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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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다 끌려간 그날 이후 상처는 영혼까지 남아 있다”

영화 ‘변호인’ 실제 인물 박욱영 부산 해운대구의원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01-13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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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먹다 끌려간 그날 이후 상처는 영혼까지 남아 있다”
    “이 언저리 어디쯤인데….”

    부산 동구 좌천동. 낡고 작은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선 후미진 골목을 찬찬히 살피던 박욱영(57·사진) 씨가 “아, 저기네요” 하고 한 곳을 가리켰다. 새로 올린 경로당 건물 앞으로 멀끔한 정자가 놓여 있는 곳. 겨울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기둥 사이로 동네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그곳이, 30여 년 전 자신이 끌려들어가 모진 폭행과 고문을 당했던 대공분실 터라는 얘기다.

    박씨는 최근 영화 ‘변호인’을 통해 재조명된 이른바 ‘부림사건’ 관련자다. 1981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야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부모와 함께 밥상 앞에 앉아 있다 낯선 남자들 손에 이끌려 이리로 왔다. 당시엔 눈이 가려져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박씨가 기억하는 건 자신을 건물 안에 밀어 넣은 뒤 두건을 벗기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지시하던 사내 눈을 피해 문득 바라본 창밖으로 철길이 보였다는 것뿐이다. 아주 넓은 철길이었다. 이후 무차별적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 항구의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아, 바다 근처구나.’ 그렇게 또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바다 근처, 큰 철길이 있는 곳’

    ‘바다 근처, 큰 철길이 있는 곳.’ 박씨는 지난 33년간 자신의 꿈과 미래를 파괴해버린 장소를 오직 이렇게만 기억했다. 그가 이곳을 다시 찾아온 건 지난해 12월 영화 ‘변호인’을 두 번째로 본 직후다. 아스라이 남은 기억을 바탕으로 물어물어 장소를 탐문했다. 부산진역 뒤편, 부두가 가까운 곳에 이르러 동네에 오래 살던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바로 이 터에 그 시절 대공분실이 있었다고 일러줬다. 그 말을 듣고 정자에 한참을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는 그는 “한동안은 그 사건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이곳에 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극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개봉 19일 만에 관객 수 800만 명을 넘기며 돌풍을 일으킨 영화 ‘변호인’은 실제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때문에 더 화제다. 송우석 변호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시국사건은 부림사건을 모티프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극중에서 ‘송변’의 변호를 받는 대학생 박진우 이야기 역시 실존인물에 바탕을 두고 구성했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던 피고인 세 명, 즉 박씨와 고호석 씨(교사), 송병곤 씨(법무법인 부산 사무장)의 스토리를 합친 것이다.

    주인공의 야학 활동은 박씨에게서 차용했다. 영화 속 진우의 수감번호 21번은 부림사건 당시 고씨의 수감번호였고, 아들이 실종된 뒤 수십 일 동안 부산 곳곳을 찾아 헤맨 어머니 이야기는 송씨에게서 온 것이다. 박씨는 지난해 12월 고씨 연락을 받고 영화 ‘변호인’ 시사회에 참석해 처음으로 이 영화를 봤다고 했다. 처음엔 힘들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스크린에서 쏟아져 나오고, 잊고 싶던 고문의 순간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탓에 숨이 막혔다.

    그가 이 내용을 영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건 동료들과 함께 또 한 번 영화를 보러갔을 때다. 그때 비로소 고문 장소를 찾아볼 용기를 냈고, 이후 ‘변호인’을 두 번 더 봤다고 한다. 이제 그는 영화 내용과 실제 사건을 비교하고, 당시 자신이 겪은 일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그 덕에 ‘영화가 어디까지 사실인지’ 물을 수 있었다.

    “저는 집에서 잡혀갔어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아침을 먹는데 낯선 남자 세 명이 들이닥쳤죠. ‘아무개를 아느냐’고 하더군요. 이미 1차로 잡혀가 있던 동료 이름이었어요. 그를 먼저 조사하고 저를 또 잡으러온 거죠. ‘안다’고 하니까 ‘대질심문을 좀 해야겠다’며 데리고 나가더군요.”

    처음엔 점잖았다. 그러나 집 앞에서 그를 택시에 태우자마자 대우가 달라졌다. 양쪽에서 팔뚝을 잡고 앉은 채 두건을 씌워 눈을 가린 게 시작이었다. 이후 부산 시내를 한참 빙글빙글 도는 듯하더니 예의 장소에 도착해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지하에 있는 한 평 반(약 5m2) 정도 되는 방에 밀어 넣었다.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매트리스 한 개가 놓여 있었어요. ‘여기가 어디지’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몽둥이가 날아오더군요.”

    이후 구타가 시작됐다. 아무 질문도 없이 매질만 했다. 영화 ‘변호인’ 속 주인공처럼 몸에 몽둥이를 끼우고 천장에 매다는 ‘통닭구이’와 물고문도 당했다.

