 가라!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욕망과 계급 사다리라는 통념 버릴 수 없나

  •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cspark@uos.ac.kr

    입력2013-09-13 17: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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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맹이 삶은 남고 껍데기 집은 가라!
    다산 정약용은 1801년 벽파가 천주교를 내세워 정적을 숙청한 정치적 사건인 신유박해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18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집 짓고 살아갈 땅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야 하고, 땅의 기운이 맺힌 서너 칸의 집이면 충분하며, 방 안에는 책 1000여 권이 꽂힌 책꽂이가 있으면 된다고 했다. 물론 마당과 연못을 두고, 누에 치는 잠실 세 칸을 따로 둬 아내와 마주보면서 싱긋 웃는 나날이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정치에 신물이 난 까닭인지, 문 밖에 임금이 부른다는 공문이 당도하더라도 씩 웃으며 응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승원 작가의 소설 ‘다산’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훌쩍 지난 오늘 공지영 작가는 소설 ‘행복한 나의 집’에서 집이야말로 산악인의 베이스캠프와 같아,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 잠시 피해 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이기에 언제나 돌아와 쉴 만큼 튼튼해야 한다고 묘사한다. 즉, 집이란 세계 속에 자신의 출발점으로서 중심을 잡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굳이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인간 실존의 본질은 거주하는 것이고, 거주의 완성은 집을 통해 드러난다는 얘기다.

    그저 사고파는 대상으로 전락

    그런데 매일 대하는 현실 세계 속의 집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삼이사가 사는 집이란 것이 대개는 아파트나 오피스텔이고, 헛간이나 다락방이 없는 것은 물론이며, 아이들이 장난 삼아 숨을 곳이라곤 없는, 그래서 그렇지 않은 곳에서 사는 이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한 세상 속 물건에 불과하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미를 찾는 자식들을 향해 엄마가 살가운 남도 사투리로 구슬프게 얘기하는 내용이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려 하면 뷰파인더 안에는 늘 아파트가 담긴다는 푸념이 현실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평균적 삶의 현장인 셈이며, 다르지 않음을 통해 현금으로의 교환가치를 유지하려는 속내가 밖으로 드러난 꼴이다.

    흔히 집을 일컬어 삶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지 않을 이가 과연 있겠는가.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생각과는 너무 달라 팔려고 사는 대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러니 만드는 방법 역시 다산이 가졌던 생각이나 세계 속에 위치를 차지하는 개인의 실존적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잘 팔리느냐에 집중돼 있다. 팔려고 사는 것이 집인 셈이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딱하기 그지없다.



    사람들과 말을 섞는 중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집을 단순히 이분법을 사용해 주택과 아파트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택이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이고,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파트라는 인식이다. 그러니 주택에 사느냐 아파트에 사느냐로 세상의 집을 나누는 것이다. 이런 분류 방식이 통용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아파트는 주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만이 집인 셈이니, 아파트 사고팔기를 거듭하는 세태를 제대로 짚었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발표하는 부동산 대책의 내용을 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말 그대로 부동산이라면 한자리에 꼼짝없이 위치하는 땅이고, 부동산 대책은 건축물에 대한 정책이련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아파트 거래에만 집중된다. 마당 딸린 단독주택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책 방향이 담기지 않고, 오로지 아파트 거래 활성화를 위한 세제 개편이 부동산 대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정책입안자의 머릿속에 담긴 생각 역시 우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부동산 대책이란 아파트 대책이며 사고팔기를 거듭하는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한 세제 개편인 것이다. 최근 빚어진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영·유아 무상보육 재원 마련 갈등도 정치적 배경을 제외한다면, 중앙정부의 부동산 취득세 영구 인하 정책으로 인한 지방재정의 상대적 고갈이 빚은 현상이다. 그러니 누구를 나무랄 것도 못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가치를 반영한 것이고, 그들의 집합체인 사회의 성숙도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파트 탈출이 사회 변화의 출발점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산의 생각처럼 살아야 한다는 윤리를 설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주택이 중요한 재산이 아닌 사회가 과연 있기는 한가. 아파트의 노예가 된 한국인, 아파트 평수로 줄을 세우는 한국 사회 따위의 대책 없는 자아비판에 생각이 멈춘다면 갈 길은 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에 대해 진지하고도 의미 있는 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의 끄트머리에 그 해답이 있다. 적어도 다음 세대의 우리에게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한다.

    △ 담장이나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단지 생활이 쾌적하다고 믿는 구체적 실체는 무엇인가.

    △ 얄팍한 철문을 닫으면 외부 세계와 철저히 절연되는 권태로운 생활은 과연 내가 꿈꾸던 삶인가.

    △ 전용면적 늘리기와 단지 밖 세상에 대한 치밀한 단절이 자폐적 일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 구별 짓기와 이익결사의 주체인 단지 내 주민 모두는 과연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는가.

    아파트 단지의 온갖 편의시설은 개인 비용으로 구매한 것이다. 따라서 단지 생활의 편리성 혹은 쾌적함은 스스로 마련한 비용을 들여 구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비용을 부담한 나와 그렇지 않은 남을 구별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철옹성으로 자기를 감싸고 단지 밖 일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 행위가 과연 사회구성원으로서 정당한 것인가. 그렇게 만들어진 표준적 생활공간에서 서로 다른 개인이 삶을 꾸리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브랜드와 평수로 서로를 구별 짓고, 학생의 석차로 개인을 평가해 줄을 세우는 매일의 삶이 행복감 대신 고단함을 주는 것은 아닐까.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아파트 사회는 앞으로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가치를 담보할 것인가. 질문과 대답은 끝이 없다.

    아파트 일변도의 주거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 사회 변화의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술회한 한 칼럼니스트의 글을 봤다. 그는 인구의 절반이 아파트 공화국의 유폐자인 한, 시민사회를 이야기하고 노동 계급을 말하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를 물었다. 이어서 문제의 핵심이 아파트라는 공동 주거형태 자체에 있기보다 아파트 ‘단지’에 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덧붙인 마지막 말은 단독주택이냐 공동주택이냐가 아니다. 동네를 향해 열린 주거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했다. 단지는 높은 담장이나 방음벽이 만든 내 삶의 껍데기다. 껍데기를 벗는 일이 바로 탈피고, 탈피는 생명의 진화를 위한 필수 과정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껍데기를 벗어던지는 일이다. 껍데기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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