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8

2015.07.27

하루 시작을 환하고 뜨겁게

성실한 새벽형 호박꽃

  • 김광화 농부작가 flowingsky@hanmail.net

    입력2015-07-27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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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시작을 환하고 뜨겁게
    나는 새벽형 인간이다. 중요한 일들을 주로 새벽에 집중해서 하는 편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오늘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컴퓨터를 켜고 일을 조금 한 다음 밖으로 나선다. 이때 눈에 띄는 꽃이 있으니 바로 호박꽃이다. 집 앞 텃밭에서 환하게 나를 맞으며 인사한다.

    “좋은 아침!”

    “안녕, 너희도 좋은 아침.”

    이렇게 꽃과 인사를 주고받다 보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고 여유가 생긴다.

    호박은 힘이 좋다. 봄에 심은 모종이 사방팔방 덩굴을 뻗으며 무섭게 자란다. 땅바닥을 기다 담벼락이나 나무가 있으면 덩굴손으로 잡고 오른다. 그러다 여름이 다가오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가을 서리 내릴 때까지 덩굴 따라 계속 핀다. 아침마다 보는 누런 꽃.



    손바닥만한 꽃에 꿀통이 주렁주렁

    도대체 몇 시부터 피는 걸까. 어느 하루, 날이 밝자 마음먹고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그런데 벌써 피어 있다. 다음 날은 전날보다 좀 더 일찍 갔는데 역시 피어 있다. 아니, 그럼 언제부터 피는 건가. 이번에는 잠에서 깨자마자 밖으로 나섰다. 날이 어렴풋이 밝아온다. 그제야 꽃잎이 벌어지는 모습이 보인다. 이때가 새벽 다섯 시쯤. 벌이 깨어나기도 전이다. 흔히들 일벌이 부지런하다 한다. 잠자는 밤을 빼고는 쉴 새 없이 꿀과 꽃가루를 모으니까.

    이런 벌을 만족하게 하려면 호박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리라. 호박꽃은 암수딴꽃으로 벌이 있어야 수정이 된다. 그래서인지 꽃모양이 벌이 들어오고 나가기 좋게 돼 있다. 크기도 커서 손바닥만하다. 우리가 기르는 50~60가지 농작물꽃 가운데 가장 크다.

    모양새도 벌이 꽃에 내려앉기에 좋다. 꽃잎 끝이 평편해 벌 착륙장으로 넉넉하다.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동글게 펼쳐져 벌이 날아오는 방향 어디서든 쉽게 앉을 수 있다.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꽃부리도 벌한테는 매력적이다. 벌 서너 마리는 동시에 들락거려도 된다. 날개가 큰 나비는 들어가기 어렵다.

    호박꽃은 무엇보다 꿀이 많다. 호박 암꽃은 그 어떤 농작물꽃보다 꿀을 잘 만든다. 꿀샘은 꿀이 잘 모이게 돼 있고, 또 넉넉하다. 잠깐만 곁에서 지켜보면 벌이 수시로 들락날락한다. 어떤 때는 꿀샘 둘레에서 꿀벌 서너 마리가 한꺼번에 꿀을 빨기도 한다. 금방 빨고 간 자리지만 바로 이어서 다른 벌이 날아와 또 빤다. 암꽃이 피어 있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벌이 드나들었을까. 꽃가루받이를 하는 동안은 쉴 새 없이 꿀을 만든다고 해야겠다. 암꽃은 물론 수꽃에도 꿀이 많다. 기다란 수술대 아래 넉넉하게 꿀샘을 두고 거기에다 꿀을 만든다. 이 꿀을 빨고자 벌이 모여든다. 그 과정에서 꽃가루를 몸뚱이에 자연스레 묻히게 된다.

    중매쟁이 벌 가운데 가장 멋쟁이는 호박벌. 다른 벌에 견줘 몸집이 크고 통통하다. 꿀 찾아 호박꽃 안으로 들어가면 꽃가루받이하기 딱 좋은 크기다. 호박벌은 털도 많아, 꿀샘에 다가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이를 다시 암술머리에 묻게 한다. 호박꽃에는 역시나 호박벌! 하지만 요즘은 이런저런 환경 때문에 호박벌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하루 시작을 환하고 뜨겁게
    넉넉한 호박꽃의 사랑

    호박꽃은 꽃이 큰 만큼 넉넉하다. 호박벌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말벌도 가끔 오고 꿀벌은 수시로 들락거린다. 사실 꿀벌은 몸집이 작다. 꿀을 찾아 꽃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암술머리나 꽃가루에 제대로 닿지 않는다. 다만 꿀벌은 꿀샘 둘레를 워낙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그 과정에서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편이다. 꿀벌보다 몸집이 한참 작은 개미도 빨빨 기면서 꿀을 가져간다. 개미야말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후덕한 호박은 자신을 찾아오는 곤충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꿀을 내준다.

    식물 처지에서 꽃은 에너지 덩어리다. 호박꽃은 워낙 넉넉하다 보니 사람조차 탐을 낸다. 꽃잎을 먹는다. 그렇다고 열매를 맺는 암꽃을 먹을 수는 없다. 수꽃을 먹는데 꽃잎전, 꽃잎쌈, 꽃잎 안에 소를 넣은 튀김을 하면 그 나름 별미다.

    호박꽃은 사랑도 새벽형이다. 꽃가루받이하기 좋은 시간은 오전 여섯 시쯤. 부지런한 벌들의 도움을 받아 이른 아침부터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아홉 시만 넘어가면 꽃가루는 활력을 잃어버린다. 호박꽃은 때맞춰 집중하는 셈이다. 오후 한두 시쯤에는 시들어버린다. 더는 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꿀도 만들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애호박을 키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테니 말이다. 꽃가루받이를 끝내고 축 처진 호박꽃한테 저녁 인사로 뭐가 좋을까.

    하루 시작을 환하고 뜨겁게
    호박 : 박과 채소로 한해살이 덩굴성 풀. 원산지는 중남미이며, 품종이 다양하다. 식용으로 기르는 품종은 크게 동양계, 서양계, 페포계 3종으로 나뉘고 이 가운데 페포계는 덩굴을 뻗지 않는다. 호박은 강한 작물이라 기르기 쉬운 편이다. 하지만 지역에 따라 해충인 호박과실파리가 애호박에 알을 슬어 피해를 준다.

    호박은 암수한그루이며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단성화. 열매가 꽃 밑에 달리는 씨방하위다. 암꽃 꽃자루는 수꽃에 비해 짧고 굵다. 꽃은 누런 빛깔의 종 모양이며, 6월부터 서리가 내릴 때까지 덩굴을 뻗어가면서 계속 핀다. 꽃 한 송이로 보면 새벽 네 시쯤부터 피기 시작해 낮 한두 시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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