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8

2014.03.10

주변국 러브콜 세례 ‘나진항 몸값’이 팍팍 뛴다

대륙 세력이 대양으로 나가는 핵심 창구…유라시아 구상 한국도 뛰어들어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4-03-10 11: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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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국 러브콜 세례 ‘나진항 몸값’이 팍팍 뛴다

    북한 나진항 1, 2, 3부두 위성사진. 중국 훈춘과 러시아 하산이 지척인 지리적 위치에 만과 앞 섬이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하는 지형적 이점도 갖고 있다(작은 사진).

    ‘불원(不遠)한 장래에 국제적 신흥 청년항(靑年港)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종단항 나진만은 정치적 또는 군사적 중요성을 떠나 단순히 경제적 교통관계로만 본다 할지라도 일본의 대륙정책상 큰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일본-만주의 해륙을 연결할 이 통로야말로 국제항로 일대(一代)동맥의 간선임은 물론이다.’(‘동아일보’ 1933년 5월 10일자)

    1920년대 후반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야심에 불타던 일본은 동북아 최대 규모의 물류기지를 함경북도에 개발하겠다고 선포한다. 1909년 중국과 체결한 간도협약에서 간도와 부설권을 맞바꿨을 만큼 일본은 대륙과 동해를 잇는 철도선을 간절히 원했다. 32년 8월 그 종단항으로 최종 선정된 곳은 지도에 이름조차 없던 오지마을 나진. 이 와중에 빚어진 땅 투기 열풍은 조선반도 전체를 달구며 ‘기획부동산’의 효시로 역사에 남았다.

    그리고 80여 년 후. 인구 4만 규모의 도시로 성장해 인근 선봉군과 함께 ‘나선특별시’로 묶인 나진항이 다시 한 번 열강의 각축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방향은 정반대다. 당시에는 일본이 대륙을 넘보는 길목이었다면, 이번에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 세력이 대양으로 뻗어나가는 창구다. 여기에 한국이 뒤늦게 뛰어들었고, 일본도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21세기 동북아의 지정학적 셈법 위에서 나진이 갖는 크기는 80여 년 전 신문기사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두만강 유역 황금 삼각지대

    2월 11일 코레일(KORAIL), 포스코, 현대상선 실무진으로 구성된 실사단 18명이 통일부로부터 방북 승인을 받아 사흘 일정으로 나진을 방문했다. 목적은 나진과 러시아 하산을 잇는 철도구간과 나진 항만시설에 대한 현장 조사. 2013년 11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한 당시 두 나라가 합의한 한국 기업의 나진-하산 철도연결사업 컨소시엄 참여의 첫 실무작업이었다. 이후 이들 기업은 러시아 측 사업주체인 나선콘트랜스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구체적인 타당성 검토에 들어갔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끝자락인 하산과 나진항의 거리는 불과 55km. 러시아는 이 구간에서 이미 2001년부터 러시아 측 화물열차가 다닐 수 있는 광궤철도의 현대화 작업을 검토해왔다. 북한과 러시아가 사업추진을 합의하고 남측 자본이 참여토록 한다는 방침을 공식화한 것이 2008년이었다. 남북관계 경색에 발목이 잡혀 공전을 거듭하던 계획이 박근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맞물려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철도 보수와 함께 이 사업에는 낙후한 나진항 3부두에 컨테이너 터미널을 건설한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예상사업비는 2억2000만 달러, 계약기간 49년, 북·러 자본 비율은 3대 7. 러시아는 자신의 지분 중 40%를 남한 자본이 인수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북한은 땅을 내주는 대신 인프라 현대화와 중개수익을 얻고, 러시아는 향후 반세기 동안 매년 700만 개의 컨테이너를 운송할 새로운 항구를 확보한다는 그림이다.

