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1

2013.11.04

“감성 에너지 고갈된 남자, 가을에 더 무너진다”

MBC 라디오 ‘윤대현의 마음연구소’ 마음지기 윤대현 서울대 교수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3-11-04 10: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감성 에너지 고갈된 남자, 가을에 더 무너진다”
    매일 5분의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하루 5분’은 무심코 흘려보내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붙잡아 ‘내 안에 있는 감성에게 위로를 전하고 에너지를 충전하자’며 팔을 걷어붙인 이가 있다. MBC 라디오에서 매주 월~금요일 오전 8시 30분부터 5분간 ‘윤대현의 마음연구소’를 진행하는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다.

    최근 우울한 사회 분위기와 치열한 경쟁에 치여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늘고 있다. 수많은 사람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실시간 소통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사는 현대인이지만 정작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마음의 병을 키운다. 외로운 섬처럼 떠돌며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이 왠지 꺼려지는 병원 ‘정신과’ 대신 신경정신분석가, 심리학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이 진행하는 심리상담 관련 방송으로 몰리고 있다. 특히 ‘윤대현의 마음연구소’는 “방송시간을 못 맞춰 인터넷 팟캐스트를 찾아 매회 빠짐없이 듣고 있다” “내용이 무척 공감 가고 위로가 된다”는 마니아가 적지 않다. 언제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데다 믿음조차 없어 스스로 실망하고 화내는 일을 반복한다는 30대 남자, 친구들의 행복한 모습이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50대 남자의 사연이 방송을 탔다.

    “성취에만 집중하면 행복감 못 느껴”

    ▼ 강의하고 환자를 보는 일만으로도 바쁠 텐데 최근 방송 진행까지 맡았다.

    “시작한 지 두 달쯤 됐다. 최근 우리 사회는 성공했다고 다 훌륭한 것도, 존경받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배워가고 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행복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깨지는 중이다. 혼외자니 성추행이니 하는 문제로 한순간 훅 가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봐왔나.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흔히 말하는 성공, 즉 목표를 성취하려 애쓰면서 마음도 돌봐야 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사는 동안 에너지를 다 쓰고 죽으면 됐지만, 지금은 고령화사회라 은퇴 이후 삶이 아주 길다. 번아웃신드롬(소진증후군)을 겪지 않으려면 마음을 채워줄 방법을 익혀야 한다. 뇌를 활성화해 감성 에너지를 충전하는 법을 라디오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윤 교수는 우리 뇌를 스마트폰에 비유했다. 본체인 이성을 신기술로 업그레이드해 고성능화해도 ‘감성’인 배터리가 방전되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감성 시스템이 지쳐 에너지가 고갈, 방전되는 게 번아웃신드롬이다. 일명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이다. 그는 “번아웃이 되면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거나 누가 봐도 근사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는 근사하게 느끼지 않는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것과 삶을 가치 있게 인식하는 뇌의 프로세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성취에만 집중하면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십상이고, 행복감도 느끼기 힘들다. 뇌를 활성화해 감성 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 감성 시스템에 에너지를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명 ‘마음 충전법’이라고 하는 최신 스트레스 관리 기법이 있다. 연민집중치료 이론과 수용전념치료 이론이다. 우리 뇌에는 스트레스 시스템 컨트롤과 관련한 항스트레스 시스템이 있다. 그것을 ‘연민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둘 사이에 균형이 이뤄져야 행복하고 만족한 삶이 된다. 연민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게 연민집중치료 이론이다.

    수용전념치료 이론은 자기의 삶을 받아들이고, 성취가 아닌 가치 중심적인 데 전념하게 하는 것이다. 성공이나 성취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가치관을 바꾸게 되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연민 시스템을 활성화하려면 연료가 필요하다. 그 좋은 재료가 사람과 자연, 문화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잠깐씩 자연을 벗 삼아 산책하면서 문화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성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 ‘좋은 사람’의 기준은 주관적이지 않나.

