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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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1만 불 수입 거뜬 北 자본가 ‘미스터 X’ 수천 명

식당이나 상점, 국영으로 위장해 운영…사업 다각화 등 자본주의 기업 뺨쳐

  •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 lankov@naver.com

    입력2014-05-12 1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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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을 잠시 방문한 외부인의 눈에 북한 수도는 여전히 모범적인 공산주의 도시다. 차량은 물론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넓은 거리, 광고나 간판이 거의 없는 웅장한 건물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과 초상까지, 흡사 1950년대 초 옛 소련 모스크바의 모습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은 대외적으로 예전 주체사회주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큰 변화를 경험했다. 한마디로 ‘사회와 경제의 자발적 시장화’라고 요약할 수 있는 변화였다. 1990년대 초반 공산권 해체로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북한에서 중앙계획경제는 붕괴했고, 이후 서민은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를 ‘재발견’했다.

    이러한 시장화가 소규모 개인경제 활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역시 진화했다. 이제 북한의 시장경제는 장마당에서 신발이나 두부 요리를 파는 아줌마로 그치지 않는다. 북한 경제 자체가 기업이라 불러도 좋을 대형 사업을 운영하는 이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수십 명을 고용하고 수많은 국내외 비즈니스 파트너와 협력하는 기업이 속속 자리 잡고 있다.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어떻게 개인 사업이 가능할까. 눈치 빠른 신흥 사업가들은 이를 해결할 방법을 이미 20여 년 전 발명해뒀다. 관료 엘리트와 결탁해 개인 사업을 국가기업소로 위장하는 방식이다. 2000년대 초 이후 호황을 누리는 외식업이 가장 좋은 사례다. 최근 수년간 평양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맛도 좋고 서비스도 훌륭한 고급식당이 많이 생겨났다. 공식적으로 이들은 국영식당으로 등록됐지만 실상은 개인 투자자가 경영한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개인 투자자를 흔히 ‘돈주’라고 부른다.

    25여 년 북한 연구를 해온 필자는 남한에서도, 중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돈주를 만난 경험이 있다. 그들과 협력하는 외국 사업가도 접촉할 수 있었다. 현재 사업을 하거나 최근까지 사업체를 운영했다는 이들의 경험담은 북한 경제의 오늘을 한층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돈주’라고 부르는 개인 투자자들

    매달 1만 불 수입 거뜬 北 자본가 ‘미스터 X’ 수천 명

    평양 창광거리의 한 간이음식 판매점 앞에서 주민들이 음식을 포장해서 가져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곽료리’는 음식을 도시락 형태로 판매한다는 뜻이다(왼쪽). 평양 거리에 전기버스를 타려고 시민이 몰려 있다.

    편의상 그를 ‘미세스 X’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전에도 다양한 사업에 참여한 경험과 뛰어난 능력을 가진 그는 남편이 사망한 후 그 친구들로부터 미화 수천 달러를 빌려 식당을 경영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청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를 통해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부터 사실상 방치돼온 옛 식당건물을 사용하겠다며 등록 절차를 마쳤다. 물론 형식상 국영식당이었지만 요리사나 접대원 등 근로자를 고용한 것은 미세스 X 본인이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들을 임의로 해고하는 것도 그의 재량이었다. 주방용품과 가구 구매, 실내장식도 모두 자기 자본으로 충당했다.

    이후 그는 식당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식품을 구매하고 경영에 필요한 갖가지 비용을 부담했다. 직원들에게는 월급과 함께 매일 1인당 700g의 쌀과 옥수수를 지급했다. 노동자에 대한 국가 배급 기준에 맞춰 그가 직접 장마당에서 사온 곡식이었다. 이는 김일성 시대 북한 성인이 받았던 배급량 그대로였다. 달리 말하자면 국가 배급이 거의 중단된 상태에서도 개인 식당 직원들은 이전과 다름없는 식량을 받을 수 있었다. 직원으로선 월급이 나오고 배급까지 끊기지 않는 직장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미세스 X는 매달 인민위원회로 이익금 일부를 납부했다. 영향력 있는 간부들에게 주는 뇌물도 잊지 않고 챙겼다. 이 경비들을 모두 제외하고도 2007~2008년 무렵 그가 거둔 소득은 매달 400~500달러 수준. 대부분 서민가족이 30~40달러로 연명하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돈이었다. 미세스 X는 2010년 개인 사정으로 탈북을 결정하면서 식당을 다른 돈주에게 매각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이 식당은 여전히 국영식당 간판을 단 채 맛좋은 냉면을 팔고 있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와 김병연 서울대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북한에 있는 식당이나 상점 대부분은 국영으로 위장한 사기업이다. 많은 탈북자를 접촉한 필자 역시 같은 의견이다. 눈여겨볼 것은 식당 같은 서비스업 중소기업뿐 아니라 규모가 큰 생산재 기업 중에도 사기업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역시 법률적으로 개인 경영을 인정받을 수 없으므로 국영회사 명의를 빌리거나 자기 재산을 국영회사 소유로 가장해 등록하곤 한다.

    이번에는 필자가 수차례 만난 바 있는 ‘미스터 X’에 대한 이야기다. 원래 수산물 무역에 종사하던 그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2002년 이른바 ‘7·1조치’ 이후 상업거래가 국가 전체적으로 활발해지자 장사꾼들이 지방을 오갈 일이 늘었지만 이들이 이용할 교통수단은 극히 부족했다. 이를 사업 기회로 본 미스터 X는 한 무역회사 이름을 빌려 중국에서 중고버스 3대를 구매한 뒤 운송회사를 만들었다. 승용차조차 개인 명의로 등록하기가 어려운 나라에서 버스 3대를 개인이 등록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무역회사 이름을 빌려 국가소유로 등록했기에 가능한 비즈니스였다.

