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6

2014.12.08

“박지만 회장, 국정원에 정윤회 조사 요구했었다”

前 국정원 핵심 관계자 “정씨 국정 개입과 3인방 전횡 견제 원했지만 무시”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4-12-08 0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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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만 회장, 국정원에 정윤회 조사 요구했었다”

    박지만 EG 회장.

    ‘정윤회 문건’과 관련해 풀리지 않는 주요 의문 가운데 하나는 문건에 등장하는 관련 정보가 과연 어떤 경로를 통해 수집된 것이냐는 점이다. 청와대 설명대로 시중의 ‘찌라시’를 취합한 것이라면 과연 그 주체는 누구인지, 조응천 전 대통령비서실 공직기강비서관의 말대로 “60%는 진실”이라면 이는 누가 확인한 것인지가 여전히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 의구심이 증폭되는 부분은 올해 들어 대한승마협회 문제와 독도 방문 등 정윤회 씨의 활동을 면밀히 추적한 정보가 하나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누군가 움직이긴 했다. 그렇다면 그게 누구냐’라는 것. 정씨와 조 전 비서관이 벌이고 있는 ‘진실게임’ 속에서 이 질문은 권력 암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박 회장, 청와대에도 조사 요구

    사안이 불거진 지 닷새 만인 12월 3일을 계기로 국가정보원을 향해 시선이 쏠린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날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의원은 이병기 국정원장에게 “국정원 관계자들이 청와대 인사들의 뒤 추적도 하느냐”고 질문했다. 이날 아침 제기된 같은 당 신경민 의원의 주장을 공식석상에서 추궁한 셈. 이에 대해 이 원장은 “(국정원이) 청와대 관계자들 뒤 추적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그런 일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국내 정보를 총괄하던 국정원 1급 K국장이 박지만 라인이라는 소문 때문에 경질됐다’는 이른바 ‘8월 인사파동’(‘주간동아’ 959호 관련 기사 참조) 전후 상황에 정통한 인물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이야기는 그리 간단치 않다. 국정원 측의 공식 부인에도 박지만 EG 회장 측이 국정원 핵심에 정씨 관련 조사를 요청한 것은 사실로 확인되기 때문. 논란의 초점으로 떠오른 K국장과 조 전 비서관, 박지만 회장 등의 동선을 꼼꼼히 추적해보면 국정원 인사의 개입 여부에는 아직 밝혀져야 할 대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지만 회장, 국정원에 정윤회 조사 요구했었다”

    ‘박지만 라인’이라는 이유로 청와대로부터 압력을 받아 경질된 것으로 알려진 ‘K국장 인사파동’을 집중 취재한 ‘주간동아’ 959호 기사.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뿌리는 3월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씨 측이 자신을 미행하는 등 수세로 몰고 있다고 생각한 박지만 회장은 직접 청와대 고위관계자와 접촉해 이에 관한 조사를 요구하지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 이 시기는 이미 청와대 주변에서 “박 회장은 대통령과 전화 한 통화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흘러 다니던 무렵. 박 회장으로서는 무력감을 느꼈을 법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박 회장은 이번에는 국정원 핵심 관계자를 두 차례 만나 국정원이 나설 것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씨의 국정 개입과 3인방의 전횡이 선을 넘은 만큼 이를 견제하는 것은 국정원의 임무’라는 취지였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박씨(회장)에게 그러한 요청을 받은 일이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사안이 불거지기 직전 ‘주간동아’와 접촉한 전직 국정원 핵심 관계자의 설명은 뉘앙스가 사뭇 다르다. 당시 박 회장과 면담한 것으로 지목된 이 관계자는 기자에게 “박 회장을 만나 정윤회 씨 관련 이야기를 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국정원 차원에서 자연인인 정씨 건에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게 당시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걸로 끝이었을까. 이 대목에서 눈여겨볼 인물이 당시 국내 정보 분석업무를 총괄하던 1급 간부 K국장이다. K국장은 이번 사태의 또 다른 당사자인 조응천 전 비서관과 오랜 인연이 있는 인물. 조 전 비서관이 김성호 국정원장의 특보로 일하던 이명박 정부 초기 K국장은 원장 비서관으로 그와 호흡을 맞췄다. 당시 K국장의 직속상관이던 원장 비서실장은 이헌수 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맡고 있었다.

    김성호 원장이 정권 내부의 역학관계에 휘말려 원장직에서 물러난 2009년 초, 이들은 원세훈 원장이 이끄는 새 수뇌부에 의해 ‘버려졌다’는 게 국정원 안팎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헌수 비서실장과 조응천 특보는 아예 조직을 떠나야 했고, K국장 역시 한직으로 밀려났다는 것. 고난을 함께 겪은 탓에 이들 사이에 비교적 끈끈한 인간관계가 형성됐을 수 있다는 게 전·현직 인사들의 평가다.

    朴 라인으로 알려진 K국장 인사 불이익

    정부가 바뀌고 남재준 국정원장이 취임한 지난해 초 이들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조응천 특보는 공직기강비서관으로, K국장은 국내 정보 총괄분석 담당(1급)으로, 이헌수 실장은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컴백한 것. 탁월한 업무능력으로 정평이 나 있던 K국장에 대해 이 무렵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들은 권력 핵심을 상대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용할 것을 천거하기도 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들 ‘권력 핵심’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박지만 회장이었다는 안보당국 안팎의 소문이다. 박 회장으로서는 K국장을 ‘자신이 꽂아 넣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뜻이다.

