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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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수 없지만, 40대는 아프다

사회의 허리, 일과 가정서 심각한 ‘마흔앓이’로 소리 없는 비명

  •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lian.net

    입력2014-09-29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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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플 수 없지만, 40대는 아프다

    예능프로그램 MBC ‘일밤-아빠! 어디가?’의 한 장면(왼쪽)과 KBS 2TV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삼둥이 아빠 송일국.

    ‘주간동아’를 오래 구독한 필자는 주간동아 953호 창간기념 합본호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기사를 봤다. 리서치앤리서치와 공동 조사한 ‘2014 한국인 의식조사’ 결과 중 ‘국민 행복도’를 묻는 질문에 부정적인 응답(27.3%)이 긍정적인 응답(21.2%)보다 많다는 내용이었다.

    더욱이 ‘행복하다’(16.5%)는 40대의 응답 비율이 가장 낮았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자녀교육에도 적극적인 40대가 가장 덜 행복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는 꽤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40대는 왜 그렇게 힘들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전문지식과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해보니 몇 가지 이유가 도출됐다.

    첫째, 과도한 소임에 따른 만성 피로 때문이다. 40대는 늘 지쳐 있다. 남성과 여성 모두 마찬가지다. 남성은 직장에서의 과도한 업무와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 혹은 갈등 때문에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기본 구조인 ‘경쟁 시스템’ 때문이다. 동종 업계에서의 회사 간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자영업자 역시 마찬가지다. 회사 간 경쟁이란 무엇인가. 회사 내 조직원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 경쟁을 이겨내야 하지 않는가. 더 참신하고 훌륭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라는 질적인 노력 외에 더 많은 시간을 일하라는 양적인 노력이 모두 요구되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몸과 마음을 모두 회사에 쏟아부으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것이다.

    무한 경쟁에 내몰려 지친 몸과 마음

    그렇게 회사 간 경쟁을 치른 40대 눈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내부 경쟁’이다. 상위 직급은 한정되고, 고액 연봉 역시 소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터에서 돌아온 40대를 기다리는 가족은 또 다른 소임과 구실을 요구한다. 이른바 ‘슈퍼 대디(super daddy)’다. 돈을 잘 벌어오는 것은 아빠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소임이고,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이어야 함은 물론이며, 자녀의 지능과 감성이 발달하도록 잘 놀아주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길 기대한다. 영어사전에도 없는 ‘프렌디(friendy)’라는 우리만의 신조어가 등장한 지도 한참 됐다. 프렌디란 프렌드(friend)와 대디(daddy)의 합성어로, 친구처럼 잘 놀아주는 아빠를 뜻한다.



    지상파 방송 예능프로그램에서는 ‘스타 아빠’가 육아를 전적으로 담당하거나, 자녀와 어디론가 놀러가는 연예인 아빠의 모습을 연신 내보내고 있다. 기존 주말 예능프로그램과 달리 친구 같은 아빠의 구실과 함께, 때로는 엄마 못지않게 육아를 멋지게 해내는 모성적인 아빠를 내세워 시청률을 높인다.

    그런데 현실은 어디 그런가.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는 웃는 낯으로 아이를 돌보거나 아내를 챙겨주기가 쉽지 않다. 결국 내 남편, 우리 아빠는 매력 없는 남편, 무능한 아빠로 전락한다. 직장에서는 오늘 하루를 겨우 버티며 승리는커녕 도태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가, 집에 와서는 100점 만점에 50점 이하 아빠가 돼버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이런 판국에 부모나 친지까지 챙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플 수 없지만, 40대는 아프다
    40대 가장은 기억할 것이다. 학창 시절 서울로 유학을 와 열심히 공부할 때 부모는 ‘집안일은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기 바란다’는 마음가짐을 보여줬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부모는 그대로인데 느낌이 다르다. ‘우리가 그렇게 고생해서 너를 키웠는데, 도대체 부모 생각을 하기는 하느냐’는 무언의 메시지가 마구 느껴진다. 물론 대놓고 불효자라고 비난하는 노부모도 있긴 하다.

    다시 한 번 40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과 좌절을 느낀다. ‘도대체 내가 제대로 해내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않는 부모에게 서운함도 느낀다. 그 서운함 뒤에 곧바로 ‘지금 너를 키워주신 부모에게 무슨 불온한 생각을 하고 있어’라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러니 행복을 느낄 겨를이 없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떤가. 먼저 전업주부다. 그들은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바로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혹은 완벽한 육아에 대한 강박관념일 수도 있다. 높은 기대나 완벽주의는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야기한다. 완벽한 육아를 위해서는 실제로 비용이 많이 드는데, 현실적으로 우리 가정의 수입은 턱없이 부족하다. 치솟는 주거비와 사교육비 부담에 등골이 휜다. 직장 여성은 조금 나을까. 그렇지도 않다. 둘이 번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육아에 전념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럽고, 아이에게 죄책감까지 갖게 된다.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빠진 40대 여성도 많다. 능력 있는 여성, 훌륭한 엄마, 사랑스러운 아내, 착한 며느리, 좋은 이웃, 효심 깊은 딸 등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자 늘 노력하고 전전긍긍하는 한편으로 힘겨워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여성은 ‘슈퍼우먼 콤플렉스’에 빠지기 쉽다. 최근 급격한 출산율 감소와 여성에 대한 사회의 높은 기대는 완벽주의 육아를 더욱 부추긴다. 더구나 외동이 늘다 보니 온 가족(친가, 외가의 조부모 포함)의 관심이 아이에게 집중되는 상황에서, 일차적 양육 책임을 짊어지는 엄마가 받는 스트레스는 실로 엄청나다. 한마디로 40대 남성과 여성 모두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구실의 과도함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다.