    구타… 통닭구이… 물고문

    박씨 어머니 역시 영화 속 진우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이 기관원에 잡혀가는 모습을 봤으니 얼마나 찾아 헤맸을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박씨는 당시 어머니가 물어물어 좌천동 대공분실까지 그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에게 전해달라고 담배 두 보루를 건넸다는데, 정작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매질 도중 불현듯 조사관이 담배 한 가치를 건네준 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놈들, 내 거 갖고 나한테 생색낸 거예요.”

    박씨 눈동자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서렸다. 그 덕에 고문 이야기를 물으며 미안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됐지만, 43일간 이어진 구금과 조사가 그에게 남긴 상처는 컸다. 182cm의 당당한 체격인 그는 지금도 등이 벽에 닿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를 감다가 눈에 비누가 들어가 시야가 가려지면 공포에 숨이 막히는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린다.

    “매일 정신없이 매를 맞던 때 얘기예요. 하루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한 명 제 방에 들어오더니 털썩 매트리스에 눕데요. 자는지 자는 척하는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그래요. ‘너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 대꾸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으니 혼자 계속 얘기를 하더군요. ‘그냥 대충 하고 나가라. 여기서 이렇게 맞다 죽으면 끝이다. 몸뚱이에 돌 묶어서 바다에 던져버리면 누가 알겠노.’ 이게 협박인지 회유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또 매질이 이어졌다. 다짜고짜 종이를 들이밀고 쓰라고 하기도 했다. ‘뭘 써야 하는지 알지’ 하는데 미쳐버릴 것 같았다. 멍하니 앉아 있으면 또 때렸다. 그가 결정적으로 ‘미쳐버린 건’ 옆방에서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왔을 때다. 영화에서처럼, 그의 방 옆으로 또 다른 방들이 늘어서 있었고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다 남자 소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여자 비명이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숨이 턱 막혔다. 당시 부산대에 다니던 그의 여동생도 오빠를 따라 야학을 하고 있었다. ‘동생이 끌려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우리 집안이 끝장났구나’ 하는 생각에 자포자기가 됐다. ‘원하는 대로 다 써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쓰려고 해도 쓸 말이 없더군요. 동료들과 함께 책 돌려 읽고, 야학을 한 거 외엔 한 일이 없으니 뭘 써야 할지 몰랐어요.”

    그는 진술서를 거의 1000장은 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수사관들이 원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교회와 성당 등에서 노동자를 가르쳤으니 ‘노동야학’을 한 건 맞지만, 노동운동을 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한 또래 젊은이들에게 국어, 산수, 영어, 한문 등을 가르쳤다. 결국 수사관들은 그에게 앞서 잡혀온 다른 사람들의 진술서를 가져다줬다. 그들이 쓴 내용대로 맞춰 썼다. 이후 구치소로 옮겨졌을 때 노무현 변호사가 찾아왔다. 박씨는 그를 믿지 않았고 “왜 왔느냐”고까지 했다.

    “영화에서는 ‘송변’이 진우 몸에서 고문당한 흔적을 보고 사건 전모를 파악하는데, 그건 사실과 달라요. 우리는 연행 초기에 집중적으로 맞았고,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변호사 접견을 했기 때문에 몸에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거든요. 노 전 대통령은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문제를 알아나갔죠.”

    박씨는 당시 ‘노변’을 이성적이고 겸손한 인물로 기억했다. 영화에서는 매우 감성적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사건을 대했고 열 살 넘게 어린, 심지어 초라한 피고인인 자신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는 것이다.

    부림사건이란

    영장 없이 22명 체포 감금… 국보법으로 기소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대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20~63일간 감금하고 국가보안법(국보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 형사처벌을 받은 이들 중 일부가 99년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고, 2006년 재항고해 2008년 대법원으로부터 계엄법 위반혐의에 대한 재심판결을 받아냈다. 이후 2009년 부산지방법원 형사항소3부는 이들의 계엄법 위반혐의에 대해 무죄선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에 대해서는 면소판결했다. 다만 국보법 위반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판단할 수 없다”고 밝혔다.

    현재 이 사건은 다시 한 번 법의 심판대에 올라 있는 상태다. 지난해 3월 부산지방법원 제2형사부가 고호석 씨 등 5명이 제기한 부림사건 재심 청구에 대해 ‘혐의 전체에 대한 재심 결정’을 내렸기 때문. 국보법 위반에 대한 유무죄 판단까지 포함하는 이번 재판 결과는 2월 중 나올 예정이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노변’

    “밥 먹다 끌려간 그날 이후 상처는 영혼까지 남아 있다”

