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60

2014.10.27

“한국 고지도 매력과 가치 다 열거하기 힘들어요”

인터뷰 l ‘고지도’ 잡지 창간 김태진 티메카 대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10-27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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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지도 매력과 가치 다 열거하기 힘들어요”
    마지막으로 지도를 펼쳐본 게 언제였나. 김태진(49·사진) 티메카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에 떠올린 생각이다. GPS(Global Positioning System·위성항법장치)의 발달은 현대인을 지도에서 ‘해방’시켰다. 이제는 초고층 빌딩 숲 한가운데 있어도 위성 신호를 통해 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낯선 여행지에서도 웬만하면 지도를 구매할 일이 없다. 김 대표는 이 최첨단 문명사회에 역행하는 사람이다. 지도, 그중에서도 빛바랜 옛 지도에 탐닉하며, 세계 각지에서 이 ‘구시대의 유물’을 사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엔 ‘고지도’라는 제목의 계간지까지 펴냈다. 지도의 매력과 가치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시장 옆 골목, 커다란 창고 한편에 마련된 좁은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사무공간보다 훨씬 넓은 창고 안에는 김 대표가 세계 각국을 돌며 수집한 고지도와 고서, 그 외 각종 서적이 쌓여 있다. 그는 그 속에서 18세기 프랑스에서 출간됐다는 네 권짜리 백과사전을 꺼내 들었다.

    당시 사람들 세계가 담겨 있어

    “여기 이 지도가 서양에서 제작한 최초의 ‘조선전도’예요.”

    김 대표가 펼쳐 보인 책장에는 여백에 멋진 서체로 ‘ROYAUME DE COREE’라고 써놓은 지도가 실려 있었다. 한반도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을 뿐 아니라, 울릉도와 독도까지 ‘코레’의 영토로 표시한 게 인상적이다.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구매한 진품이죠. 이런 지도를 만나면 가슴이 뛰어요.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김 대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가 지도 수집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건 이 무렵부터다. 사실 그전까지는 꽤 잘나가는 도서유통 사업가였다. 2000년대 초반 국내 언론에는 김 대표를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 맞서는 재미교포 유망 벤처 사업가로 소개한 기사가 여럿 보도됐다. 미국에서 컴퓨터사이언스를 전공한 그는 정보기술(IT)을 활용한 온라인 서점의 성공을 일찌감치 예견한 인물 중 하나다.

    1999년 우리나라와 미국, 유럽을 잇는 인터넷 서점 ‘티메카’를 창업하고 한동안 일에만 매달려 살았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해외서적을 구매하는 게 쉽지 않던 때다. 김 대표는 대학과 공공기관 쪽에서 수요가 많은 학술서적 유통 분야에 노하우를 축적해 금세 사업을 키웠다. 국내 유수의 대형서점과 도서관이 그의 고객이었다.

    2005년 국립중앙도서관으로부터 해외에 있는 우리나라 관련 고서를 구매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업무 영역이 넓어졌다.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과 크리스티, 소더비 등 세계 경매시장도 훑기 시작했다. 그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 건 그 과정에서 고지도를 만나면서부터다. 프랑스 백과사전에 실려 있는 ‘조선전도’처럼, 근대 유럽에서 펴낸 아시아 관련 서적 곳곳에는 당시 조선의 풍경을 그려놓은 지도들이 실려 있었다.

    처음엔 그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매혹됐다. 고서와 함께 고지도도 찾아다니기 시작한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다 조금씩, 고지도에 대한 관심이 더 커져갔다. 김 대표는 “고지도 안에는 지도를 그린 시대 사람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당대 과학기술의 정수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걸 보세요. 이 작은 지도 위에 위도, 경도가 다 표시돼 있잖아요. 또 여기 이집트 위에는 그 지역에 사는 동식물을, 아시아에는 또 아시아 동식물을 그려놓았어요.”

