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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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시선 의식 않는 자유로움이 창조경제 밑거름”

‘디지털 노마드’ 클라우스 빌히와 스티븐 청

  • 최충엽 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albertseewhy@gmail.com 정호재 동아일보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5-03-23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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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시선 의식 않는 자유로움이 창조경제 밑거름”

    한국에 머물며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디지털 노마드’ 클라우스 빌히(왼쪽)와 스티븐 청.

    최근 유행하는 정보기술(IT) 관련 행사에 가보면 피부색이 다른 젊은 이방인과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국내 기업에서 활약하는 이도 많지만 상당수는 잠시 한국에 머물다 흘러가는 이들이다. 이런 신세대 IT 종사자를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고 부른다. 유목민,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노마드의 21세기 버전인 셈이다. 이들은 보통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노트북과 인터넷을 기반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자신의 일을 한다. 기자 세계로 보면 순회특파원 같은 존재다.

    실무 경험과 도전정신

    이들의 생활은 단순하다. 일주일에 40여 시간가량 자유롭게 일하고, 인터넷전화 스카이프로 국제 온라인 회의에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성과물을 제출한다. 고부가가치 직종이라 보수도 충분한 편이다. 이미 온라인에는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일거리가 충분하다.

    과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호기심을 품고 디지털 노마드 2명을 만났다. 한 사람은 한국을 잠시 방문 중인 27세 캐나다인(스티븐 청)이고, 다른 한 명은 ‘어머니 나라’인 이곳에서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동갑내기 독일인(클라우스 빌히)이다. 대학입시와 취업에 인생을 거는 한국 젊은 세대와 비교할 때 이들은 마치 미래에서 온 듯 보였다.

    클라우스는 한국에서 태어나 주로 독일에서 성장했다. 카메룬, 스위스, 독일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며 다양한 문화를 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머물며 한국어를 익혔다. 현대그룹 인턴을 거친 후 미국 투자자의 지원으로 한 차례 창업을 경험한 그는 현재 외국계 벤처캐피털 회사 직원이다. 될성부른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찾아 투자자와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그는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게 좋아 한국에 왔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고충이 적잖다고 한다. 여러 나라에서 일했지만 한국 생활이 유독 힘들고 어렵다는 얘기다. 특히 조직 내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지적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문제가 생겼을 때 직접화법을 사용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예의와 격식을 좀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는 게 클라우스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에서는 5명만 모여도 이사, 부장, 과장 등을 구별해 계층구조를 만든다”며 “속마음은 사무실이 아닌 술자리에서 털어놓는 문화라 2배 이상 노력이 든다”고 꼬집었다.

    홍콩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스티븐은 IT 분야에서 세계적 대학으로 손꼽히는 캐나다 워털루대 출신이다. 캐나다에서 만난 한국계 친구들의 권유로 서울을 찾았다는 그는 현재 3개월째 머물며 일과 놀이를 병행 중이다. ‘루비’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주로 다루는 그는 온라인 검색으로 루비를 활용한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를 발견하면 이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일한다. 그는 “인터넷이 연결되는 호텔 혹은 카페면 세계 어디에 있든 사무실이 될 수 있다”며 “지금도 서울에서 프랑스 기업의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라고 밝혔다.

    그가 디지털 노마드로 20대를 보내게 된 건 출신 대학의 교육철학과 연관이 깊다. ‘워털루대 출신’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통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는다. 이 대학의 특징은 실무와 이론을 병행하는 ‘코업(co-up)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점. 예를 들면 4개월간 대학에서 공부한 뒤 4개월 동안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것을 5년간 반복하는 방식이다. 재학생에게 철저하게 현장에 맞춰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도록 하기 때문에 워털루대 출신은 졸업과 동시에 어떤 조직에서든 곧장 팀장급으로 일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게다가 재학 중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벌 수 있으니 1석 3조다. 그 과정에서 얻는 도전정신은 자연스레 이들을 디지털 노마드의 삶으로 이끈다. 스티븐이 바로 그 사례다.

    한국 ‘스타트업 열풍’의 실체

    워털루대 코업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찬반 논의가 분분하다. 스티븐은 “학자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은 분명히 아니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기업 등 현장에서 필요한 실질적인 지식을 배우는 데는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찌됐건 우리는 어렵고 복잡한 기술을 그보다 더 까다로운 조직 안에서 배워야 한다. 워털루대 코업 프로그램은 그것을 좀 더 쉽게 익히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곁에 있던 클라우스도 거들었다. “현장에서 일하려면 책을 읽고 외우는 방식을 넘어서는 좀 더 실질적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는 기획자가 넘치지만 실제로 그것을 구현할 사람은 턱없이 부족하다”며 그 이유로 ‘현장 경험 부족’을 꼽았다.

    이 두 젊은이의 여정은 직간접적으로 세계에서 일고 있는 스타트업 열풍과 관련이 있다. 세계를 떠돌며 호시탐탐 해당 국가의 문화나 기술을 엿보고 함께 손잡을 동지를 구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한국의 스타트업 열기에 대해서도 관심 있게 들여다봤다는 두 사람은 일단 실망감부터 표했다.

    클라우스는 대기업 중심 문화를 걸림돌로 봤다. 대기업이 작은 기업의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베끼거나 넘보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기업이 그런 일을 벌이면 돈과 명예를 잃고 사회에서 도태되는 게 정의로운 것 아니냐”고 개탄했다. 스티븐도 “한국 소비자는 대기업에 대한 신뢰가 지나치게 높다. 그것이 젊은 신진 기업의 부상을 막는 문화적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한국 젊은이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물었다. 한때 교육자를 꿈꿨고 대학 졸업 후 잠시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 적 있는 스티븐은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한국 사회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화”를 꼬집었다. “젊은이들이 명문대 입학에 집착할 뿐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부모들은 일단 자녀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며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 한국 동료들과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클라우스는 좀 더 실질적인 조언을 건넸다. 그는 “독일은 연간 휴가가 6주 정도다. 한국은 고작 2주인데 그것도 다 못 가는 직원이 태반”이라며 “우리 회사에서 2주를 다 쓴 건 나 한 명인데, 이렇게 일하는 것이 과연 ‘창조경제’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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