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7

2012.10.08

“뉴기니에 끌려가 죽은 오빠 목 메인 위령제 올렸다”

남영주 씨, 오빠 故 남대현 씨 야스쿠니신사에 이름 올라 분통

  • 정리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2-10-08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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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태평양 전 지역으로 전장을 확대하려고 남태평양 섬 뉴기니를 전략적 요충지로 선택해 1942년 12월 병력 14만 명을 투입했다. 하지만 13만 명이 기아와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여기에 동원된 조선인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8월 말 오빠 남대현 씨가 사망한 뉴기니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온 남영주(73) 씨를 만나 현재까지 계속되는 강제동원의 아픔에 대해 들어봤다.

    “뉴기니에 끌려가 죽은 오빠 목 메인 위령제 올렸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동요 ‘오빠생각’)

    어려서부터 이 노래를 불렀어요. 오빠가 보고 싶을 때는 더 많이 불렀죠. 뉴기니에 위령제를 올리러 가서 오빠한테 그 동요를 들려줬는데 오빠가 들었겠죠?

    오빠는 1942년 어느 날 갑자기 강제징용됐어요. 그때 오빠가 열아홉 살, 내가 여섯 살이었죠. 그날 신작로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만장기와 함께 일본 순사가 보였어요. 8대 종손이자 1남4녀 중 맏아들인 오빠는 군복을 입었는데, 그 뒤로 두 번 다시 못 봤어요.



    경남 진주에서 사범대학을 다니던 오빠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들을 귀여워했어요. 쌍둥이인 저희에게 기타도 쳐주고 아코디언도 연주해주고, 뒷산으로 데려가 그네도 태워줬죠. 쌍둥이가 같은 간따꾸(원피스)를 입고 있으니 얼마나 귀여웠겠어요.

    오빠 떠난 후 집안 풍비박산

    오빠가 돌아오지 않으니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밖에요. 어머니는 아들을 그리워하다 이듬해, 그러니까 내가 일곱 살 때 화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일본에서 누가 왔다고 하면 기어코 찾아가 만나고, 할아버지는 왜놈한테 아들 뺏겼다며 아버지를 책망하고, 할머니는 용왕님한테 기도드린다며 지팡이 지고 여기저기 다니고, 손을 보지 못한 채 오빠만 기다리던 올케언니는 수절하다 끝내 야밤에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죠.

    행복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어머니 삼년상을 지낸 뒤 손을 보려고 새장가를 갔고, 새어머니가 딸 넷을 내리 낳다 아들을 낳았는데도 집 안에 웃음이 없었어요. 새어머니도 전처 자식들을 거두기가 쉽진 않았겠죠. 결국 부인 무덤가에서 울던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시자 제가 대신 오빠 유골을 찾는 일을 하게 된 거예요.

    1990년부터 활동을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남대현이 1944년 8월 10일 사망했다’는 기록을 찾곤 억장이 무너졌어요. 이후 오빠가 뉴기니에서 죽고, 야스쿠니신사에 오빠 이름이 올라 있다는 사실도 알았죠. 오빠가 일왕을 위해 죽었다는 누명을 쓰고 방치됐다니…. 견딜 수 없었어요(상자기사 참고).

    한일 시민사회 공동모금으로 뉴기니 방문

    2010년 일본에서 피해자 강연을 하면서 제 사연을 소개했어요. 우연히 우에다 게이시 일본제철원징용공재판지원회 활동가가 강의를 듣고 저에게 “뉴기니에 가서 위령제를 올리자”고 제안해왔죠. 지난 7월에는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와 함께 일본에 가서 일본 시민사회와 함께 뉴기니 방문을 위한 모금활동을 했어요. 그때 저와 같은 이유로 혈육을 찾으려고 뉴기니를 20번 넘게 갔다는 여자 분이 봉투에 5만 엔(약 70만 원)을 주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이렇게 450만 원을 모았고 자비 150만 원을 보탰죠.

