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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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김정은에 충성 인민군 수뇌부 자고 나면 교체

김정은 체제 원칙과 계급서열 사라져…예측불허 ‘인사횡포’ 불안정 키워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3-05-27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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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3일 2009년 천안함 폭침과 2010년 연평도 포격 도발을 주도한 북한 군부 내 대표적 강경파 김격식 인민무력부장이 소장파 장정남에게 자리를 내줬다는 소식이 ‘노동신문’을 통해 확인됐다. 국내외 언론은 수개월간 이어져온 북한의 초강경 행보가 누그러지는 신호탄 아니냐는 분석을 쏟아냈다. 평양이 방향 전환을 모색하는 시그널을 보내는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9일 뒤인 5월 22일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방중 소식을 전하는 ‘조선중앙TV’는 “총참모장 김격식 동지”라고 호명했다. 앞서의 관측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튿날 언론은 “강경파 김격식 건재”를 거론하며 이를 통해 북측 행보를 짚어내려는 기사를 다시 한 번 쏟아냈지만, 북한 군부를 오랜 기간 관찰해온 전문가들은 이러한 접근 방식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몇몇 인사의 성향을 강경파 여부로 나눠 앞으로의 흐름을 전망하기보다 최근 북한군의 인사 변동이 극히 불안정하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인민무력부장과 총참모장 같은 핵심 직위가 불과 수개월 단위로 바뀌는 점이야말로 가장 염려스러운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를 정확히 확인하고자 ‘주간동아’는 2008년 8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김정은 후계구도를 준비하기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인민군 수뇌부 인사를 전수조사했다.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 북측 관영매체를 통해 확인한 인민군 주요 직위 인사 변동을 정리한 결과가 오른쪽 ‘표’다. 이를 통해 흩어져 있을 때는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던 인민군 수뇌부 인사의 최근 특성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2008~2013년 주요 직위 전수조사

    인민군 최고직위인 최고사령관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이내 김정은이 물려받았다. 같은 기간 인민무력부장은 김일철→김영춘→김정각→김격식→장정남으로 이어졌고, 군에 대한 사상적·당적 통제를 담당하는 총정치국장은 조명록의 와병에 이은 사망 이후에도 상당 기간 김정각 제1부국장이 대행하는 체제를 이어오다 최룡해를 임명했다.



    작전과 전쟁수행 등 군령권을 행사하는 총참모장(우리의 합참의장에 해당)은 김격식→이영호→현영철→김격식으로 이어졌고, 총참모부에서 핵심 구실을 하는 작전국장은 김명국→최부일→이영길로 이어졌다. 정찰총국은 대남 비정규전 무력도발을 담당하던 35호실과 조선노동당 작전부를 합친 부서로 2009년 2월 설립 이래 김영철이 국장을 맡고 있으며, 주요 전략무기를 통제하는 옛 미사일지도국은 2012년 3월 전략로케트군으로 명칭과 조직이 바뀌면서 책임자도 최상려에서 김락겸으로 교체됐다.

    국방위원회 직할부서로 인민무력부와 서열이 같은 인민보안부, 국가안전보위부도 군 수뇌부가 임명돼 왔다는 점에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 전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인민보안부는 흔히 우리의 경찰에, 방첩과 보안을 책임지는 국가안전보위부는 우리의 국가정보원에 비유되곤 한다. 다만 인민보안부장의 경우 군의 핵심 직위에서 물러난 이들이 주로 임명되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김정일 시대 오랜 기간 작전국장으로 일했던 이명수와 10개월 만에 자리에서 밀려난 최부일이 연이어 인민보안부장을 맡은 것만 봐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 쉽게 말해 나가는 사람을 위한 ‘명목상 승진’인 셈이다.

