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3

2012.02.06

화성인 금융회사, 금성인 투자자

이해 못할 금융 상품 버젓이 판매에 수천만 원 ‘묻지마 투자’ 여전

  • 이성구 금융소비자연맹 회장

    입력2012-02-06 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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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분명한 정보 제공으로 소비자 기만한 저축은행

    서울에 사는 최모(46) 씨는 월이자지급식 금융 상품을 찾던 중 T저축은행 직원으로부터 고금리 월지급상품을 소개받았다. T저축은행 직원은 최씨에게 “우리 저축은행은 88클럽에 가입해 안전할 뿐 아니라 원금도 보장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도해지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이후 T저축은행은 영업정지를 당했고, 최씨는 원금 보장이 되기는커녕 손실을 입을 처지에 놓였다. 결국 최씨는 T저축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며 금융소비자연맹에 민원을 제기했다.

    # 변동금리로 대출해주고 높은 고정금리 챙긴 단위 농협

    충남 서산에 사는 김모(65) 씨는 2006년 5월 단위 농협에서 영농자금으로 5000만 원을 대출받았다. 그는 대출받을 당시 시중금리에 따라 이자가 변동된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시중금리가 떨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높은 이자를 냈다. 그러다 기준금리가 바뀌었음에도 농협이 1년 6개월간 부당하게 높은 고정금리를 받아온 사실이 2008년 공정거래위원회 적발로 드러나자 분통을 터뜨렸다.

    #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환헤지한 시중은행



    서울에 사는 이모(55) 씨는 환차익을 노리고 해외 펀드에 가입했다. 이후 환차익을 예상하고 환매하려 했지만, 은행이 제멋대로 환헤지해 당초 목적을 실현할 수 없었다. 가입 당시 이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으며, 안내 자료에서도 이런 설명을 찾아볼 수 없었다.

    금융소비자연맹이 접수한 대표적인 금융 소비자 피해 사례다. 최근 금융 상품이 융합화, 복합화하고 금융공학기술과도 접목하면서 소비자는 금융 상품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금융감독당국이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상품 개발과 판매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다 보니 금융회사 이름만 다를 뿐 실질적인 차이는 거의 없는 유사상품이 시장에 범람하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 보험 상품 개발의 기초가 되는 수익률을 기준 공시이율의 상하 10% 내에서 정하도록 규정하고, 수수료 요율을 획일화하는 등의 규제가 보험료나 각종 수수료에 별반 차이가 없는 보험 상품을 양산하는 것이다.

    금융 소비자들이 금융 상품을 거래할 때 꼼꼼히 따져보지 않는 것도 문제다. 기껏해야 기본 조건과 이율만 확인하고, 정부가 알아서 잘 감독하겠거니 하는 생각에 이름난 금융회사 상품에 덜컥 자산을 맡긴다. 아는 사람이 권유한 상품이니 무조건 괜찮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금융회사들은 더 나은 상품을 기획하려고 애쓰기보다 마케팅에 주력한다. 금윰 소비자에게 금융 상품의 내용을 알리려고 노력하는 대신 상품을 팔아넘기는 데 열을 올리는 것이다. 소비자와의 관계를 이용한 연고 판매, 대출 시 보험이나 펀드, 심지어 자사 주식까지 끼워 파는 연계 판매도 관행적으로 한다. 간혹 차별화한 상품이 나와도 금융회사 간 담합이나 법적 제한 등으로 상품을 제대로 비교해볼 기회조차 없다.

    공급자 중심의 금융 시장

    화성인 금융회사, 금성인 투자자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는 금융 상품에 대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임에도 아직까지 금융 상품 비교 정보를 제공하는 데는 법적 제약이 따른다. 예를 들어 보험업법 124조는 보험 상품을 비교 및 공시하는 경우, 생명보험협회 및 손해보험협회 산하의 보험 상품공시위원회와 협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보험협회는 공급자 중심의 이익단체인 만큼 실질적인 비교가 어려운 실정이다. 공시위원회 위원 구성도 소비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구조다.

    지금까지 금융 시장은 복잡하고 전문적이라는 이유로 금융 상품에 대한 정보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직접 판단하도록 맡기기보다, 금융회사가 디자인하고 금융감독당국이 인증했으니 ‘믿고 사라’는 식의 공급자 중심으로 형성됐다. 의료서비스의 경우에도 정부가 정한 보험수가 혹은 의료진이 정한 대가를 소비자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편이지만, 병·의원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의료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추세다. 이에 비하면 금융서비스는 의료서비스보다 더 공급자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사기 안 당하면 다행인 지경

    금융 상품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소비자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 제공 형태를 바꿔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복잡한 금융 상품에 대한 정보를 더 어렵고 장황하게 제공한다. 펀드 상품을 소개할 때 나오는 ‘집합투자기구’ ‘폐쇄형’ ‘액티브 펀드’ 같은 용어는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보험 용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지의무’ ‘거절체’ ‘표준체’ 같은 용어는 들어도 금방 잊어버릴 만큼 난해하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이나 넷북이 금융 상품보다 훨씬 복잡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넷북을 고르기 전 많은 시간을 투자해 정보를 따져보고, 판매자 또한 자기 상품이 다른 상품에 비해 어떤 점이 뛰어난지를 알리기 위해 CPU 처리 속도, 기억 용량, 화면 해상도, 배터리 지속 시간 등 주요 선택 요소에 대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이 덕분에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소비자는 40만∼50만 원 하는 상품을 구매하는 데도 상당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 반해, 수천만∼수억 원 혹은 그 이상의 금융 상품을 선택할 때는 금융회사의 권유만 믿고 판단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금융감독당국은 소비자 권리 확대에 신경 쓰기보다 금융 상품의 경쟁을 제한해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데 더 노력한다. 무지한 고객에 대한 무차별적 환헤지 상품 가입 권유, 근저당권 설정비 소비자 전가, 대출 이자 폭리와 편취, 증권사의 투자 권유를 통한 불법 영업, 카드사의 포인트 서비스 과대광고, 보험회사의 보험금 지급 지연이나 거부 같은 횡포와 보험료 담합, 저축은행의 후순위채권 부당 판매 등 금융 소비자 피해는 다 열거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소비자의 불만이 높아지는데도 금융감독당국은 제대로 된 대책을 제시한 적이 없다. 금융감독당국이 그저 ‘사기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정도의 인식을 갖고 금융회사 책임을 축소하려는 경향까지 있어 심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금융감독당국은 금융 상품을 선택할 때 필요한 정보를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할 것을 의무화하고, 비교 정보 제공 등에 대한 규제도 완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금융회사와 금융 소비자 간 정보 비대칭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 소비자의 피해 구제 또한 쉽게 이뤄져야 한다. 제도적으로는 소비자 피해가 발생할 경우, 금융회사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진 만큼 각종 입증 책임도 금융회사가 지도록 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물도록 해야 한다. 공동소송, 단체소송 등도 보완해야 한다. 금융감독당국의 일방적 감독과 규제보다 다수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과 적극적 권리 행사를 통한 시장 감시가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소비자 권익보호는 물론, 건전한 금융 시장 형성과 금융 산업 발전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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