    통일부는 나진-하산 철도사업 참여가 민간기업의 독자적 판단에 따른 것일 뿐 정부 프로젝트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2010년 천안함 침몰사건 직후 시작된 ‘5·24조치’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코레일은 철도 개·보수, 포스코는 나진-포항 항로를 통한 만주·연해주 원자재 직수입, 현대상선은 나진항을 이용한 해상수송로 개설이 주된 관심사지만, 이들 역시 “아직까지는 검토 단계일 뿐이므로 성급한 추측을 자제해달라”며 말을 아낀다. 검토와 보류, 논의와 지체가 반복돼온 나진 개발에 얽힌 이해관계자들의 복잡한 속내다.

    두만강 유역 황금 삼각지대(Golden Triangle). 북한과 러시아, 중국 국경이 한데 모여 있는 한반도 동북쪽 끝자락을 두고 물류 전문가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다. 나진과 중국 훈춘, 러시아 하산의 거리는 50~100km. 이 짧은 구간만 연결하면 나진항은 그대로 중국과 러시아 전역은 물론 유럽까지 한 번에 이어지는 수송로의 출발점이 된다. 말 그대로 천혜의 입지다.

    더욱 눈여겨볼 것은 잠재력이다. 반도로 둘러싸인 만 입구에 큰 섬 두 개가 방파제 구실을 하는 나진항의 지리적 특성은 대형 항구로 거듭나기에 충분하다는 게 해양물류 전문가들 분석이다. 구형 항만시설이 들어서 있는 2500m 내외를 제하고도 추가 시설을 건설할 해안이 넉넉하다. 현재 나진항의 낡은 1, 2, 3부두는 주로 함북 지역에서 생산되는 석탄과 목재를 수출하는 데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

    가장 먼저 뛰어든 곳은 중국. 러시아에 가로막혀 동해로 나가는 출구가 없는 중국은 자기 자본으로 나진항에 4, 5, 6부두를 신설해 초대형 컨테이너 하치장을 짓겠다는 사업을 2010년 북한과 합의했다. 정식명칭은 ‘훈춘-나진 도로(路)·항만(港)·물류단지(區) 일체화’ 프로젝트. 북·중 국경과 나진을 잇는 50km 남짓의 4차선 도로는 이미 정비를 끝마쳤다. 추후 이 도로를 폐쇄형 고속도로로 만들어 나진항 신설 부두를 50년간 만주 경제권의 수출입항으로 독점 활용하겠다는 게 중국 측 구상이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의 말이다.

    “가장 큰 동인은 동북3성의 경제 성장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국가 차원에서 자본을 퍼부어 성장을 견인해왔지만, 여기서 생산되는 상품이나 자원이 밖으로 빠져나오기가 만만치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나진항을 통해 동북3성의 자원을 중국 남부로 수송하거나 한국, 일본, 태평양 건너로 실어나를 길이 열린다면 시간이나 비용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주변국 러브콜 세례 ‘나진항 몸값’이 팍팍 뛴다

    박근혜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3년 11월 13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양 정상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국내 기업의 나진-하산 프로젝트 참여 등에 합의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 구상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러시아의 열망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 말과 달리 현실의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바다는 매년 겨울 꽝꽝 얼어붙는다. 보일러로 덥힌 뜨거운 물을 퍼부어가며 결빙을 막아야 하는 ‘인공 부동항’이다. 더욱이 2012년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를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는 그야말로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겪었다. 좁디좁은 졸로토이로크 만(灣)에 갇힌 항만시설로는 더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러시아 출신의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말이다.