    젊어서 고생 늙어서도 고생

    둘째, 40대가 힘든 이유는 비관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낙관주의’다. 비록 지금은 어렵게 살지만, 몇 년 후나 몇십 년 후에는 다 잘돼 있으리라는 믿음만 갖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초년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는 속담을 즐겨 인용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젊어서 고생하는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개고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지금 열심히 일하면 노후에 편안하게 삶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40대는 아마 10에 하나, 아니 100에 하나일 듯싶다. 열심히 일해도 결국 늙으면 돈 떨어지고 건강도 나빠져 불행하게 살 것 같다는 비관론적 예측이 그들을 더욱 마음 아프게 한다.

    자녀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우리 부모는 자녀를 공부시키면서 희망과 꿈을 키웠다. 자신은 비록 공부를 많이 못 했지만, 우리 아이만큼은 다르게 키워서 번듯한 인생을 살게 할 거야! 그 아이가 바로 지금의 40대다. 그들은 번듯하게 성공했는가. 그들의 부모가 한없이 자랑스러워하는 존재로 남아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어렸을 때 열심히 학교 다니는 모습에 희망을 가졌던, 당시 40대였던 지금의 노부모가 더 행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지금 노부모는 40대 자녀를 걱정하느라 30년 전보다 오히려 덜 행복하다.

    그렇다면 부모로서의 40대는 어떤가. 오늘도 자녀를 위해 열심히 학원비를 지불하고, 때로는 자동차로 실어 나르기도 하면서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는가. 별로 그렇지 않다. 그보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아니면 남들이 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자녀를 학원에 보낸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별로 기쁘지 않다. 보람도 거의 못 느낀다. 불확실한 투자일뿐더러, 자녀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는 보장도 없으니 암울해지고 벌써부터 자녀의 미래가 걱정된다.

    셋째, 신체 기능의 저하 때문이다. 40대에 접어들면 근력이 약화되고, 성적(性的) 기능이 저하하며, 각종 성인병 혹은 대사증후군이 생기기 시작한다. “나도 이제 나이 먹었나 봐”라고 점잖게 말하면서도 불안이 엄습한다. ‘어! 죽으면 안 되는데. 아파도 안 되는데.’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고 냉정하다. 혈압약이나 당뇨약을 복용하는 친구가 한두 명 생기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자신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설령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 해도 건강검진 결과에 불안해하면서 주관적으로는 분명하게 체력 혹은 신체 기능의 저하를 느낀다. 물론 개인별 차이가 크긴 하다.

    따라서 신체적으로 매우 건강한 40대는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지수가 더 높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신체와 정신, 즉 몸과 마음은 따로 분리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아플 수 없지만, 40대는 아프다

    서울 센트럴시티 파미에파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교육실에서 열린 예비아빠 임산부 체험 교실에서 예비아빠들이 아이 목욕시키는 법을 배우고 있다(왼쪽). 대전시가 가정친화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 ‘아빠요리대회’ 모습.

    행복에 대한 패러다임 바꿔야

    넷째,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다. 40대는 생물학적으로 완전한 어른이면서 한편으로는 노화도 진행되지만, 사회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50, 60대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영향력과 권력도 막강하기에, 40대는 애송이 대접을 받는다. 또 사회적 활동을 별로 수행하지 않아도 그 자체만으로 존재감이 큰 70, 80대가 있어 40대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인구가 점점 급증하고 있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는 분명히 예전보다 젊고 어린데 벌써부터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한다. 40대 중반에 직장 생활을 마치는 게 이제 흔한 일이 됐다. 그리고 해본 적도 없는 ‘닭 튀기기’와 ‘국밥 만들기’에 도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 20년간 직장 생활을 통해 사회적으로 원숙한 단계에 접어든 사람인가, 아니면 이제 막 음식점 창업을 준비하는 사회 초년생인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창업이라는 제2 인생을 통해 대박을 꿈꾸기는 더 어려워졌다. 행복의 감정은 어느덧 저 멀리 사라져버렸다.

    40대는 이대로 주저앉은 채 계속 불행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도 안 된다. 40대가 행복해야 다른 세대도 함께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40대는 30대와 50대의 행복을 빼앗아올 게 아니라, 스스로 행복도를 높이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존 가치관과 행복에 대한 패러다임을 확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돈, 권력, 명예, 서열 등을 중요하게 여기던 자신을 이제부터 가족, 친구, 봉사, 관용, 배려 등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또한 성공이나 경제적 풍요를 행복과 동일시하는 사고방식도 함께 바꾸자. 비록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적 행복을 얻었기에 성공한 인생을 산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행복이라는 진실을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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