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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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軍 뒤죽박죽 대응 원인은 한미 불협화음

북한 DMZ 지뢰 도발의 뿌리, 한층 더 불안한 이유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5-08-17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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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軍 뒤죽박죽 대응 원인은 한미 불협화음
    ‘주간동아’는 5월 발간한 987호 ‘남북 총격전 월 1회 수준, 휴전선이 위험하다’ 기사를 통해 지난해 하반기 이후 비무장지대(DMZ) 인근의 군사적 충돌이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가 진상 조사에 착수하고,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 자격으로 합동참모본부를 방문해 한국군의 휴전선 대응태세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등 한미 간 이견이 심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6월 발간한 992호에서는 이러한 한미 간 갈등이 미군 측 공식문서로 확인됐다는 사실도 추가로 보도했다.

    그리고 두 달 남짓, 우려는 현실이 됐다. 8월 4일 북한군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목함지뢰에 한국군 장병 두 사람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도발행태에 한국 국방부와 청와대의 대응은 혼선을 거듭했고, 당초 공언한 ‘철저한 응징보복’과 ‘도발 시 원점타격’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비난이 잇따르는 상황. 정부 당국자들과 국회 국방위원회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이번 사건의 부실한 대응 과정에도 역시 제대로 조율되지 못한 한미 간 이견이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번 지뢰 도발이 전후 맥락 없이 터진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간 꾸준히 높아진 DMZ 인근의 긴장이 불거져 나온 ‘결과적 현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10월 29일 북한군 GP(감시초소)에서 우리 측 GP에 기관총 2발을 사격한 것을 끝으로 3년 8개월간 잠잠하던 휴전선은 2014년 6월 2차례, 10월 3차례, 11월 1차례 등 집중적인 총격전을 이어갔다. 대부분 수십 발 규모의 기관총 연속사격이었다. 군 당국이 사실관계를 공개하지 않아 주목받지 못했을 뿐, 휴전선을 둘러싼 남북한 충돌은 이때 이미 비등점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통신감청에서도 이상징후 못 잡아

    올해 들어서는 DMZ 내부에서 움직이는 북한군 동향이 기묘하기 짝이 없었다. 병사들이 10~20명씩 무리 지어 군사분계선(MDL) 인근에 은폐한 채 장시간 머무는가 하면, 4월 18일과 7월 11일에는 10여 명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의 MDL을 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군 당국은 북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담력을 키우려는 시도’ 정도로 판단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MDL을 440m나 넘어와 철책 통문 북쪽에 2발, 남쪽에 1발의 목함지뢰를 매설하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단순한 돌발행동이 아니었음이 명확해졌다.



    일부 군 당국자들은 북측이 이 무렵 반복된 MDL 월선을 통해 남측의 감시체계와 사각지대를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남측이 경고방송이나 사격을 가하는 지점은 동선이 노출되는 지역이고, 그렇지 않은 지역은 사각지대임을 파악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 이렇게 확보된 동선을 따라 남방한계선 철책까지 내려와 지뢰를 매설하는 동안 북측의 행동은 한국군 감시장비나 병력에 전혀 탐지되지 않았다.

    지난해 벌어진 일련의 총격전과 관련해 유엔사 군정위는 대부분 남측이 첫 사격을 가한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2010년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한국군의 대응태세가 강화된 이래 북측이 어떤 의도로 MDL을 넘었는지와 관계없이 경고사격을 가하는 근무수칙이 자리 잡았고, 이 때문에 DMZ 내부의 총격전이 급증했다는 게 유엔사 군정위 측 시각이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2010년 북한이 천안함·연평도 사건을 감행함에 따라 한국군은 북측이 MDL을 넘으면 자동반사적으로 경고사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휴전선 대응태세를 강화했다. 한국군 수뇌부가 “쏠지 말지 묻지 말고 먼저 조치하고 보고하라”고 반복해 언급한 것이 이 무렵의 일. 이렇게 한국군이 DMZ 내부 주도권을 강화해나가자 북한 측은 더욱더 잦은 월선으로 대응했고, 철저한 동선 확인과 사전준비를 거쳐 남측 철책 주변에 지뢰를 묻는 초유의 도발 방식으로 보복에 임했다. 통신감청부대에서조차 이상징후를 전혀 확인하지 못했을 정도로 주도면밀한 도발이었다.