    부산 동구 좌천동 한 경로당 앞 정자에서 ‘부림사건’ 당시 경험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박욱영 씨.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부림사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학생들은 나에게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와 빈부격차의 모순 같은 문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읽다 붙잡혀온 그 책을 읽기를 권했다. (중략)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박씨도 ‘노변’에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조세희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을 읽어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노변’은 “가서 읽어보겠습니다”고 답했다. 그렇게 차분하던 사람이 법정에서는 거침이 없었다. 판검사를 향해 “이 학생들이 한 게 정당한 것 아니냐. 우리 사회를 위해서 정말 잘한 것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고인들도 당당히 할 말을 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 보관된 ‘부림사건’ 피고인 최준영 씨의 항소이유서에는 “‘신분위장취업’ ‘사회주의 혁명가’ 운운한 사실은 없으며 1심 법정에서 박욱영 피고인도 그런 사실이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중공의 교육제도를 고무찬양한 사실이 없으며, 피고인 박욱영도 그런 사실이 없음을 1심 법정에서 분명히 밝혔고…” 등의 대목이 있다. 박씨를 비롯한 피고인들이 1심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하고, 공소사실이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밝혔다는 증거다. 박씨는 “영화 ‘변호인’을 참 좋게 봤지만 피고인들이 지나치게 나약하고 소극적으로 그려진 부분은 좀 아쉽다”고 했다.

    재판정에서 ‘노변’과 박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결국 국가보안법(국보법) 위반, 반공법 위반, 계엄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범인은닉, 범인도피 등의 죄목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돼 1982년 출소했고, 이듬해 결혼해 작은 인쇄소를 차렸다. 그러나 시국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형사가 찾아오고, 동네를 들쑤시며 일거수일투족을 탐문하는 통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찰 출신으로 아들이 시국사건에 연루되는 걸 싫어하던 아버지도 그가 한국을 떠나기를 바랐다. 결국 박씨는 85년 아내와 함께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일본 게이오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일본 사회 소시민으로 살다 귀국한 게 96년이다. 이후 부산 해운대구 좌동에 일본어학원을 열고 지금까지 운영하는 그는 2010년 해운대구의원이 되면서 정치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당시 선거에 출마하며 공보에 ‘부림사건 연루 복역’이라고 쓰기 전까지 그는 이 사건을 오래도록 삶의 중심에서 밀쳐두고 지냈다. 사건 관련자 중 일부가 2009년 재심을 신청해 계엄법과 집시법 위반 부분 등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고호석 씨 등의 청구로 부산지방법원이 국보법 위반 등 이 사건 혐의사실 전체에 대해 재심을 개시할 때도 그저 지켜봤다.

    영화 ‘변호인’ 개봉은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박씨는 “그 시절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비난하던 주위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그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 게 기쁘다. 종종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어 감사하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사건이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현재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재심 신청 여부를 고민해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변호인’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꼽는 장면은 ‘송변’이 공안형사를 향해 “국가는 국민”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국민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걸, 그리고 바른 정치라는 걸 지금도 그는 가슴에 품고 산다. 먼 길을 돌아 정치의 길에 나서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에게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뭘 후회하느냐”고 반문했다. 젊은 시절, 안정된 궤도를 박차고 나가 세상과 만난 것을, 배우지 못한 또래를 위해 야학을 한 것을, 나라에서 읽지 말라는 책을 읽은 것을, 부당한 체포와 고문에 맞서 판검사에게 대든 것을 후회하느냐는 말이냐고, 그의 눈빛이 묻고 있었다.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어요. 뜨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청춘을 후회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 때문에 삶의 궤적이 달라졌다고 해도, 힘들고 병든 부분이 생겼다 해도,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을 어떻게 후회할 수 있겠습니까.”

    잔혹한 고문의 상처를 이야기할 때조차 장난스럽게 빛나던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우문에 현답이었다.

    영화 ‘변호인’ 돌풍 이유

    우리가 살았던 시대 공감+약자 대변


    “밥 먹다 끌려간 그날 이후 상처는 영혼까지 남아 있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 관객 수가 1월 7일 800만 명을 돌파했다. 개봉 19일 만의 성과로, 역대 최고 흥행작 ‘아바타’(1362만 명)보다 6일이나 빠르다. 아직 흥행속도가 떨어지지 않은 데다 영화를 본 이들 사이에 재관람 열기까지 일어 새로운 기록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말이 나온다.

    현대사의 유명 인물, 특히 호오(好惡)가 극명히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이 영화가 흥행가도를 달리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영화 메시지가 세대와 정치이념을 넘어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1월 3일 현재 영화 예매사이트 ‘맥스무비’ 집계에 따르면 ‘변호인’ 예매자 46%가 40대 이상이다. 기성세대가 흥행열풍을 주도한다는 뜻이다. 1월 7일 부산 한 극장의 ‘변호인’ 상영관도 관객의 절반 이상이 40~50대로 보였다. 친구들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는 한 중년 여성은 “우리가 살았던 시대 이야기라 눈물이 났다. 특정 개인이 떠오르기보다는 그 시절 친구들 생각이 났다”고 했다.

    당시 시대상을 모르는 2030 젊은이는 이 영화를 극장판 ‘안녕들하십니까’로 여긴다. 대학생 김동희 씨는 “우리 세대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취업하기 어렵고, 집 사기 어렵고, 성공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산다. 그런데도 문제제기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약자를 대변하는 ‘송변’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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