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9

2014.03.17

‘학벌민국’에 告함

‘늦게 출발할 기회’조차 없는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03-17 0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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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벌민국’에 告함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은 때때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바꿔놓을 수 있다. 약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문을 열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가르치고 일깨우며,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 작가 맬컴 글래드웰이 쓴 책 ‘다윗과 골리앗’의 일부다. ‘강자를 이기는 약자의 기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월 국내 출간 후 줄곧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지키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저자가 미국 명문 하버드대와 30위권 이하 대학 출신자를 비교한 대목이 화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수능시험 격인 SAT 점수만 놓고 봤을 때 하버드대의 ‘인풋’은 후자를 압도한다. 그런데 졸업생들이 낸 ‘아웃풋’ 결과는 달랐다. 양 그룹 경제학과 졸업생이 이후 저명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수를 비교한 결과 30위 이하 대학의 최상위권(상위 1%) 학생들이 하버드대 상위 15% 학생들과 비슷한 실적을 낸 것. 30위 이하 대학 상위 15%에 해당한 이들이 발표한 논문 편수는 하버드대 상위 45% 학생들과 비슷했다. 글래드웰은 저서에서 이렇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 뒤 “힘을 가진 자는 보이는 것만큼 강하지 않다. 약자도 보기보다 약하지 않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 어려운 ‘학벌’

    문제는 이 이론이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이가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힘을 가진 자’가 ‘보이는 것만큼’ 강하며, 특히 그 힘이 학벌일 경우 노력을 통해 극복하기 쉽지 않다고 말한다. 2010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48.1%는 ‘개인의 성공·출세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학벌과 연줄’을 꼽았다. 2006년 조사 당시 응답률 33.8%보다 15%p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반면 같은 질문에 ‘성실성과 노력’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2006년 41.3%에서 2010년 29.7%로 급감했다.



    대학생이 원하는 이른바 8대 취업 스펙(학벌·학점·토익·어학연수·자격증·봉사·인턴·수상경력) 중 정점에 있는 것도 학벌이다. 엄기호 사회학자는 저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는 곧 그 사람 인생 전체의 운명이 된다”며 “대학 서열이 인생에서 대부분의 차이와 차별을 결정하는 현재 체제”를 비판했다.

    해외라고 학벌 선호가 없는 건 아니다. 미국 로버트 프랭크 코넬대 교수와 필립 쿡 듀크대 교수가 공동집필한 책 ‘승자독식사회’에는 “아이비리그가 점점 더 큰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저자들은 ‘포춘’지가 미국 500대 기업 및 500대 서비스 기업의 전·현직 최고경영자(CEO)의 출신 대학을 분석한 기사를 인용하면서 “전직 최고경영자의 14%가 아이비리그 출신인 데 반해, 현직 최고경영자는 거의 19%가 아이비리그 출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식은 우리 현실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면이 있다. 한국 사회의 특정 대학 집중 현상은 이 수준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지난해 헤드헌팅업체 유니코써어치가 국내 매출 1000대 기업 대표이사 1271명의 학력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 출신이 259명(20.4%)이었다. 미국 통계에서 동부 명문 사립대 8개 출신 CEO를 합친 것보다 높은 비율이다. 정·관계로 가면 집중 현상은 더욱 심화한다. 우리나라 대법관 14명 중 12명(85%)이 서울대 법대 출신. 1980년부터 최근까지 임명된 대법관 84명 중 서울대 법대 출신도 63명(75%)에 달한다. 이에 대해 엄기호 씨는 앞의 책에서 “(학벌주의 폐해는) 서울대 ‘안’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중략) ‘법대’와 ‘의대’를 제외하면 또 다른 열패감이 있다. 꼭대기의 딱 한 자리, 그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패자”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사회 구성원 전체를 서울대 상위권 학과 출신부터 ‘인(In) 서울대(서울 소재 대학) 〉 지방국립대 〉 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 〉 전문대 〉 고졸 출신’으로 서열화하는 문화는 우리 사회 전체를 침몰시킨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저서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간판 가치는 평생 간다. 그런 이유 때문에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 들어간 학생은 추가적인 경쟁의 강력한 동인을 잃게 되고, SKY에 들어가지 못한 학생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경쟁에 임하기 위한 자기개발에 소홀해진다”고 지적했다.

    ‘학벌민국’에 告함

    201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날 배화여고 학생들이 수험장으로 입장하는 선배를 응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면 구성원에게 지속적으로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보통 19~20세에 치르는 ‘학벌 획득 경쟁’에서 패배한 이라도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뜻이다. 강길선 전북대 교수는 “명문대 합격은 많은 노력과 희생이 따르는 일로, 그것을 성취한 이가 존중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고교 시절 방황했거나 공부를 다소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남은 평생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며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능력과 열정만 있으면 인생의 어느 때라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처럼 젊은이들이 출발선에서 한 걸음만 헛디디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거라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국가 발전은 요원하다는 게 강 교수의 생각이다.

    8월 서울에서 열리는 수학계 올림픽 ‘세계수학자대회’ 슬로건이 ‘늦게 출발한 이들의 꿈과 희망(Dreams · Hopes for Late Starters)’인 것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수학계에서는 우리나라가 바로 이 ‘늦게 출발한 이’에 속한다. 오랜 식민지배와 전쟁을 딛고 1950년대 후반 뒤늦게 수학 연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50여 년 만에 앞서 달리던 수많은 선진국을 따라잡고 세계 수학의 중심으로 부상한 한국 사례는 많은 나라에 귀감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늦게 출발한 이’, 이른바 개발도상국가들에 ‘꿈과 희망’을 주자는 게 이번 대회 취지다.

    스스로 기회를 만든 사람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꿈과 희망이 더 필요한 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비명문대생의 ‘늦게 출발할 기회’조차 빼앗고 있는 우리나라의 ‘학벌 만능주의’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그러하듯, 변화를 시작하려면 ‘희망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주간동아’는 직접 우리 사회의 ‘다윗’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청년 시절 학벌 획득 경쟁에서 패배했음에도 스스로 ‘문을 열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가르치고 일깨우며, 그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이들이다.

    이제 페이지를 넘기면 한국 사회 트렌드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기획력으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야간대 출신 출판기획자, 농고 졸업 학력으로 매출 4조5000억 원 대 회사를 일군 기업인, 고교 시절 사고뭉치로 구속까지 당했지만 이제는 국가의 위법 행위에 맞서 약자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는 변호사, 그리고 능력과 열정으로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된 지방대 출신 박사 등을 만날 수 있다.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지내다 뒤늦게 공부해 장관이 된 김동연 국무조정실장의 남다른 인생 이야기도 소개한다. 이들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벌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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