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2

2015.01.19

“일본 정부 공식 사과받고 한일관계 출발점 삼아야”

을미사변 연구자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5-01-19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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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정부 공식 사과받고 한일관계 출발점 삼아야”
    “담이 참 낮죠?”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나란히 걷다 김영수(44·사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문득 말을 걸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올려다본 담장은 아닌 게 아니라 나직했다. 성인 남자 키의 두 배가 채 안 돼 보였다.

    “중국 자금성이나 일본 오사카성 담 높이의 절반 정도나 될까요. 유럽 궁전과 비교해도 많이 낮아요. 조선 왕은 궁궐과 바깥 세계를 단절시키려 하지 않았거든요. 왕조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백성과도 소통할 수 있는 높이를 바랐죠. 그 덕에 인왕산과 북악산의 산등성이, 그리고 경복궁의 기와선이 어우러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만들어진 거예요.”

    고종은 그곳에서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꼭 120년 전인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무리가 바로 그 담 에 사다리를 걸치고 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 5시 무렵의 일이다. 그로부터 채 1시간이 지나기 전, 이들의 칼 아래 왕비가 목숨을 잃었다. ‘을미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을미사변’의 전말이다.

    러시아에서 만난 을미사변 기록



    당시 궁을 침탈한 이가 몇 명이었는지, 이들 중 정확히 누가 훗날 명성황후로 추존된 왕비에게 칼을 휘둘렀는지, 왕비의 사망 당시 정황이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하지만 그 새벽 어둠 속에서 경복궁이 참혹히 유린당했고, 그 중심에 일본인들이 있었던 것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史實)이다.

    김 연구위원과 경복궁에서 만난 건 이날의 흔적을 되짚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을미사변 연구에 천착해온 학자다. 애초에는 왕비 사망 후 홀로 남은 고종이 왕세자(순종)를 데리고 궁을 몰래 빠져나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 이른바 아관파천을 연구했다. 이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좀 더 깊은 공부를 위해 2000년 러시아 유학길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을미사변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 국립문서보관소, 대외정책문서보관소, 군사문서보관소 등을 뒤지며 개화기 조선-러시아 관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을미사변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만나며 생각이 달라졌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을미사변 연구는 일본, 미국, 영국의 자료에 크게 의존하는 상태였어요. 사건 무렵 러시아가 우리나라에서 갖고 있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문제가 좀 있었죠. 게다가 을미사변 현장을 제대로 목격한 유일한 서양인이 러시아 사람이거든요. 당시 덕수궁 정관헌, 주한러시아공사관 등을 지은 유명 건축가면서 왕실 경비 임무도 맡고 있던 세레진 사바친이 그 주인공이죠. 러시아에 가보니 그가 사건 발생 후 남긴 상세한 보고서와 러시아공사관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해 작성한 문서 등이 차곡차곡 보관돼 있더군요. 이를 바탕으로 그날의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것이 역사가로서 내게 주어진 임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남아 있는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을 가장 사실적으로, 가능한 한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그날부터 김 연구위원은 이 주제를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2006년 귀국 이래 을미사변에 관한 학술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사바친의 시각으로 을미사변 상황을 소개한 대중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말글빛냄)도 펴냈다. 수많은 이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각 남겨놓은 수많은 ‘증언’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사료 안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 들 때면 그는 늘 이곳, 역사의 현장 경복궁을 찾았다.

    “일본 정부 공식 사과받고 한일관계 출발점 삼아야”

    을미사변 발생 뒤 일본영사가 작성한 왕비 살해 현장도. 광화 문에서 건청궁에 이르는 침입 경로와 사건 현장이 표시돼 있다.

    “저기 광화문에서 동십자각 방향으로 이어지는 담의 네 번째 기와 보이죠. 저곳이 바로 일본군이 처음 사다리를 걸치고 넘어온 자리입니다. 저기서 이 길을 따라 곧장 북쪽으로 내달려 왕과 왕비의 처소가 있는 건청궁으로 향했어요. 궁 안에 왕을 지키는 시위대 병사들이 있었지만, 치밀히 준비하고 기습한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죠.”

    소한(小寒) 추위 탓인지 아니면 새삼 되살아나는 치욕의 무게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김 연구위원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멀리 건청궁 앞의 연못과 향원정이 보였다. 사료에 따르면 왕비를 살해한 이들은 바로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태웠다. 이후 흔적을 없애기 위해 조선 군인들에게 남은 뼈를 거둬 연못에 던지라고 지시했다. 그 연못이 바로 향원정을 둘러싼 저곳, 고종과 왕비가 건청궁 누마루에서 늘 내다봤을 연못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은 한양에 주둔해 있던 일본 군인인 수비대원 약 600명과 일본군에게 훈련받은 조선 군인인 훈련대원 약 800명을 동원했습니다. 이들이 궁궐을 감싸 왕비의 퇴로를 차단한 상태에서 수십 명의 자객이 2개 조를 이뤄 건청궁을 공격했죠. 왕비를 찾아내고, 죽이고, 불태워버리기까지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한 국가의 왕비가 궁 안에서 어찌 그리 쉽게 목숨을 잃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 연구위원의 대답이었다.

    일본의 참된 사과가 관계 회복의 출발점

    “일본 정부 공식 사과받고 한일관계 출발점 삼아야”

    을미사변 당시 왕과 왕비의 거처였던 경복궁 내 건청궁. 2007년 복원했다.