    ‘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2008년 이후 북한군 수뇌부 인사가 크게 두 차례 변곡점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김정은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교시를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에 하달한 직후인 2009년 2월,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이 당 제1비서와 국방위 제1위원장을 맡게 된 2012년 4월이 바로 그때다. 두 시기 모두 북한군 주요 직위의 절반 이상을 교체하는 대대적인 인사태풍이 있었다.

    두 주요 변곡점을 기준으로 핵심 직위를 담당했던 인물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김정일의 선군정치 시대를 함께 운위했던 ‘왕년의 거물들’이다. 오극렬 전 당 작전부장, 조명록 전 총정치국장, 김일철 전 인민무력부장, 이명수 전 작전국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2009년 2월 인사를 전후해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인민보안부장 같은 한직으로 밀려났다.

    김정일은 2009년 2월 인사를 통해 이들을 대신할 북한군 최고 전문가를 대거 발탁했다. 총참모장 이영호,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정찰총국장 김영철, 국가안전보위부 제1부부장 우동측 등이다. 살아남은 이는 전략무기 개발과 수출에 오랜 전문성을 갖고 있던 작전국장 김명국 정도였다. 쉽게 말해 김정일이 다가올 후계 이후 인민군을 책임지라는 임무를 부여한 사람들이었다. 앞 세대를 대신해 ‘새로운 20년’을 이끌어갈 것이라 예상되던 인물들이었고, 이전 경력이나 직위를 봐도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이들이었다.

    하루 만에 사라지는 사람들

    오직 김정은에 충성 인민군 수뇌부 자고 나면 교체
    그러나 이러한 김정일의 ‘그랜드 디자인’은 그의 사후 첫 수뇌부 개편이던 2012년 4월 인사를 통해 완벽히 붕괴한다. 최고 전문성을 갖췄다는 인물들이 대대적으로 실각하고, 이전까지 후방이나 군수공장 등을 맡던 이들이 전면에 등장한 것. 당료 경험 외에 군 경력이 없던 총정치국장 최룡해, 오랫동안 평안북도 8군단장을 맡았던 총참모장 현영철, 북·중 접경지역 보안을 주로 다뤄온 작전국장 최부일 등이었다(이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주간동아’ 885호 ‘북한 판갈이 대전 참모는 누구냐’ 기사 참조).

    김정일이 직접 낙점한 인물이 무대에서 속속 사라지는 흐름은 그해 7월 이영호 총참모장의 돌연한 해임으로 정점을 찍었다. 김정은 군부의 최고실세로 불리던 그가 하루아침에 “모든 직무에서 해임됐다”는 사실이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됐다. 임명이나 해임을 공식 발표하는 일이 극히 드문 북한군으로서는 전례 없는 전격 실각이었다. 이를 전후해 인민무력부장 김영춘도 자리를 떠났고, 총정치국을 책임지던 김정각 제1부국장은 인민무력부장으로 옮겼지만 6개월을 넘기지 못했으며, 역시 핵심 실세로 분류되던 우동측 역시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후 김정은 시대의 주요 군 수뇌부 인사에는 몇 가지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당시 인사 직후 북한 내부에서 주요 직위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인물 검증 작업이 진행됐다는 게 첫 번째다. 당과 내각, 군부를 가리지 않고 진행된 이러한 검증 작업은 주로 충성도와 개인비리 등을 중점적으로 확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평양에서 시작돼 지방까지 이어진 이 대대적인 검증 작업은 ‘김정은 사람들’로의 교체를 위한 수순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이때부터 인민군 수뇌부 인사는 몇 개월 단위로 단행되는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졌다.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 김정일 시대 주요 인물들이 최소 2~3년간 자리를 지켰던 것과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난맥상이다. 군 수뇌부 계급이 강등됐다가 복원되는 사태도 이어졌다. 인민군 장령급(장성급) 계급은 소장-중장-상장-대장-차수-원수 6단계로 나누는데, 현영철 총참모장은 차수에서 대장으로 1단계, 김영철 정찰총국장은 대장에서 중장으로 2단계, 최부일 작전국장은 대장에서 상장으로 1단계 강등됐다가 이내 복원되는 수순을 거쳤다. 김정은이 직접 발탁한 ‘새로운 인물들’ 역시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흔들린 것이다.