    정말 장관의 기억이 틀렸을까

    청와대-국방부 혼선에 어른대는 갈등의 그림자


    靑·軍 뒤죽박죽 대응 원인은 한미 불협화음
    “8월 4일 밤 북한 도발로 의심된다는 보고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무슨 소리냐, 8월 4일 보고 때는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였고, 북한 소행 의심은 5일 오후에나 보고됐다.” “기억이 잘못됐던 모양이다. 북한 소행 의심은 5일에 보고된 게 맞다.” 8월 12일 하루 동안 국회와 청와대를 오가며 진행된 ‘청와대 보고시점’ 논란의 얼개다. 첫 번째는 이날 오전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 현안보고에서 했던 말이고, 두 번째는 이날 오후 청와대 관계자들이 나서서 반박한 내용. 청와대의 강경한 태도를 확인한 국방부는 결국 이날 늦게 세 번째 문장에서처럼 장관 발언을 철회했다.

    과연 한 장관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그가 이날 국회에서 했던 말의 앞뒤를 꼼꼼히 따져보자. “북한 소행이 의심된다는 보고가 있었음에도 통일부가 이튿날 북한에 남북고위급회담을 제의했다는 밀이냐”는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의 질문에 한 장관은 “상부에 (지뢰 사건을) 보고드렸는데, 정부는 북한에 대한 대화와 압박을 병행한다는 차원에서 통일부에서 계획된 조치를 한 것 같다”고 답한다. 사실관계 착오라고 보기 쉽지 않은 이유다.

    청와대의 의사결정 과정이 도마에 오른 이날, 한 장관의 발언으로 가장 큰 생채기를 입은 사람은 단연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이다. 한 장관은 이날 자신은 지뢰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과 한 차례도 전화통화를 한 적이 없고, 관련 보고는 합동참모본부에서 국가안보실 상황실로 직접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논란 대상이 된 8월 4일과 5일의 보고 역시 김 실장과 한 장관 사이의 통화라는 게 당국자들의 설명.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 사이에는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없었던 대신 김 실장이라는 중간단계를 통해서만 이뤄졌다는 뜻이다.

    국가안보실과 국방부의 오랜 긴장관계가 함께 구설에 오른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군 당국 안팎에서 ‘안보실이 옥상옥(屋上屋) 노릇을 하려 한다’거나 ‘명확한 지침도 주지 않으면서 (국방부의) 재량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온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 심지어 국방부 수뇌부가 교체하고자 하는 특정 인사가 국가안보실의 ‘배려’로 살아남았다는 설왕설래가 인사철마다 반복될 정도다. 한때 직속상관이었던 데다 직전 국방부 장관인 김 실장을 ‘모시고’ 일해야 하는 한 장관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결국 이번 논란이 남긴 것은 광범위한 직접 소통보다 청와대 몇몇 참모를 거치는 간접 경로를 선호해온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 위기국면에서 어떤 한계로 나타나는지에 대한 교훈인 듯하다. 북한 소행이 확인된 후에도 주무장관과 전화 통화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박 대통령은 8월 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주재하지 않았고, 정부와 정치권 인사들이 줄줄이 위문한 부상자 병실도 8월 13일 현재까지 찾지 않았다.




