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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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때마다 부활한 ‘단군’

홍익인간 사상은 포용과 보편성 … 한민족 동질성 회복과 구심점 구실 수행

  • 이근철/ 국학원 운영이사

    입력2005-09-28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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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울 때마다 부활한 ‘단군’

    개천절을 맞아 서울 사직공원의 단군성전에서 열린 행사. 이제는 단군의 부활보다도 단군정신의 부활이 중요하다.

    4338주년 개천절이 다가왔다. 우리에게 국조 단군은 어떤 존재인가.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 치우 천황을 되살린 것 외엔 우리가 단군을 돌아본 적이 없는 듯하다.

    2001년 9월에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단군에 대한 국민 의식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54.3%가 “단군이 민족 동질성 회복 및 구심점 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단군에 대한 존재 인식에 대해서는 “신화적 인물”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54.5%로, “역사 속의 실존인물”이라고 대답한 응답자 40.4%보다 많았다. 그렇다면 신화적 인물일지라도 민족의 구심점 형성을 위해 단군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단군을 실재하였던 인물로서 고조선의 건국 시조로 알고 있었다. 역대 통치자들은 자신을 단군의 계승자로 자처했고, 일반 백성들은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간주했다. ‘제왕운기’에 동북부여·남북옥저·예맥 등이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씌어 있고, ‘삼국유사’는 “고구려 제1대 동명왕 주몽은 단군의 아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라 화가 솔거가 단군 초상을 1000매 그린 것이라든가, 고려 시대 삼남 지방에서 집집마다 단군의 초상을 모시고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후기 신라와 고려 시기에도 단군을 민족의 원시조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신화·허구로 왜곡

    그런 단군이 신화나 허구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무단통치로 악명 높았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의 명령으로 1910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전국의 경찰서를 동원해 단군 관계 역사서와 조선 지리서 등 수십만 부의 책에 ‘불온서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압수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중추원에 ‘조선사편찬과’를 설치하고 1925년 이를 ‘조선사편수회’로 개편했는데, 조선사편수회는 조선 총독과 정무 총감들의 지휘 아래 조직적인 조선사 왜곡을 감행하였다. 이때 “조선사의 편찬 기준은 편년체”라고 하여, 이 기준에 맞지 않는 단군 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의 역사를 신라 박혁거세의 건국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위원으로 조선사 편찬에 앞장섰던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1512년에 중간한 ‘삼국유사’ 정덕본 정본에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昔有桓國)”는 기사를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昔有桓因)”로 바꿔, 고조선 건국 사실을 깎아내리고 환인과 환웅을 신화적 내용으로 조작 유포하여 일반화되게 했다.

    그는 건국신화까지 포함한 일본의 국가 기원 연대(기원전 660년)보다 약 1700년이 앞서는 단군 조선의 건국을 인정하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설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 같은 역사 왜곡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군 조선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는 가장 오랜 사서는 13세기 말의 ‘삼국유사’가 아니라 그보다 한 세기 반 앞선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동천왕 21년 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의 도읍터이다”는 기록이 있는데, 도읍은 국가가 존재했던 것을 확증하는 용어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제왕운기’에는 “모든 단군(皆檀君)”이라는 표현이 나와, 단군이 복수임을 암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또한 ‘고기’ ‘단군고기’ ‘단군본기’ 등 옛 기록들을 인용해 “단군은 조선의 시조이다”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중국 측 기록인 ‘관자’에는 “팔천 리의 큰 땅을 가진 조선”이라는 기록이 있고, ‘산해경’에도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중국의 대표적 정사인 ‘사기’ ‘한서’ ‘신당서’ 등에도 “팔조금법” 등 조선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있다.

    종교적 차원 아닌 새 정신문화 코드로

    고조선이 고대국가를 형성했다는 증거로는 그 시기가 청동기시대와 겹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발견된 전남 영암군 창천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등의 청동기 유물은 기원전 2500년대의 것으로 판단되고, 만주 하가점 하층문화 유물은 기원전 2400년대의 것으로 측정되고 있다. 이러한 발굴을 통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말하는 단군 건국 연대의 사실성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단군은 부활했다. 고려 때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와 백성이 유린당했을 때 민족의 주체성이 강한 사서들을 통해 단군이 부활했고,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나타나면서 실학자들이 고조선의 강역 문제를 연구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홍암 나철에 의해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존재한다”는 명분으로 단군을 구심점으로 한 신앙 운동, 국학 운동,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단군이 부활했다는 것은 단군이 민족의 원시조로서 동질성 회복과 구심점 형성에 핵심적 구실을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과거 단군이 종교적 차원에서 부활됨으로써 오늘날 학계와 종교계 일부에서는 단군 부활에 필요 이상의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 부활한 단군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이자 통치이념인 홍익인간 사상은 종교적, 영토적, 인종적 차원의 배타성을 뛰어넘는 포용성과 보편성을 갖고 있다. 홍익인간 사상 속에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평화 사상이 담겨 있다.

    치우 천황이 붉은 악마로 부활했던 월드컵 때의 경우처럼 우리에게는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정신문화 코드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단군이요, 홍익인간 사상이다. 앞으로 우리 과제라면 단군보다는 단군 사상을 부활시킴으로써 단군을 우리 역사 속의 인물로 자리 매김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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