    8월 말 일제강점기에 아버지를 뉴기니에서 잃은 고인형 씨, 우에다 씨와 함께 뉴기니에 갔어요. 막상 뉴기니 땅을 밟으니 오빠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반가웠죠. 30여 년간 부친이 강제징용된 뉴기니에서 유골 발굴조사와 위령제를 올리는 이와부치 노부테루 태평양전쟁역사관 이사장이 현지에서 행여 우리가 먹지 못할까 봐 김치까지 준비해놓는 걸 보고 일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군이 이 척박한 땅에 온 이유는 알 수 없었지요.

    위령제를 지내려고 오빠가 죽은 야카무루 지역에 가는 건 쉽지 않았어요. 8월 29일 새벽 4시에 출발해 3시간 동안 지프차를 타고 달려가다 길목에 물이 범람하는 바람에 돌아와야 했거든요. 그래서 이튿날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채 작은 보트를 타고 4시간여를 달린 끝에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때마침 고기잡이를 하던 원주민들이 우리 보트를 끌어주고, 제사 지내는 것도 도와줬죠. 힘들게 사는 주민들을 보니 뭐라도 주고 싶었지만 제사 지내러 밤, 대추, 곶감만 가져가 미안했어요.

    우에다 씨가 야카무루에 도착한 뒤 “오빠가 임종하신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보라”고 하기에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빠를 기리는 제사를 지냈어요. 오빠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더라고요. 죽어서라도 헐벗지 말라고 바지, 저고리, 버선, 속옷, 두루마기를 태웠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어요.

    오빠를 그리워하는 건 오빠가 보고 싶어서기도 하지만, 오빠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향수가 커서일 거예요.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화가 나지만 우리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할 생각이에요. 정글에서 오빠 유골은 찾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야스쿠니신사에서라도 오빠 이름을 빼고 싶어요. 충남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에 위패로 모시긴 했는데, 그것도 폐쇄된 곳에 자리해 잔디밭에 오빠 이름이 적힌 작은 비석 하나를 남기는 게 소원이에요. 물론 위패도 못 모신 강제동원 피해자가 많다고 하니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해보는 데까지 해봐야죠.

    야스쿠니신사에 갇힌 조선인 징용자

    조선 출신 2만636명 ‘합사’…철회 소송에도 묵묵부답


    “1. 계급-육군오장 2. 소속부대-보병제80연대 3. 사몰년월일-소화19년(1944년) 8월 10일 (전사) 4. 사몰장소-동부뉴기니 야카무루 5. 사몰시본적지-조선경상남도의령군정곡면성황리86 6. 사몰시유족-(부) 기홍 7. 합사년월일-소화34년(1959년) 4월 6일 이상.”

    이는 남영주 씨 오빠 남대현 씨의 야스쿠니신사 합사 확인서다. 여기에는 남대현 씨의 본적지와 사망지는 물론 아버지 이름까지 명시돼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을 위로하려고 제사를 지내는 민간 종교 법인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전쟁 희생자의 ‘이름’을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으로 칭해 영새부에 기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1869년 무신전쟁 전몰자들을 위해 창건한 동경초혼사로, 1887년 신사로서는 유일하게 육·해·군 전몰자 위령을 위한 군사 종교시설이 됐다. 당시 청일전쟁, 러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등에서 전사한 군인 외에 아사자 등도 영령으로 미화해 신으로 합사했고, 전후 민간 종교 법인이 됐다.

    문제는 이곳에 일제강점기 시대의 피식민지인 5만여 명의 이름도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1975년 현재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수는 대만 출신 2만7656명, 조선 출신 2만636명. 그중에는 생존했는 데도 사망자로 합사된 사람도 있다. 게다가 야스쿠니신사는 이름이 영새부에 기록되는 것, 즉 ‘합사’되는 것에 대해 본인에게 의사를 묻거나 유족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족에게 통지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야스쿠니신사의 무단 합사를 철폐하려는 소송이 2001, 2006, 2007, 2008년 잇따랐다. 피고는 일본 정부와 야스쿠니신사고 원고는 영새부에 이름이 올라간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로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재판소는 “종교 기관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합사 철회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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