    “이유없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기 싫은 사람도 있다. 후자는 같이 있어도 내가 충전이 안 되는 사람이다. 반면 전자는 대부분 충전을 해주는 사람이다. 충전은 깊은 내용이라기보다 리액션(반응)이 좋은 사람에게서 온다. 상대에 비친 내 모습이 긍정적이고 좋다는 것을 뜻한다. 룸살롱 여자들의 리액션이 좋기 때문에 남자들이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그런 곳에 가는 거다. 상대가 내 이야기에 진지하게 반응만 해줘도 위로가 되고, 뇌 안에 있는 연민 시스템이 활성화한다. 반려동물에게서 위안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가 올라갈수록 리액션이 좋은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는 걸 많이 봤다. 아부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내면 약한 남자들 사랑받고 싶어 해”

    ▼ 방송에서 요즘 중년 남성이 공통적으로 내비치는 고민은 뭔가.

    “한마디로 ‘정체성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춘기를 겪는 거다. 한 50대 남자는 축구를 보고 싶은데 밥을 안 줄까 봐 걱정돼 아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함께 보다 혼자만 울었다는데, 실제로 드라마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는 중년 남자가 의외로 많다. 연애나 사랑을 하고 싶다는 남자도 많다. 남자는 전투력을 잃고 여자는 모성애가 떨어지는 시기가 중년이고 두 번째 사춘기다. 전투력은 우리 뇌의 스트레스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건데, 그러면 연민 시스템이 작동하기 어렵다. 사슴을 사냥해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하는데 연민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안 되지 않나. 전투력 등 생존과 직결되는 스트레스 시스템은 연민 시스템보다 훨씬 힘이 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앞만 보고 달려가던 성취 중심의 프레임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치 중심의 따듯한 프레임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정체성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윤 교수는 연민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첫 단계가 용기라고 했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는 게 용기다.

    “문제는 남자들이 약점을 드러내는 데 서툴기 때문에 연민하기가 힘들고 공감도 안 되며, 그러다 보니 정체성 위기가 찾아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중년 여성은 자매나 친구 등 각종 네트워크를 활용해 연민과 공감을 강화하는 반면, 중년 남성은 그러지 못하니 외롭고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60세 이상 남자가 많은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는 “연민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나이 들어 뾰족하고 까칠하며 화를 잘 내는 고약한 노인이 된다. 그로 인해 주변에 사람이 더 없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그러니 지금부터 중년 남성도 서로 보듬고 시집도 읽으면서 감성 에너지를 채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 중년에 해당하는 말 같다.

    “아무리 뻣뻣한 남자라도 가을에는 감성 예민도가 증가해 감성 시스템이 작동되기 때문에 쉽게 우울해진다. 소위 ‘가을을 탄다’고 하는데, 떨어지는 낙엽이나 흰머리, 주름살을 보면서 ‘아, 나도 이제 끝났구나’ 하고 낙담하고 괴로워할 게 아니라 ‘연민과 관련한 거구나’ 하면서 즐겨야 한다. 중년 남성은 대부분 ‘봄이 언제 왔다 갔는지 기억도 안 난다’고 한다. 봄과 가을은 연민 시스템을 활성화하기에 최고의 계절이다. 여름과 겨울은 기온이 신체에 부담을 줘 스트레스 시스템이 더 큰 자극을 받는다. 우리 뇌가 생존과 관련한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을이면 낙엽을 즐기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줄 안다. 남성도 배워야 한다.”

    어릴 때부터 이 땅 남자들은 ‘강해야 한다’고 교육받아왔다. 이 때문에 앞만 보고 정신없이 내달려온 남자들이 자신을 포함해 “참 안됐다”고 윤 교수는 말했다.

    “실은 남자들도 약하다. 우리도 정말 사랑받고 싶다. 애완견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많은 중년 남성의 내면 심리가 아마 다 똑같을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