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2

2015.01.19

가족 살해 이유가 ‘강남계급’ 이탈 공포?

명문대 졸업·고급 아파트도 무용지물…바닥이란 생각에 극단적 선택

  •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15-01-19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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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살해 이유가 ‘강남계급’ 이탈 공포?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하고 도주했던 강모 씨가 경북 문경에서 붙잡혀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명문대 졸업장은 여전히 무시 못 할 훈장과도 같다. 거기에 번듯한 직장, 서울 강남 3구의 아파트 한 채, 외제차 한 대까지 갖고 있다면 적어도 이 나라에선 성공한 인생이다. 1월 6일 이 조건을 모두 갖춘 남성이 가족을 죽인 살인자로 경찰에 붙잡히자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피의자 강모(48) 씨는 최세훈 다음카카오 공동대표, 가종현 SK텔레콤 상무를 배출한 연세대 경영학과 86학번이다. 강씨 역시 졸업 후 외국계 컴퓨터 3D(3차원) 디자인업체에서 임원으로 일할 정도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1년치 동창회비 30만 원을 매년 한꺼번에 납부하고, 1996년에는 동문들과 1500만 원을 모아 기부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심도 후했다. 그러나 한 직장에서 진득하게 일하는 성격이 못 됐다. 2009년 컴퓨터 회사를 나와 연봉 9000만 원에 한의원 회계실장으로 일하기를 잠시, 화장품업체 전무로 이직했지만 4개월 만에 뛰쳐나왔다. 4년 사이 거친 직장만 3곳이었다.

    2012년 11월 강씨는 퇴직과 동시에 자신의 서울 서초동 아파트를 담보로 5억 원을 대출받아 주식투자를 시작했다. 아내 이모(43) 씨에게만 퇴직 사실을 알리고, 주변에는 일상적으로 회사를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집에서 1.5km 떨어진 남부터미널 앞 고시원을 얻어 출퇴근을 했다. 아내에게는 회사를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매달 생활비 400만 원을 건넸다. 중학생인 큰딸(14)을 연회비 80만 원짜리 요가학원에 보내고, 자신은 헬스장에 다니는 등 겉보기에 화목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90분 동안 세 모녀 차례로 살해

    그러나 1년여 동안 계속된 주식투자 실패로 2억7000만 원을 잃자 한계에 다다랐다. 강씨는 결국 2014년 12월 30일 고시원 생활을 청산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가족을 살해했다. 성공한 중년 남성이 어쩌다 살인자 신세로 전락했을까. 먼저 사건 당일 강씨 행적을 따라가 봤다.



    1월 5일 오후 11시쯤 강씨는 두 딸이 잠들기를 기다리며 아내와 마실 와인을 준비했다. 아내의 잔에는 수면제 반 알을 탔다. 앞서 큰딸에게도 수면제를 먹였다. 저녁식사 후 큰딸이 배가 아프다고 하자 약이라며 수면제를 건네 물과 함께 삼키게 한 것이다. 수면제는 강씨가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두 차례에 걸쳐 불면증을 이유로 병원에서 처방받아 구매한 졸피뎀이었다.

    강씨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지만 마시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리면서 공책 2장에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미안해 여보. 미안해 딸아. 천국으로 잘 가렴. 아빠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라고 적었다. 또 ‘(경제적으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한계가 왔다’ ‘(부모님에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문구도 있었다.

    오전 3시쯤 강씨는 거실로 나와 잠이 든 아내의 목을 머플러로 졸라 살해했다. 이어 작은방에서 자고 있던 큰딸, 안방에서 자고 있던 작은딸을 동일한 수법으로 잇따라 살해했다. 1시간 30분 동안 벌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목숨을 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씨는 줄담배를 피운 뒤 오전 5시쯤 자신의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다. 목적지는 연말 가족여행으로 다녀왔던 충북 청주시 대청호. 가족여행 당시 교통사고를 내는 방법으로 살해를 계획했지만 가족이 잠들지 않아 실패에 그쳤던 곳이다.