    다시 올해 봄으로 돌아와보자. 박 회장 본인이 국정원 수뇌부뿐 아니라 K국장과도 접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여러 정황상 이 무렵에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났을 개연성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K국장은 청와대의 주요 수석 및 비서관과의 협조가 불가피한 자리. 특히 공직자 인사정보를 다루는 조응천 전 비서관과는 업무 동선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K국장에 대한 접근이 차단된 현재로서는 역시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전후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로서는 둘 사이가 밀접하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한 정황이었다.

    “박지만 회장, 국정원에 정윤회 조사 요구했었다”

    1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병기 국가정보원장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잘 알려진 것처럼, 조 전 비서관은 박 회장의 필로폰 투약사건 당시 수사검사였고 최근까지도 친분을 유지해왔다. 이후 조 전 비서관은 ‘정윤회의 박지만 미행’ 건에 관한 조사에 나서게 된다. 박 회장이 청와대와 국정원 수뇌부에 요청했던 ‘정윤회 조사’가 조 전 비서관을 통해 진행된 셈.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이른바 ‘문건 유출’을 계기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그는 4월 10일쯤 정씨 측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게 된다. 그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이재만 총무비서관이 (정윤회 씨의) 전화 좀 받으라고 했다”고 언급한 게 바로 이때의 일. 조 전 비서관은 그 직후 해임된다. 이번 사건이 불거진 후 청와대는 “문건 유출 책임을 물어 경질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정원장이 교체된 후인 8월 들어 상황은 한 차례 더 심각한 파동을 겪는다. 국내 정보 총괄업무를 맡고 있던 K국장이 간부 인사에서 총무국장으로 사실상 좌천된 것. 공식 발령 일주일 뒤에는 이미 내부 발표된 인사를 뒤엎고 K국장에 대한 보직 해임 절차가 이어졌다. 청와대의 재가를 받아 진행된 간부급 인사가 수일 만에 변경되고 당사자로부터 사표를 받는 것은 국정원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듯 K국장에 대한 집요한 인사 불이익은 이병기 국정원장 취임 직후였던 7월부터 이어진 청와대 측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사건이 불거진 뒤 ‘청와대의 국정원 인사 개입 파문’으로 불린 이유다. 당초 국정원 수뇌부는 K국장을 정보 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타협’을 시도했지만, 뒤늦게 총무국장직의 중요성을 확인한 청와대 측이 아예 국정원 조직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가 이렇듯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K국장의 정리를 요구한 배경에는 앞서 살펴본 대로 그와 조 전 비서관의 인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여기에 박 회장이 K국장을 ‘자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까지 겹치면서 ‘K국장은 조 전 비서관과 함께 박지만 라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셈이다. 박 회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의 국정 개입을 강도 높게 견제해왔던 청와대와 3인방 처지에서는 당연히 ‘캐내야 할 대상’ 1순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K국장에 대한 인사파동이 외부에 알려진 뒤에는 이헌수 기조실장이 사표를 제출했다가 반려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K국장을 총무국장으로 발령해 ‘목숨만은 살려놓으려 했던’ 당사자가 바로 이 실장이었다는 게 당시 국정원 안팎의 평가. 그의 사표는 ‘청와대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해 사건을 증폭시킨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의사 표시였던 셈이다. 그러나 공개 직위인 기조실장 사퇴가 더 큰 논란을 야기할 것을 우려한 청와대는 그의 사표를 반려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 전 비서관이 진행한 것으로 알려진 정씨와 3인방 관련 조사 작업에 K국장이 실제로 도움을 줬는지 여부는 K국장이 굳게 입을 닫고 있는 현재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K국장은 인사파동 이후 본인이 박지만 라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나, 조 전 비서관과 가깝다는 소문에 대해 모두 사실이 아니라며 강하게 반발했다고 전해진다. 정씨나 청와대 3인방을 조사하는 작업에 조력한 일도 전혀 없다는 것. 특히 거꾸로 누군가가 청와대 내부의 이러한 기류를 ‘특정인 제거와 특정인 밀어주기’에 역이용했을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주간동아’가 접촉한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대부분 “그렇게 경박하게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라며 K국장을 두둔하기도 했다.

    K국장 “난 아무런 관련 없다”

    흥미로운 것은 박지만 회장과 조응천 전 비서관이 모두 8월 인사파동 이후 그와 접촉했거나 접촉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이 무렵 마무리돼가던 ‘박지만 라인 제거 작업’과 관련해 당사자 중 한 명인 K국장과 그 나름의 ‘반격’을 도모하려 시도한 것 아니냐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 회장의 측근들에 따르면 9월 박 회장이 K국장과 전화통화를 했지만, K국장은 나설 뜻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조 전 비서관의 면담 요청도 마찬가지 이유로 거절했다는 후문. K국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는 “상황이 아무리 나빠진대도 섣불리 저항에 나설 캐릭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대기발령 상태인 K국장은 12월 말 공식적으로 국정원을 떠나 민간인 신분이 될 예정으로 전해진다. K국장 본인의 증언이야말로 이번 파문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연결고리 가운데 하나지만 가까운 지인들조차 접촉이 불가능한 상황. K국장이 이전에 사용하던 개인 연락처는 현재 모두 결번으로 처리됐다. 국정원 대변인실을 통한 주간동아의 인터뷰 요청에 K국장 측은 “(나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만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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