    “러시아가 나진 진출에 속도를 내는 것은 일단 블라디보스토크를 보완할 항구를 확보하겠다는 의도가 크다. 여기에 중국의 발 빠른 움직임에도 자극받았다. 최근 수년간 북한과 러시아 사이 교역량은 북·중 교역량의 6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진항을 중국이 독점적으로 활용하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동해를 사실상 오로지하는 러시아로서는 견제가 불가피하다. 장기적으로는 남한·일본과 철도, 가스관을 연결하고자 하는 모스크바의 구상이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수면 아래에서 나진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노후한 서부해안 공업단지를 나진 주변 지역으로 이전하는 시나리오가 대표적이다. 환승지 주변 지역이 중간조립을 담당할 산업단지로 최적지라는 것은 물류 경영학의 기본상식. 일본 측은 그간 북·일 수교 논의가 테이블에 오를 때마다 이 청사진을 ‘당근’으로 만지작거렸다. 흡사 중국 경제개방의 상징 노릇을 했던 쑤저우공업원구의 북한식(式) 버전이다. 싱가포르와 중국이 합작해 1994년 본격화한 이 공업단지는 이후 각국 주요 기업 300여 곳이 입주해 중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구실을 한 바 있다.

    태평양 건너도 심상치 않다. 나가는 길로 보자면 중국의 동해 진출이지만 들어가는 길로 보면 북미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부동항 신설이기 때문. 서울에 주재하는 한 서방국가 외교관은 “중국은 이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소비처’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곳에 가장 값싸고 빠른 수송로가 새로 열린다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국가들에게도 지도가 바뀌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북미 태평양 연안에서 유럽으로 물건을 보내는 경우, 북미 대륙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경로보다 나진을 거쳐 값싼 TSR를 이용해 러시아를 관통하는 경로가 더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동북아 질서 꽃놀이패 쥔 평양

    단기적으로는 물류 거점, 장기적으로는 국제산업단지라는 장밋빛 미래. 나진을 둘러싼 각국의 첨예한 계산에 무심할 평양이 아니다. 란코프 교수는 “공간을 내주는 것이야말로 북한의 가장 경쟁력 있는 수출품”이라고 촌평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이 지역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지목해 투자유치를 시도해온 북한 당국은, 때마침 형성된 해빙무드를 이용해 주변국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키는 ‘몸값 불리기’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처형하면서 북측이 공개한 판결문은 그가 ‘나선 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 기한으로 외국에 팔아먹는 매국(賣國) 행위’를 저질렀다고 규정했다. 장 전 부위원장은 나진항 4, 5, 6부두의 중국 자본 참여를 성사시킨 당사자. 공교롭게도 러시아의 나진-하산 철도 사업이 본격화한 것과 같은 시점이다. 이 지역에 가장 깊이 팔을 뻗어놓은 중국을 견제하려 러시아를 활용하겠다는 계산이다.

    중국의 나진 진출이 본격화할 경우 인민해방군 함정이 상선 보호를 이유로 이곳에 주둔할 수 있다는 관측에 적잖은 북한 전문가들이 유보적 평가를 내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피하는 것이야말로 최근 평양 정책결정그룹의 지상목표라는 것. ‘주체’를 강조해온 북한의 체제 특성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설명도 따라나온다.

    그러나 군사 분야 전문가들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거꾸로 보면 북한으로서는 중국을 유혹할 강력한 카드를 손에 쥐었다는 견해다. 이를 통해 중국 해군력이 동해와 태평양에 투사될 수 있다면 미·일동맹으로서는 그야말로 악몽일 수밖에 없고, 남·동중국해에서 미국의 대중(對中) 압박이 강해질수록 베이징은 해상봉쇄 구도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나진에서 찾으려 할 공산이 크다. 중국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동참 같은 민감한 이슈를 고민할 때마다 평양은 나진 카드를 흔들며 압력을 피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전직 정보당국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러시아의 극동개발 움직임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 20년 전, 중국의 나진 진출 노력도 어느새 10년을 헤아린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계획대로 돼 있는 게 대국(大國)이 일하는 방식이다. 평양은 그 고비마다 써먹을 나진이라는 꽃놀이패를 쥐었고, 이제는 동북아 질서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지렛대로 삼으려 하고 있다. 중·소 분쟁 시절부터 이어져온 반세기 줄타기 외교의 노하우다. 한반도 지정학의 미래가 나진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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