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0

2012.01.09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을 널리 알려야죠”

‘최재형 장학회’ 김창송 성원교역 회장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2-01-09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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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을 널리 알려야죠”
    “제가 ‘최재형’이란 분을 늦게 안 것이 한(恨)입니다…. 그럼에도 보람 있어요.”

    팔순 기업인이 ‘최재형’(1859~1920)이란 이름을 언급한다. 그는 매일 최재형이란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알리려고 각종 기업인 조찬모임에 빠지지 않는다. 강행군이다. 참석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1만 원’의 장학금을 ‘청탁’한다. 지인들은 그가 어째서 100년 전 러시아에 살았던 인물에 열광하는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그의 얘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금세 설복된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기업인이 있었구나’라고 탄복한다. ‘최재형 장학회’를 이끄는 김창송(80) 성원교역 회장 얘기다.

    “저도 경영인인지라 일평생 위대한 최고경영자(CEO)의 성공 스토리를 좇았어요. 정주영과 이병철 회장을 존경했고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따라 하려 노력했죠. 그런데 무언가 조금씩 아쉽더군요. 그런 갈증을 러시아 연해주에서 풀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업인이 있다는 것은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던진 CEO

    김 회장은 1968년 화공약품을 수입하는 성원약품상사를 창업한 후 80년대 초반 세계적 진공펌프 제작사인 영국 에드워스와 합작회사를 설립해,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초창기를 주도한 기업인이다. 2008년에는 외국 첨단기술을 도입하는 데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바쁜 시간을 쪼개 수필가로도 활약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해왔다. 한동안은 지구를 수십 번 돌 만큼 해외영업에 열정을 쏟으며 국가에 기여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허전했다. 후배를 ‘뿌리를 아는 가슴 따뜻한 비즈니스맨’으로 만들고 싶었다. 최재형을 발견한 순간, 그는 무릎을 쳤다.

    러시아 연해주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소외된 지역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인물은 비교적 빨리, 중국 기반의 활동가도 대부분 후대에 공적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연해주 지역만큼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거기에 최재형 선생이 있었다.

    “함경도에서 노비와 기생의 자식으로 태어나 배고픔에 지쳤던 어린아이가 연해주로 건너가 성실성과 창의력으로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최대 재벌이 됩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니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죠. 세상에 이런 기업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가 최재형을 안 것은 2년 전, 망국 100주년을 맞이해 동북아평화연대(이사장 강영석)가 주최한 ‘추석맞이 연해주 탐방’을 가면서다. 비행기로 2시간 거리. 그러나 심리적 거리는 미국과 유럽보다 훨씬 먼 동토. 블라디보스토크에는 3만 명에 가까운 고려인이 민족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었다.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척박한 땅에 사는 동포 3세와 4세가 처한 현실은 처참했다. 공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의 동포가 수두룩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고려인조차 챙기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40년 이상을 무역인으로 살아오며 다양한 동포사회를 본 그였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가난과 망국 탓에 고국을 떠난 이들 아닌가요. 그런데도 독립운동은 또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그리고 러시아 근대사는 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스탈린의 강제이주도 있었고.그런 후손을 제대로 교육시키자는 뜻에서 장학회를 생각해낸 겁니다.”

    가치 창출하는 진정한 삶의 표상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을 널리 알려야죠”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였으며 임시정부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최재형 선생.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인물이다. 러시아 선장의 집안으로 입양된 그는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정규교육을 마쳤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개발할 시점에 군수업과 무역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그는 연해주 연추 지역의 도헌(지금의 군수 직책)에 선출돼 러시아 주류인사가 됐다. 니콜라이 2세를 두 번이나 알현하며 시베리아 동쪽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벌어들인 재산을 모두 항일투쟁에 쏟아부었어요. 안중근 의사의 실질적인 후원자가 바로 최재형 선생이었죠. 임시정부 초대 재무장관으로 추대될 정도였습니다. 기업인이 돈을 버는 이유는 간단해요. 대개 ‘일신(一身)’을 위해서죠. 그런데 이 양반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포기한 겁니다. 이 분을 알게 된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실제 최재형은 역사교과서에서도 이름만 언급할 뿐 무게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으로 연해주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언제나 최재형이 자리했다.

    그는 20만 재러 동포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실질적 지도자였다. 1920년 일본군이 러시아혁명을 빌미로 연해주에 전면 공세를 펼쳐 그를 체포해 총살하자, 지도자를 잃은 고려인의 지위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1935년 스탈린은 17만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고려인 젊은이조차 최재형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에 대해 물어보자 ‘아니 그렇게 훌륭한 분이 있었느냐’고 되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죽기 전에 그분을 제대로 알리는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재러 동포의 비전이자, 21세기형 CEO의 모델입니다.”

    김 회장은 한 번에 큰돈을 쾌척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좀 더 많은 기업인을 의미 있는 활동에 동참시키고 싶었다. 단돈 1만 원이라도 기부하는 사람이라면 최재형이 누군지 한 번쯤 찾아볼 테고, 그러면 동포청년은 물론이고 한반도에 사는 젊은이에게도 대륙의 기상을 전달할 최재형의 정신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뜻을 세우자 일이 총알처럼 진행됐다. 지난해 3월 발기인 대회, 6월 창립총회 및 세미나를 거쳐 9월에는 연해주를 방문해 10여 명의 학생에게 첫 장학금을 수여했다. 1인당 35만 원씩 매달 학비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후원자 1호는 김수필 전 SKC 부회장이 맡았다.

    “남의 주머니에서 1만 원을 꺼내는 게 쉽지 않아요. 영업사원이 거래처를 개척하는 것과 비슷하죠. 후원하는 사람의 품격도 중요합니다. 그 어른의 인격을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의무도 있으니까요. 그게 가장 고민스럽죠.”

    그러고 보니 김 회장도 이북 출신이다. 세계를 상대로 무역을 했다. 나라 독립과 경제 독립은 젊은 시절 가장 큰 꿈이었다. 글로 후학에게 사상을 전파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실업회, 인간개발원 등 자신이 연계된 거의 모든 단체를 쫓아다닌다. 최재형을 소개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사회에 보급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최재형의 얘기가 교과서에 실렸으면 하는 바람도 잊지 않았다.

    “그는 당시 아시아 제일의 기업인이었습니다.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인의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죠. 사회와 국가가 필요로 할 때 돈은 물론, 목숨까지 내던졌어요. 저는 그런 ‘최재형 정신’을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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