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4

2011.09.19

진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손영성 감독의 ‘의뢰인’

  • 이화정 씨네21 기자 zzaal93@naver.com

    입력2011-09-19 12: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진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시체가 사라졌다. 방 안 침대에는 엄청난 양의 혈흔만 남았다. 끔찍한 사건의 용의자는 피해자의 남편 한철민(장혁 분). 한철민은 사건 당일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자, 지금부터 한철민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변호사 강성희(하정우 분)와 그의 죄를 확신하는 검사 안민호(박희순 분)의 대결이 펼쳐진다. 시체도 증거도 없는 지지부진한 법정 공방전. 한철민 사건의 수임을 극구 꺼리던 강성희의 말처럼, 정황 증거만으론 섣불리 유죄도 무죄도 입증하기 어렵다. 그만큼 시체가 없는 사건은 해결하기 까다롭고 애매할 수밖에 없다. 공판을 진행함에 따라 결국 한철민 사건은 단순 살인사건을 떠나, 검사와 변호사 사이의 직업윤리와 양심, 각자의 원칙, 처지의 차이라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로 번져간다.

    ‘의뢰인’은 이 첨예한 문제를 고스란히 대한민국 법정으로 끌고 간다. 사건의 모든 정황을 판사, 배심원을 대상으로 검사와 변호사가 펼치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재구성하는 형식이다. 승소를 위해 입을 닫아버린 피의자를 사이에 두고, 검사와 변호사는 자신의 논리를 입증할 그럴듯한 주장을 펼친다. 할리우드에선 존 그리샴 같은 법정 스릴러 작가의 원작이 뒷받침하는 가운데 다양한 법정 스릴러 영화를 제작해왔지만, 충무로에서는 본격적으로 법정을 무대로 한 작품이 많지 않았다. 법정 공방을 다룬 작품은 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성폭행당한 여성 인권을 소재로 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가 유일하다. 무죄를 입증하려는 ‘의뢰인’의 스토리라인은 할리우드 법정 스릴러 중 관타나모 기지에서 살해당한 사병의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간 ‘어 퓨 굿맨’(1992)이나 주교를 살해한 용의자로 체포된 소년과 그를 변호하는 변호사를 그린 ‘프라이멀 피어’(1996)와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배심원의 구실이다. 배심원 제도는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재판 또는 기소에 참여해 사실 문제에 관해 평결하는 제도’다. 배심원 제도가 일반화한 미국에서는 배심원을 매수하는 내용의 스릴러를 제작할 정도로 일반화했다. 국내에서도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해 ‘의뢰인’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만 보았던 배심원 제도를 소재로 삼았다.

    영화에서 강성희는 배심원 제도를 활용해 재판 날짜를 연기시키고 변론 준비기간을 확보한다. 승소의 관건은 배심원을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치밀한 스토리텔링, 즉 치밀한 논리에 있다. ‘의뢰인’의 재미는 판결의 결과보다, 이렇게 판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검사와 변호사의 화려한 이야기 솜씨를 지켜보는 데 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검사와 변호사는 각자가 수집한 증거 및 정황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한다.

    진실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사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살인 사건의 모든 상황은 검사와 변호사의 필터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누구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지, 판단은 관객 자신의 몫이다.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배심원의 자리가 곧 이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의 자리로 치환하는 셈이다. 영화 속 공판이 진행되는 좁은 공간, 긴장감이 빽빽이 들어찬 법정의 공기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의뢰인’이 주는 이러한 영화적 쾌감은 손영성 감독의 전작에서도 고스란히 목격된다. 전작 ‘약탈자들’에서 손 감독은 흥미로운 서술 방식으로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알렸다. 금정굴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는 역사학자 상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약탈자들’의 내용은 한 줄의 시놉시스로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중첩해 있다. 주인공 상태의 캐릭터는 친구 병태의 장례식장에 모인 동창생의 뒷담화로 설명하며, 병태의 죽음은 상태와의 관계로 서사한다. 스릴러와 판타지가 결합한 이 이상한 방식의 영화에서 중요한 건 누군가가 누군가를 ‘기술한다’는 데 있다. ‘약탈자들’에서 사건은 발생한다기보다 오히려 재구성된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의뢰인’에서 한철민 사건을 재구성하는 검사와 변호사의 팽팽한 맞대결은 이렇게 전작에서 보여준 감독의 이야기 구성 방식과 일정 부분 겹친다.