    버스 구매에 쓴 총비용은 2만5000달러 내외. 그러나 미스터 X는 그 돈의 60%만 부담했다. 나머지는 운전기사와 조수, 차장 등 종업원들이 조금씩 갹출했다. 미스터 X에게는 장거리를 달리는 버스 승무원들을 통제할 수단이 없다. 그들이 승객으로부터 받는 요금이 전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그 대신 운전기사, 차장, 조수 등 승무원 3명에게 버스를 전세 내준 셈이다. 왕복 여행을 마친 승무원 3명은 미스터 X에게 정해진 금액만 납부했다. 유류비와 수리비 등 유지비를 제외한 남은 돈은 모두 그들의 소득이었다. 이러한 전세식 경영방법 덕에 승무원들이 연료를 아껴 쓰고 버스도 잘 관리했다는 게 미스터 X의 회고다.

    중앙 통제가 약한 외화벌이 회사

    매달 1만 불 수입 거뜬 北 자본가 ‘미스터 X’ 수천 명

    배에서 북한 화물을 내리는 중국 단둥의 항구. 고철과 석탄, 구리 등 광산물이 북한의 주요 수출품이다.

    그 대신 미스터 X는 버스등록에 이름을 빌려준 무역회사 측에 매년 2만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했다. 그러고도 남은 돈이 매달 2000달러 안팎. 북한의 ‘상위 1%’를 기준으로 삼아도 상당한 수입이다. 버스뿐 아니라 다양한 업종의 기업을 소유한 그는 명실상부한 부자다. 물론 그는 이들 기업과 자산을 빠짐없이 국영회사 혹은 국가소유로 위장등록했다.

    이들보다 더 큰 규모의 사업도 가능하다. 이러한 사업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돈주가 뚫을 수 있는 창구는 주로 외화벌이 회사다. 외화벌이 회사는 본래 북한식 사회주의경제의 특성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대부분 공산권 국가에서는 중앙정부만 무역에 종사할 권리가 있었던 반면, 북한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각종 정부기관, 기업소, 조선인민군 부대까지 소규모 무역회사를 설립하고 직접 수출에 나설 권리를 얻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들 외화벌이 회사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다른 기업에 비해 외화벌이 회사는 경영자율권이 강하고 중앙 통제가 약한 편이다. 최근 들어서는 충분한 자본과 경험을 보유한 돈주와 협력하지 않으면 외화벌이 회사도 사업에 성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고 소식통들은 전한다. 형식상 이들 회사의 간부로 등록해 활동하는 돈주는 개인 자본을 투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 성공을 위해 개인 능력과 경험, 인맥을 활용한다. 이러한 돈주가 심지어 결코 사유재산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공장이나 광산까지 소유, 경영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미스터 Y’는 인민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의 이름을 빌려 석탄광산 4곳을 10년 동안 경영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그는 이 외화벌이 회사의 간부직원이지만, 실제로는 이 회사 산하로 위장한 석탄기업의 실소유주다. 그는 1990년대 버려진 소규모 광산을 다시 개발하려고 엄청난 개인 자본을 투자했다. 다른 광산에서 설비를 뜯어다 새로 설치했고, 높은 사례비를 지급해가며 지질 전문가를 자문으로 고용했다. 공식적으로는 인민군 소속 회사이므로 군인들을 미숙련 노동자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이들의 숙식은 온전히 그의 책임이었다. 이와 함께 미스터 Y는 경험 많은 기술자와 기사도 적잖은 급료를 주고 고용해야 했다.

    평양 고급아파트 價 15~20배 폭등

    생산뿐 아니라 캐낸 석탄을 판매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고급석탄은 중국으로 수출하고, 남는 석탄은 북한 내에서 팔고 있다.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외화벌이 회사에 납부한 뒤 남은 돈은 그의 소득이다. 평균 잡아 매달 소득 1만 달러를 한참 넘어서는 그는 단순히 고소득자가 아니라 거부에 가깝다. 기억해둘 것은 그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득 수준으로 그를 능가하는 사업가가 북한에 최소 수천 명 존재한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내부에서 자본가 계층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음을 증명할 간접적인 통계는 널렸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 부동산시장의 동향이다. 국유화 주택이 대부분인 북한에서 부동산 매매는 엄연히 불법이지만, 2000년대 초부터 음성적인 거래가 매우 활발해졌다. 이 무렵 3000~5000달러 안팎이던 평양 고급아파트는 최근 5만~8만 달러에 거래된다. 대금이 외화로 지급된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10년 조금 넘는 기간에 가격이 15~20배 폭등한 것이다. 이러한 가격 상승을 초래한 유일한 요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들의 보유 자본이 급속도로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자산과 소득 역시 아파트값만큼이나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좋든 싫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 북한은 시장경제 체제로 변모해왔다.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당 엘리트의 주도하에 시장경제를 단계적으로 건설하지도 않았고, 옛 소련이나 동유럽국가처럼 정치혁명을 통해 공산주의국가가 붕괴한 뒤 시장경제가 들어선 것도 아니다. 북한에서의 시장화는 아래로부터 이뤄진 자발적 현상의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물론 중요한 공통점도 있다. 중국에서든 소련에서든 북한에서든, 시장경제 발전에 결정적 구실을 한 세력은 전·현직 공산당 간부이거나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인물뿐이라는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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