    “미국이 반대했다”

    유엔사와 주한미군은 이번 사건으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는 게 미군 측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설명이다. 앞서 본 대로 그간 사령관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한국군에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긴장 완화를 위해 노력해왔지만, 북측이 교묘하기 짝이 없는 도발로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 사건 직후 유엔사 일각에서 “전방부대의 자체적 기획에 가까워 보인다”며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 등 권력 핵심의 지시에 따른 기획도발일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군 당국자들은 사건 발생 이후 대응 과정에서 상당한 지연이 발생한 것 역시 유엔사 측의 이러한 태도를 의식한 바 크다고 말한다. 8월 4일 아침 7시 35분쯤 상황이 벌어진 직후 한국군 당국은 우리 측 지뢰일 개연성이 있다며 말을 아꼈다. 내부적으로 북측 목함지뢰임을 확인한 5일에도 집중호우로 떠내려온 것일 수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언론에서 북측 도발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사를 준비하기 시작한 5일 오후에야 북한 소행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엠바고(embargo)를 걸었다. 보도 시점을 ‘공식조사가 마무리될 때까지’로 미뤄달라는 공식 요청이었다.

    이러한 사실 공개 지연에 대해 국방부는 “DMZ 주변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할 한국군-유엔사 합동조사단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고 설명하지만, 관계 당국자들이 전하는 ‘진짜 속내’는 사뭇 다르다. 그간의 DMZ 상황에 대해 한미 간 시각차가 워낙 크다 보니, 유엔사의 공식 확인이나 인정 없이 북한 소행으로 의심된다는 ‘추정’을 공개하기가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이번 사건을 논의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는 사건 발생 후 나흘이 지난 8월 8일 처음 소집됐다. 연평도 포격 등 주요 도발은 물론, 북한 권력층 인사의 이상동향에 대해서도 당일 회의를 열곤 했던 전례와는 사뭇 달랐다. 8월 12일 국회 국방위원회 현안보고에 출석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5, 6일 진행한 합동조사 과정에서 북측 소행임을 확인했지만, 7일 유엔사에서 그 같은 결론을 확정해 보내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미군 측의 공식 확인 없이 NSC를 소집하고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액션’을 취할 수 없었다는 방증이다.

    대북 심리전 재개라는 1차 대응조치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국방부 관계자들이 사건 직후 보고 과정에서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군 233 GP에 포격을 가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미군 측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는 게 국회 국방위원회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후 이 부분이 문제가 되자 “확인해줄 수 없다”로 국방부 당국자들의 말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주간동아 취재 결과 이러한 응징보복 시나리오가 검토된 것 자체는 사실로 보인다. 8월 8일 NSC 상임위원회에 보고된 대응방안에도 ‘북측 GP 격파’ 방안이 선택지 중 하나로 담겨 있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기 때문. 그러나 2013년 마련된 한미 국지도발공동대응계획에 따르면 이러한 군사행동에는 주한미군 측과의 논의가 필수적이다. 그에 따라 진행된 협의 과정에서 미국 측이 “(자위권 발동 차원의) 원점타격은 화력 포격에 대한 대응개념일 뿐”이라는 취지로 사실상 반대의사를 전해왔다고 이들은 말한다.

    결국 8월 8일 NSC 상임위원회에서 결론 내린 첫 번째 대응조치는 대북 심리전 재개였다. “도발에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청와대의 공식 입장 역시 이 자리에서 결정됐다. 이는 8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영국 외무부 장관과 면담한 자리에서 한 말을 통해 고스란히 반복됐다. 한 예비역 고위관계자는 “(우리는) 북한의 도발에 한미가 원활히 협조해 대응하자는 취지에서 국지도발공동대응계획을 만들었지만, 미국 속내는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한국 측 행동을 통제할 제도적 장치를 만들려는 것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A급 경계태세의 진실