    그는 을미사변에 대한 세간의 논의가 왕비가 살해당하던 순간, 일본인들이 얼마나 잔인했던가에 집중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당시 궁궐을 침탈한 이들의 규모와 그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게 김 연구위원의 생각이다. 그것을 통해 주한일본공사관, 나아가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사료 분석을 통해 일본 정부가 조선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방법으로 왕비 제거를 결정했고, 이를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자원을 동원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김홍집,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등 개화파 관료와 우범선, 이두황 등 훈련대 장교도 이에 동참했지만, 종범(從犯)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들은 고종을 압박해 왕비를 폐위시키려 했을 뿐, 최후의 순간까지도 일본인이 왕비를 살해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김 연구위원의 주장이다. 그는 “을미사변은 일본 정부가 자국 군인과 관료를 우리나라 궁궐에 침투시켜 왕비를 살해한 사건”이라며 “우리 정부가 이제껏 이를 문제 삼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매년 10월 8일이 되면 일본을 향해 을미사변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고 요구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명성황후의 죽음 자체에만 집중해 정작 꼭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는 거죠.”

    김 연구위원은 을미사변을 한일 외교 현안으로 부각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한일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현재 한일관계는 일본이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하고, 독도 영유권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면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막혀 있는 상태다. 김 연구위원은 “을미사변은 일본 측의 잘못이라는 점이 사실상 명백히 정리된 사건이다. 논란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일본이 이에 대해 사과하면 꼬여 있는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일본이 책임을 인정하고 진상규명에 협조해야 우리도 비로소 120년 전 그날의 사건을 오롯이 정리할 수 있게 됩니다. 을미년을 계기로 한일 양국이 함께 관련 연구를 시작해 당대의 비극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모색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됐으면 하는 것이 김 연구위원의 바람이다.

    사료로 재구성한 명성황후 최후의 순간

    명성황후의 죽음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 하나이면서 오랜 미스터리다. 과연 왕비가 어떤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에 대해 그동안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고, 학술적 논쟁도 있어 왔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을미사변 당시 일본영사가 작성한 보고서와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작성한 보고서, 그리고 1896년 조선 법무협판(현 법무차관) 권재형이 고종의 지시로 제출한 조사 보고서를 중심으로 삼고, 각종 사료를 참고해 이 ‘최후의 순간’을 재구성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주한 외교관들은 대체로 왕비의 죽음에 대해 “일본 자객 중 한 명이 도망치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발로 가슴을 세 번 내리 짓밟고 칼로 찔러 죽였다”고 기록했다. 권재형의 보고서에는 “자객이 깊은 방으로 피하던 왕후 폐하를 찾아 끌어내 칼로 내리쳤다”고 적혀 있다.

    이 최후의 순간을 맞기까지, 고종은 왕비를 지키려고 긴박하게 움직였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던 왕실은 이미 위기에 대처하는 제 나름의 시나리오를 갖고 있었다. 정변이 발생하면 고종이 왕비 처소로 이동해 직접 왕비를 보호하는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오전 5시 30분쯤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 건청궁에 침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왕비 처소인 곤녕합 마루 한복판에 서서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자객들이 들이닥치자 한 환관이 “여기는 왕의 처소이며 여기 서 있는 분이 바로 고종”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고종에게 이목을 집중시켜 왕비에게 피할 시간을 주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한 일본 자객이 고종의 어깨를 끌어 잡았다. 일본 병사와 자객은 고종을 밀치고 곤녕합 방안으로 돌진했고 총을 쏘면서 위협했다. 일본 자객은 고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 안에 있는 궁녀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고종은 두려움에 의식을 잠시 잃었다.”

    김 연구위원의 저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의 한 대목이다. 이 참혹한 현장에는 훗날 순종이 되는 왕세자도 있었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그(순종)는 달려드는 일본인 세 명 중 한 명에게 옷이 잡혀 찢기고 다른 한 명에게 상투를 잡혔다. 자객은 왕세자에게 왕비의 거처를 물어보면서 왕세자의 의관을 찢었다. 또 다른 자객은 왕세자의 목과 턱 사이를 칼등으로 내리쳐 왕세자는 기절했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한 왕세자는 고종에게 달려가 합류해 신변을 보전했다.”

    이 상황에서 고종과 왕세자는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가 자객에게 쫓기는 것을 봤으나 손을 쓰지 못했다. 베베르는 보고서에 “왕세자는 다음과 같이 보았다. 왕비가 암살자로부터 벗어났고 (중략) 세 번째 일본인이 뽑은 칼을 가지고 따라갔다”고 기록했다. 같은 보고서에는 “왕은 세 번째 일본인 와타나베가 군도를 뽑아 들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김 연구위원은 이 ‘와타나베’, 즉 당시 일본영사관 순사였고 훗날 경시(警視)로 승진하는 와타나베 다카지로(渡邊鷹次郞)가 왕비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왕비는 자객을 피해 복도를 내달려 도망치다 방 밖에서 그와 맞닥뜨렸기 때문에 왕과 왕세자도 ‘최후의 순간’만은 목격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왕비를 살해한 뒤 신속하게 움직였다. 시신을 뜰에 옮긴 뒤 즉시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그런데 이때 과연 왕비가 숨을 거둔 상태였을까에 대해 김 연구위원은 의문을 제기한다. 1897년 러시아 육군중장 운테르베르게르가 남긴 보고서의 다음 대목 때문이다.

    “녹원에서 타다 남은 뼛조각이 발견됐다. 그중 머리 앞부분과 팔 부분의 뼈가 땅속에 움푹 들어간 채 발견됐다.”

    운테르베르게르는 그 이유를 “부상을 입은 왕비가 얼마 동안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머리와 팔로 불을 피해 땅속으로 파고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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