    올해 들어 돌발인사는 한층 심해졌다. 먼저 최부일이 작전국장 임명 10개월 만에 이영길로 교체돼 인민보안부장으로 옮겨갔다. 더욱 주목할 것은 최근 확인된 현영철 총참모장의 해임과 김격식 인민무력부장의 총참모장 임명. 역대 인민무력부장 가운데 총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는 인민군 창군 이래 한 차례도 없었다. 작전국장→총참모장→인민무력부장의 순서를 거치는 것이 보편적인 서열경로였기 때문이다.

    오직 김정은에 충성 인민군 수뇌부 자고 나면 교체

    최룡해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이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특사로 중국을 방문한 소식을 실은 ‘노동신문’ 5월 23일자 1면.

    그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전방 1군단장이던 50대 장정남이 급히 인민무력부장으로 발탁됐다는 점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대외적으로 북한군을 대표하는 인민무력부장 자리가 총참모장 인사의 종속변수로 전락한 것이다. 더욱이 장정남이 공개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2년 12월 17일 금수산태양궁전 앞에서 열린 육·해·항공 및 반항공군 장병 결의대회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최고사령관의 최후 돌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다”며 김정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그는 결국 인민군 최초로 상장 계급장을 단 상태에서 인민무력부장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인사변동 와중에 홀로 건재한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위상이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자리를 지킨 것은 물론, 다른 인물들의 계급이 강등됐다 복원되는 중에도 차수 계급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영호 전 총참모장이 전격 해임된 이유가 그와의 세력다툼에서 패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있고, 장정남이 처음 등장한 결의대회가 총정치국 주관이었다는 점을 들어 인민무력부장 발탁 역시 그의 작품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5월 22일에는 김정은 특사로 중국을 방문했다. 요컨대 군 경력이 전혀 없는 그가 인민군 전체를 주무르는 핵심 중 핵심으로 활약하는 셈이다.

    최룡해 총정치국장의 위상

    잠시 시계를 뒤로 돌려보자.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총 16회 진행된 장령급 인사를 살펴보면, 서방국가 군대처럼 계급서열을 존중하고 각 군종·병종별 안배와 실무능력 중심의 인선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자리 잡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신동아’ 2006년 6월호 ‘조선인민군 최고수뇌부 대해부’ 기사 참조). 한 번에 두 계급 이상을 승진한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정치군관보다 군사지휘관이 상장급 이상에 주로 진출하는 등 야전을 우대하는 균형감각도 유지했다. 발탁인사보다 내부승진을 우선시 하는 원칙의 정착도 감지되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러한 흐름이 김정은 시대 들어 완전히 무너졌다. 사상적 통제를 책임지는 총정치국이 급부상하면 본래 임무인 전쟁수행 능력이나 지휘경력은 부차적 문제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최근 북한군 수뇌부 인사는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만을 기준으로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기에 충분하고, 계급서열이나 보직운용 시스템을 무시한 발탁인사 역시 김정은의 군 장악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마디로 김정은 1인을 위해 앞 시대의 원칙과 순리가 붕괴된 셈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전문가의 말이다.

    “김정일 시대 지휘관들의 최대 강점은 길게는 10년 가까이 한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이었다. 수뇌부가 자주 교체되는 우리로서는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으므로 최근 북한군 수뇌부의 잦은 인사는 우리에게 유리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경험이 일천한 지휘관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가늠하기 어렵고, 김정은에 대한 충성심만을 기준으로 삼다 보면 합리적인 결정이 어려울 것이다. 특히 반복되는 ‘인사 횡포’ 속에서 자존심을 다쳤을 일부 인사들의 심리를 감안하면 체제 안정성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본다. 여러모로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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