    靑·軍 뒤죽박죽 대응 원인은 한미 불협화음
    문제는 앞으로다. 앞서 설명한 대로 2010년 이후 고조돼온 휴전선의 긴장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 사건 공개 직후 국방부는 “앞으로 북한군이 MDL을 넘을 경우 경고사격 없이 즉각 조준사격을 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민구 장관 본인은 8월 12일 국회에서 “검토 중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DMZ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한국군의 대비태세가 훨씬 강력해지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절치 않은 대응’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던 대북 심리전 재개 역시 그리 간단치 않다. 8월 10일 경기 파주와 연천 2곳에서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면서 군 당국은 인근 부대에 A급 경계태세를 발령한 바 있다. 만에 하나 북측이 확성기를 조준타격할 경우 대응사격을 가하기 위한 조치다. A급 경계태세가 발령되면 전방부대의 K-9 자주포 대대가 장탄을 완료한 채 사격위치에서 대기하고, 대구 등 후방 공군기지의 전투기 편대 역시 공대지 미사일을 장착한 뒤 출동 명령을 기다린다. 군 당국은 앞으로 확성기 방송을 휴전선 전체에 걸쳐 있는 11개소 모두로 확대한다는 계획. 북측 대응 여하에 따라 휴전선 전체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민간단체들마저 북측이 ‘최고존엄 훼손’이라며 강력 반발해온 대북전단을 살포하겠다고 나섰다.

    여기에 부실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청와대-국가안보실-국방부의 의사소통 체계와 평양 내 권력투쟁에서 궁지에 몰린 북한군 야전 지휘관들의 현실을 감안하면, 끝 간 데 모르고 고조되는 긴장국면에 대한 우려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무엇보다 8월 4일 이후 일주일 동안 대응 과정을 좌우했던 한미 간 불협화음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 가장 염려스럽다. 과연 한반도는 최악의 위기를 피해갈 수 있을까. 두 차례의 지뢰 폭발음은 시작에 불과했을 수도 있다.

    또 다른 불안, 북한 군부의 속내

    ‘생존 경쟁’ 내몰린 옛 선군 세력, 위기 조성으로 돌파?


    靑·軍 뒤죽박죽 대응 원인은 한미 불협화음
    8월 4일 벌어진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사건과 관련해 전문가들이 지목하는 가장 염려스러운 부분은 북한 군부의 현재 상황이다. 조선인민군 핵심 인사들, 특히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주요 지휘관들이 김정은 체제 구축 과정에서 숙청과 처형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평양 내부의 세력 판도를 뒤집기 위해 이들이 도발 이후 상황을 국지분쟁 수준의 고강도 무력충돌로 연결하려 시도할 개연성이 적잖다는 것이다.

    김정일 시대 이른바 ‘선군정치’의 주도세력으로 승승장구했던 북한 군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장성택 당시 조선노동당 행정부장이 인민군 각 부대에 분산돼 있던 외화벌이 권한을 당 행정부로 집중하는 과정에서 이권에 개입할 근거를 잃기 시작했다.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후에는 장성택과 조직지도부 연합세력이 이영호 당시 총참모장을 숙청했고, 장성택마저 처형된 2013년 연말 이후로는 황병서 총정치국장과 조연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일환 당 근로단체 부장 등 김정일 시대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순식간에 부상하면서 군부의 위상이 급속도로 추락했다.

    4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숙청을 비롯해 자고 일어나면 인민군 핵심 보직이 바뀌는 최근 상황은 이러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주요 지휘관의 계급이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수모 역시 김정은 시대 들어 본격화된 것. 조직지도부 출신인 황병서가 군의 사상적·정치적 통제를 책임지는 총정치국장 직위를 장기간 유지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사실상 군부가 조직지도부의 하부조직으로 전락한 것에 가까운 구조다. 요컨대 인민군 주요 지휘관에게 최근의 처지는 단순히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과시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마저 경각에 달려 있다고 느낄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상황 전개에서 이러한 군부의 위기의식이 극단적인 방식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는 등 상황이 악화될 경우 이를 책임질 야전 지휘관들의 ‘존재감’이 한층 커질 수밖에 없음은 불문가지. 일각에서 서해 도서에 대한 무력 점령 시나리오 같은 최악의 경우를 거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과 권력 모두를 잃은 북한 군부가 평양 권력투쟁에서의 판세를 뒤집기 위해 강 대 강 대결구도를 만들어내려 시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뢰 도발로 촉발된 현재의 긴장 고조가 더욱 염려스러운 또 다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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