    김 대표는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여 누렇게 변색된 지도를 펼쳐 보였다. “직접 만져보세요. 멀찍이 떨어져 볼 때랑 느낌이 다릅니다” 하고 권하기도 했다.

    김 대표에 따르면 한국 고지도가 풍기는 매력은 좀 다르다. 그는 “우리 고지도는 대부분 궁중화원이 그렸기 때문에 한 폭의 산수화처럼 예술적인 가치가 뛰어나다. 또 풍수지리 같은 동양 철학이 담겨 있어 서양인들이 열광한다”고 했다.

    “게다가 고지도는 매우 훌륭한 사료이기도 해요. 우리나라는 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을 겪고, 동해 표기를 놓고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잖아요. 이때 고지도만큼 좋은 심판관이 없죠.”

    그래서 그는 아마추어 지도 연구자이기도 하다. 유럽지도를 제대로 읽기 위해 라틴어부터 당대 과학 기호까지 두루 공부했고, 아시아 지도로 관심 범위를 넓히면서 한자와 고서도 연구하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참 재미있어요. 제가 갖고 있는 1000여 점의 지도를 분석해 시대별로 ‘동해’ 표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본 적도 있죠. 살펴보니 초기 지도에는 아예 바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요. 그러다 16세기 무렵부터 중국해 혹은 동양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17세기에 처음으로 한국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하죠.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한국해 표기가 널리 쓰이는데, 19세기부터 추세가 역전돼요. 일본해라고 적은 지도가 훨씬 많아지는 겁니다.”

    김 대표는 “이처럼 지도는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읽기’ 시작하면 점점 더 지도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고 밝혔다.

    뛰어난 지도를 만들고 보관한 나라

    “한국 고지도 매력과 가치 다 열거하기 힘들어요”

    유럽에서 제작한 최초의 조선전도 ‘ROYAUME DE COREE’를 들어 보이는 김태진 티메카 대표.

    여전히 그는 티메카 대표다. 그러나 서적유통보다 고지도 조사와 딜링(거래) 쪽 업무 비중이 높아졌다.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계 고지도 딜러인 그에게 외국 딜러들이 붙여준 별명은 ‘TJ(김태진 대표의 영어이름) is Everywhere’. 좋은 지도가 나타났다는 소문만 퍼지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디든 찾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지도에 관심을 둔 지 채 10년도 안 됐지만, 아시아 관련 지도는 세계에서 TJ가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평판을 듣게 됐다고 한다. 그는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다. 지금도 여권과 노트북 PC를 소지한 상태”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 대표의 다음 목표는 자신을 사로잡은 고지도의 멋과 가치를 더 많은 이에게 알리는 것. 특히 우리 지도를 세계에 소개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곳보다 뛰어난 지도를 많이 제작했고, 그것을 잘 보관해온 나라다. 그러나 이를 소개하는 자료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김 대표가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올가을 계간지 ‘고지도’를 창간한 이유다.

    10월 첫 호를 선보인 ‘고지도’는 한글과 영어를 혼용한다. 구독대상을 ‘세계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그동안 쌓아온 네트워크를 통해 창간호 광고의 95%를 해외에서 수주했다. 초판 1500부 중에서 300부가 해외 15개국에 나간 상태고, 영국 대영도서관과 미국 의회도서관을 비롯한 많은 박물관에도 들어갔다. 우리 지도에 관심이 많은 해외 고서와 고지도 수집가들도 이미 ‘고지도’의 구독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 매체의 첫 호에서 1402년(조선 태종 2) 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특집으로 다뤘다.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이 지도에는 아프리카까지 그려져 있다. 제작 시점이 서양 탐험가들이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하기 100년 전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고지도’ 겨울호에서는 또 다른 세계지도인 ‘천하도’를 다룰 예정이다. 김 대표는 “주제는 무궁무진한 만큼 이 잡지가 계속 발행되고 더 많은 사람이 우리 고지도의 아름다움을 알도록 하는 데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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