    손 감독은 데뷔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촬영 때 연출부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의 영화가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을 보면 홍 감독 작품에서의 ‘회상’ 개념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처럼 회상으로 조합한 사건은 어떤 관점에서 기술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실처럼 만들 수 있다. ‘약탈자들’이 더욱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기술에 의존했다면 ‘의뢰인’은 이 주관적인 유추를 더욱 확실한 세계로 포장하는 작업에 주력한다. ‘의뢰인’의 검사와 변호사에게 불확실성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철저히 계산된 반론, 정확한 논리로 아귀 맞춤을 하려고 그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전투에 나선다. 물론 이 현란한 두뇌싸움에도 함정과 허점은 존재한다. 차곡차곡 사건의 논리를 쌓아가는 동안 정작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관객의 뒤통수를 가격하는데, 이는 단순히 ‘절름발이가 범인’이던 ‘유주얼 서스펙트’ 식의 결론을 넘어서, 다수의 인간이 가진 선입견과 오해, 아집과 관련한 강한 일격이다. 사람이 믿는 혹은 믿고자 하는 것과 진실 사이의 간극을 영화는 반전의 묘미를 통해 통렬하게 꼬집는다.

    이 신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은 빈틈없이 짜인 이야기를 실어 나를 배우가 맡는다. 중심축은 세 남자다. 정서적, 심리적으로 가장 파장이 큰 구실은 한철민 역의 장혁이 도맡는다. 무죄를 입증하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없는 무력한 남자의 눈빛은 장혁이 드라마 ‘추노’에서 보여주었던 농도 깊은 연기를 떠올리게 한다. 행동을 표방하는 건 하정우와 박희순의 연기에 있다.

    장르 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일 수 있지만, 변론이 주가 됐다는 점에선 두 배우 모두 한국에선 좀체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지점의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엄청난 대사의 압박은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두 배우가 창조한 캐릭터다. 하정우는 매사 자신감 있고 일처리에 능숙한 강성희라는 맞춤옷을 입은 듯한 연기를 선사한다. ‘황해’에서의 지치고 암울한 기운을 본 후라 이 배우의 변화가 더 크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강성희라면 능히 그럴 법한 내뱉는 듯한 말투의 창조와 제스처의 개발로 하정우는 그가 현재 가장 전도유망한 배우임을 확실히 입증한다.

    냉철함을 잊지 않는 검사 안민호 역의 박희순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기로 세 남자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주력한다. ‘맨발의 꿈’으로 인간적인 면모를 선보였던 박희순 대신, 그가 가진 본연의 강렬한 눈빛이 이번 작품에서 다시 주가 된다. 감각에 의해 수사를 진행하는 강성희와 달리, 매사 이성적인 원칙주의자로서의 엄격함을 가진 안민호는 박희순의 날카로운 모습이 뒷받침되면서 설득력을 갖는다.

    배우들이 “마치 연극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의뢰인’은 많은 장면이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다소 지루한 공방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으나, 두 남자가 쏟아내는 대사에 대한 몰입 정도는 꽤 높은 편이다. 영화는 헐겁게 봐도 좋을 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칫 한 장면이라도 놓친다면, 이 싸움의 고리를 하나쯤 잃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관객에게도 법정의 배심원 역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충무로에 새롭게 등장한 첫 번째 논리의 대결. 당신이 누구 편을 들든, 이 싸움은 제법 흥미진진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