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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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푸틴’ 에르도안 “10년 더”

첫 직선제 대선에서 압승, 21년 장기집권 길…7전 무패 선거 신화도 계속

  •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14-08-18 17: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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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0일 터키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직선제 대통령선거(대선)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70) 총리가 52% 지지율로 당선했다. 제1, 2야당이 좌우 이념대립을 넘어 어렵게 내세웠던 후보 에크멜렛딘 이흐사노을루 전 이슬람협력기구(OIC) 사무총장을 14%p 앞선 압도적 승리였다. 에르도안의 대통령 당선은 대선 전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늘 50%가 넘는 지지를 받았기 때문. 이로써 11년간 총리로 재임해온 에르도안은 앞으로 10년간 대통령 자격으로 터키를 통치할 수 있게 됐다.

    에르도안의 대선 출마는 총리를 더는 연임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사실상 ‘꼼수’였다. 터키는 여당 대표가 총리를 맡는 의원내각제. 하지만 현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 당규는 당대표의 4회 연임을 금지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당규를 고치는 대신 아예 대통령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간 터키 대통령은 명목상 국가원수이긴 하지만 실권이 없어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에르도안은 선거 기간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개헌과 현행 헌법상의 대통령 권한을 적극 활용해 터키를 대통령제 국가로 만들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한 바 있다. 이는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이름만 바뀔 뿐 ‘에르도안이 통치하는 터키’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르도안은 2007년 헌법을 고쳐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임기를 7년 단임제에서 5년 연임제로 바꾸는 등 오래전부터 총리 이후를 대비해왔다.

    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이름만 바꿔

    하지만 대선을 1년여 앞두고 그에겐 악재가 연거푸 찾아왔다. 먼저 지난해 5월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그의 장기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라 벌어져 큰 위기를 맞았다. 결정타는 2월 인터넷 동영상공유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그의 통화도청 파일들이다. 파일에는 에르도안이 아들에게 검찰 수사에 대비해 뇌물로 수수한 현금 10억 달러를 5곳에 옮기라고 요구하는 내용과 약속된 금액보다 액수가 적다면서 뇌물을 받지 말라고 지시하는 음성이 담겨 있었다. 도청 파일이 공개되자 에르도안은 정적이 날조한 것이라며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다.



    5월에는 탄광 사고 현장을 찾아 “탄광 사고는 늘 있는 일”이라고 연설하고 그에 항의하는 청년에게 “총리에게 야유하면 넌 맞는다”고 소리치는 동영상이 공개됐다. 실제 동영상 속에서 청년은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메가톤급 악재가 이어졌음에도 이를 딛고 보란 듯이 대통령에 당선한 것이다.

    에르도안이 국민 과반수 지지를 지켜온 가장 큰 비결은 집권 기간 이뤄낸 경제 성장이다. 2003년 에르도안이 총리로 취임할 당시 터키 국내총생산(GDP)은 3030억 달러. 10년 뒤 이 수치는 8172억 달러로 2배 이상 늘어났다. 매년 평균 5.5% 경제 성장이 계속됐고, 집권 직후 30%를 넘나들던 인플레이션은 한 자릿수로 안정됐다.

    그의 삶 역시 다른 엘리트 출신 정치인에 비해 서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을 만한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다. 1954년 흑해 연안 도시 리제에서 태어난 그는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빈민가에서 성장하며 거리에서 생수를 팔기도 했다. 이때 그의 모습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생수팔이 소년과 다를 바 없었다. 타고난 총명함 덕분에 이스탄불 마르마라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여전히 날품을 팔며 학비를 조달했다. 대학 재학 중엔 세미 프로축구 선수로도 이름을 떨쳤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대다수 국민이 그를 친근하게 여기고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밑바탕이 됐다. 에르도안의 핵심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교육과 소득 수준이 낮은 지방 이슬람 수니파. 에르도안은 총리 시절 이슬람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왔다. 여성 히잡 착용,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 금지 및 주류판매 규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이슬람주의 정책은 확실한 지지층을 만든 동시에 수많은 반대파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에르도안의 정치인생은 1976년 이슬람계 정당인 국가구원당에 입당하면서 시작됐다. 9년 뒤인 85년 역시 이슬람계 정당인 복지당에서 이스탄불 지부장에 올랐다. 94년 40세 나이로 이스탄불 시장에 당선해 돌풍을 일으켰으며, 2001년 이슬람계 정당인 정의개발당을 창당해 당대표가 됐다. 2002년 11월 조기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은 34.1%의 압도적 지지로 전체 의석 가운데 66%를 차지했다. 이슬람계 정당이 단독정부를 출범한 건 터키 건국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에르도안의 선거불패 신화는 시작됐다. 정의개발당은 지금까지 치른 7차례 선거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에르도안에게는 ‘선거의 제왕’이란 별명이 붙었다. 터키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 이후 가장 성공한 지도자라는 평까지 받았을 정도다.

    당선 첫 일성 “화합과 통합”

    이번 대선 승리로 에르도안의 신화는 계속 이어지게 됐다. 지금 같은 지지율이라면 그는 2019년 대선에서 재선해 2024년까지 터키를 통치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터키의 사법, 언론, 군부 등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데다 유력한 정치 라이벌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이러한 그의 집권 시나리오를 막을 장애물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에르도안을 터키 전신인 오스만제국 황제로 이슬람 종교지도자를 겸했던 술탄에 비유하기도 한다. 서방 눈에 비친 에르도안은 ‘터키의 푸틴’이다. 에르도안이 대통령이 되면 그에게 고분고분했던 압둘라 굴 현 대통령이 후임 총리가 될 공산이 크기 때문. 대통령과 총리를 맞바꿔가며 장기 연임하고 있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 콤비를 연상케 한다. 에르도안이 대통령에 당선하자마자 가장 먼저 축하전화를 한 이도 다름 아닌 푸틴 대통령이었다.

    에르도안이 대선 당시 내걸었던 구호는 ‘새로운 터키’였다. 건국 100주년인 2023년까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만들겠다는 공약도 이어졌다. 2014년 현재 터키의 GDP 순위는 한국보다 2단계 낮은 세계 17위로 평가된다.

    그는 당선한 후 가진 첫 연설에서 사회적 화합과 통합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지구상 모든 국가지도자가 내거는 구호이자 이루고픈 꿈이지만, 현실에서 둘 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사례는 흔치 않은 것이 사실. 빈민가 생수팔이 소년에서 총리와 대통령을 연이어 지내며 터키 역사를 사반세기 동안 좌우하게 된 에르도안. 그는 역사에 비참한 독재자로 기록될 것인가, 아니면 터키를 강대국으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로 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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