    대청호에 도착한 강씨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칼로 자해한 뒤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두꺼운 겨울 외투의 부력 때문에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몸이 계속 뜨자 다시 호수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오전 6시 30분쯤 강씨는 휴대전화로 119에 전화를 걸어 “내가 아내랑 가족을 다 죽였다. 우리 집에 가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도 죽을 계획이라고 신고했다.

    이후 강씨는 정처 없이 차를 몰아 경북 문경까지 도주했다. 그러나 결국 낮 12시 10분쯤 문경시 농암면 인근 도로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붙잡힌 직후 강씨는 경찰에게 “내가 살아서 뭣하겠나. 담배 하나만 달라”고 말했다.

    강씨는 경찰 조사에서 “금전적 어려움 때문”에 가족을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강씨의 통장에는 여전히 은행에서 빌린 현금 1억3000만 원이 남아 있었고, 매매가 11억 원의 아파트를 팔면 대출금 5억 원을 갚고도 6억 원이 남는다. 여기에 강씨가 경찰에 진술한 “아내 명의 통장에 있는 현금 3억 원”까지 더하면 적어도 현금 10억 원이 수중에 떨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때문에 강씨의 행동은 일반적 시각으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강남 중산층 자존감’이 독으로 작용

    가족 살해 이유가 ‘강남계급’ 이탈 공포?

    사건이 발생한 서울 서초동 아파트.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강모 씨의 146㎡ 아파트는 11억 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강씨는 객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강씨의 심리적 좌절은 어마어마하게 컸을 것이다. 여태까지 강남 중산층으로 유복하게 살아왔다는 자존감으로 버텼지만, 앞으로는 불가능하리라 예상되자 절망한 듯하다. 전교 1등 하던 학생이 전교 2등으로 떨어지면 중위권 학생의 성적 하락보다 상실감이 큰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주관적으로 잘못 해석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손 박사는 또 강씨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사고를 했던 것으로 평가했다. “일반적으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사람은 주변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강씨는 자신이 없으면 가족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란 자기중심적 생각을 먼저 했다. 또 남편이자 아버지인 자신이 사라지면 가족이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란 가부장적인 사고 때문에 직접 상황을 종결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퇴직 사실을 아내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경찰 조사에서도 “나는 힘들어도 남에게 손 벌리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손 박사는 “강씨의 지나친 자존감이 오히려 독이 됐다”고 진단했다. “학창 시절부터 사회에 나와서까지 상위 그룹에 속해온 사람은 실패와 좌절에 약하다. 정신의학 용어로 ‘적당한 좌절’이라고 하는데 강씨의 경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부모나 친구들에게까지 아쉬운 소리를 못 했고, 남에게 도움받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 잘못된 자존감이 문제였다.”

    손 박사는 우리 사회에 강씨 같은 이가 적잖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상담했던 환자를 예로 들었다. “유명 증권회사의 지점장을 지내다 명예퇴직을 하고 퇴직금으로 주식투자를 했다 모두 잃은 중년 남성이 있었다. 퇴직금은 잃었으나 집과 예금은 그대로였고, 건강에도 이상이 없어 재취업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잃은 것보다 가진 게 많았는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졌다.”

    이들의 경우 무엇보다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한다. 손 박사는 “강씨의 부인이 적어도 양가 부모에게 알리기만 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에게 정신과 병력이 없다 해도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부정적인 사고를 이어간 것으로 봐서 정신과적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경우 주변에서 긍정적인 말을 지속적으로 해주는 것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 앞서 치료한 중년 남성도 아내가 곁에서 ‘퇴직금을 잃은 건 별일 아니다. 툴툴 털고 일어나자’고 꾸준히 독려했다. 이후 차츰 마음을 열었고 일상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강씨에게 누군가 따뜻한 말 한마디를 계속 해줬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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