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4

2004.03.04

‘살 빼는 약’알고 보니 ‘사람 잡을 약’

강남·분당서 한 달에 15kg 감량 ‘소문’ … 몸이야 어찌되든 식욕부진·설사 등 부작용 악용한 처방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2004-02-26 1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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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빼는 약’알고 보니 ‘사람 잡을 약’

    과연 약만 먹고 살을 뺄 수 있을까? 비만 전문의들은 이를 믿는 소비자보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의사들이 더 문제라고 말한다.



    만약 먹기만 하는 것으로 부작용 없이 한 달에 살이 10kg씩 쑥쑥 빠지는 다이어트 약품이 개발된다면? 아마 그 약품을 개발한 제약사는 곧바로 세계적인 제약사로 발돋움하고, 그 약품은 인류를 가장 행복하게 해준 약품(해피 드럭)으로 기록될 것이다.

    현재 ‘살 빼는 약’으로 공식 판매가 허가된 의약품은 지방의 흡수를 막는 X약품과 식욕을 억제하는 R약품뿐. 하지만 이마저도 운동과 식이요법의 보조 수단으로 환자의 상태를 봐가며 처방할 뿐이다. 약 복용만으로 단시간에 살이 빠질 수는 없다는 게 전문의들의 설명이다.

    그런데 최근 기자 앞으로 한 달 동안 복용하면 살이 15kg 이상 빠진다는 의약품이 배달돼 왔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 사는 한 여성(37)이 보내온 이 약품은 분당에 있는 T의원에서 처방하고 인근 T약국에서 혼합, 판매한 것으로 1일분 약 한 봉지에 알약 4알 이 들어 있었다. 지난해부터 분당과 서울 강남구 아줌마들 사이에 “밥 꼴도 보기 싫게 만든다”고 소문난 약이었다. 친구 소개로 이 의원을 알게 됐다는 이 여성은 바로 이 ‘살 빼는 약’을 먹고,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다 기자에게 이 약을 보낸 뒤 기자와 만났다.

    내용물은 비타민·항우울제 등 알약 4개



    “두 달 전 ‘살 빼는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며칠 뒤부터 몸이 축축 처지고 두통이 심해지면서 구토가 나 약 복용을 중단했습니다. 산 약국에 문의해도 ‘괜찮으니 계속 먹어라’고 해 다시 복용했더니 구역과 구토 증세가 나타나면서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 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지요. 분당과 강남 아줌마들 사이에선 ‘살 빼는 약’이라고 하면 대부분 알 만큼 유명한데, 나도 문제지만 이 약품을 수백 명 이상이 먹었거나, 지금 먹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제보를 받고 난 후 먼저 이 ‘약’의 정체부터 알아봤다. 대한약사회에 질의한 결과 1일분 한 봉지에 든 알약 4개 모두 다이어트와 완전히 거리가 먼 약품들이었다. 비타민 B제제, 만성기관지염과 천식치료제로 사용되는 기관지확장제, 비염과 콧물치료제, 우울증 환자를 치료하는 항우울제가 알약 4개의 정체였다.

    이들 약품 설명서에 쓰여 있는 부작용에 관한 설명은 기자를 더욱 놀라게 했다. 약을 먹고 제보자가 보인 반응들이 하나같이 이 약품들의 부작용과 똑같았다. 확인 결과 주요 부작용은 △기관지확장제: 구역, 구토, 식욕부진, 설사, 빈맥, 두통, 어지러움, 졸음 △비염·콧물치료제: 구역, 발진, 무력감, 현기증, 두통, 빈맥, 부정맥, 안면 창백, 저혈압, 공포, 불안, 변비 △항우울제: 식욕감퇴, 구역, 설사, 무력증, 어지러움, 두통, 불안, 신경과민증, 불면증, 졸음, 피곤, 발한 등이었다. 부작용은 대부분 식욕과 관계가 있었다. 특히 항우울제의 경우 신경성 식욕 과항진증 환자, 즉 극도의 탐식(貪食) 증상을 나타내는 환자의 식욕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용되고 있지만, 정신과적으로 심각할 정도의 문제가 발생한 경우에만 처방되는 전문의약품이었다.

    결국 이 의원의 원장은 환자의 몸이야 어떻게 되든, 약품의 부작용을 이용해 식욕을 줄여보려 했던 것이다. 대한비만학회 소속 한 대학교수(가정의학 전문의)는 “약품의 부작용을 이용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부작용이 심한 약들을 사용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도덕성을 의심케 하고 환자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 의원과 약국의 부도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의원에서 발행하는 처방전의 약품명에는 약 이름 대신 자신들끼리만 알 수 있는 기호를 작성해 환자들이 약품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도록 했다. 또 환자들에게는 “비만 관련 치료비는 보험 처리가 안 된다”며 1인당 진료비 1만원과 약값 5만원을 따로 받아놓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는 진료비 9900원을 포함해 3만3000원 상당의 보험급여를 다시 청구했다. 보험공단에서 돈 받고, 환자에게서 또 받고. ‘2중 허위청구’를 통해 이 의원과 약국은 국민의 혈세 또한 축내고 있었던 셈이다.

    ‘살 빼는 약’알고 보니 ‘사람 잡을 약’

    T의원이 ‘살 빼는 약’을 지어주며 발행한 처방전과 T약국이 발행한 약품판매 영수증. 처방전에는 약품의 이름 대신 ‘살 빼는 약’을 암시하는 기호만이 쓰여 있고, 약국의 영수증에는 이 약국이 환자에게 진료비를 따로 받고도 보험급여를 신청한 사실이 적시돼 있다.

    건강보험공단 가입자상담실의 한 관계자는 “비만 치료비는 보험이 안 되는데도 모두 다른 용도로 신청이 돼 보험적용을 받았다”며 “이는 분명한 불법 허위청구”라고 밝혔다. 성남시 분당보건소도 이 의원과 약국에 대해 의약분업의 원칙을 무시하고 불법 담합한 혐의로 조사에 들어갔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의원이 환자의 상태를 전혀 보지 않고 부작용이 심각한 전문의약품을 마구 팔고 있다는 점. 심지어 의원을 한 번 방문한 사람에게는 택배나 퀵서비스로 한 달치 약품을 배달해줄 정도다.

    실제 기자가 환자를 가장해 이 의원과 약국을 방문해본 결과, 의사와 약사중 그 누구도 “어디 아픈 데 없느냐, 현재 먹고 있는 약이 없느냐” 등 환자의 현 상태에 대한 문진이나 검사는 전혀 하지 않았고, “한 달치만 먹으면 15kg 빠진다. 포만중추를 속여서 식욕을 떨어뜨린다”는 말만 반복했다. 약국에서는 복약 지도도 따로 하지 않았다. 의원의 간호사와 약사에게 “배달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한 달 뒤에 약이 떨어지면 퀵서비스로 배달해준다”며 “배달료는 무료”라고 밝혔다. 이는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지도 않고 처방전을 조작한다는 반증인 것. 이 약품들은 전신질환이 있는 환자가 먹을 경우 심장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약품들이지만 이들은 ‘알 바 없다’는 반응이었다. “부작용이 없느냐”는 질문에 의사와 약사 모두 이렇게 답했다.

    “부작용은 전혀 없고요. 현재 250명의 사람들이 이 약을 먹고 살을 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양심불량’ 비만 클리닉이 한두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전문의약품을 비만치료제로 사용하는 클리닉이 늘어나자 대한비만학회가 지난해 4월 이들 약물을 비만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비만 약물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선포했다. 하지만 이는 ‘권고’로 그쳤을 뿐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 의료정책실의 한 관계자는 “환자가 의료사고로 직접 형사고발하지 않는 이상, 의사의 처방이 잘못됐다며 이를 제재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의사가 판매를 허가할 때의 치료목적이 아니라 그 부작용을 이용할 목적으로 의약품을 사용하는데, 국가가 이런 의사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면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국가의 의약품 인·허가권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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