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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2017년 친척보고서 ‘우리는 친척과 얼마나 가까울까’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모처럼 긴 연휴를 맞아 가족여행을 떠나게 됐는데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인천에 사는 회사원 이모(48) 씨의 말이다. 이씨 가족은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명절 때마다 큰형집에 형제자매가 모여 차례를 지냈지만, 올 추석에는 모이지 않기로 했다. 형은 병원에 입원하고 여동생은 아이가 대입을 앞두고 있어 오기 힘들다고 했기 때문. 그는 추석 연휴를 일주일 앞둔 9월 24일 아내, 자녀들과 함께 간소하게 차례를 지내고 연휴 기간엔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문제는 자녀들이 친척집에 가지 않는다고 기뻐했다는 것이다. 그는 “명절 음식 준비를 덜 하게 돼 아내가 가장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외려 아이들이 더 신났다. 친척 어른들은 불편하고 사촌들은 어색해 명절마다 힘들었다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도 핏줄인데 애들 교육을 잘못했나 싶더라”며 답답한 심경을 밝혔다.

일가친척이 모이는 명절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비단 이씨의 자녀들만은 아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친척이 불편하다는 글이 줄을 잇는다. 친척과 만나기 싫어 일부러 근무를 하기도 한다.

친척이라고 친한 척 말았으면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페이스북 페이지 ‘사연을 읽어주는 여자’에 올라온 ‘추석 잔소리 메뉴판’.

지난해 말 2년간 준비 끝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취업한 신모(26·여) 씨는 추석 연휴에 친척들을 만나지 않을 방법을 고심 중이다. 신씨는 “사촌형제 중 혼자 여자라 그런지 어릴 때부터 친척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어릴 때야 좋았지만 중고교에 진학하자 그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명절 때 만나면 성적은 물론, 어느 대학에 가고 싶은지,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 등을 물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취업준비생 시절에는 친척 어른들의 관심이 극에 달했다. ‘언제 취업할래’라는 한탄부터 ‘차라리 시집을 가라’는 얘기까지 들어봤다”고 말했다.

신씨는 취업도 했으니 올해부터는 친척들의 잔소리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설 연휴 때 무너졌다. 이제는 신씨의 외모로 잔소리 방향이 바뀐 것. 그는 “취업준비를 하느라 살이 조금 쪘는데 고모가 보자마자 옆구리를 쿡 찌르며 ‘이것 봐라, 이렇게 살쪄서 시집은 어떻게 가려고 그래. 긴장 좀 해야겠다’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번 명절에는 어떤 핑곗거리를 대서라도 집에 가지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

친척 어른의 관심과 잔소리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례는 신씨 외에도 많다. 인터넷 취업 포털 ‘벼룩시장 구인구직’이 성인 남녀 7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3.6%가 ‘명절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명절에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으로는 ‘가족  ·  친척에게 잔소리를 들을 때’가 21.1%의 선택을 받아 1위를 기록했다. 3위인 ‘비슷한 또래인 친척과 나를 비교할 때’(17.1%)와 합산하면 응답자의 38.2%가 친척의 말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2위인 ‘음식을 준비하느라 쉴 틈이 없을 때’(20.1%)의 2배에 육박하는 수치다.

최근 SNS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비꼬아 ‘추석 잔소리 메뉴판’이 유행하기도 했다. 걱정이나 관심을 빙자한 잔소리를 하려면 돈을 주고 하라는 것.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입 등 성적 관련 질문은 5만 원, 외모 지적은 10만 원, 대학생이나 취업준비생에게 하는 ‘언제 취업할 거니’ 같은 질문은 20만 원으로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잔소리 가격도 올라간다.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추석을 맞아 일가친척이 모여 차례를 지내는 모습.[뉴시스]



애들 등쌀에 말도 못 붙일 지경

일부 취업준비생이나 대학생은 명절 연휴 잔소리를 피해 아르바이트 현장에 뛰어들기도 한다. 인터넷 아르바이트 포털 ‘알바몬’이 대학생 및 직장인 159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2%가 ‘추석 연휴 기간 아르바이트를 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물론 응답자 대다수는 추석 연휴의 높은 시급을 노린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김지윤(24·여) 씨는 “대학생활 내내 ‘어디에 취업할래’ 같은 질문을 명절 때마다 들었다. 졸업이 코앞인 이번 추석 연휴에는 친척 어른들의 질문 공세가 더할 것 같아 부모에게는 바쁘다고 말씀드리고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다. 죄송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연휴 기간 내내 친척들의 잔소리에 시달릴 바에야 일이라도 해 돈을 버는 게 나을 듯하다”고 말했다.

대입, 취직, 결혼 등에 대해 묻는 중·장년 세대는 그 나름 사연이 있다. 오랜만에 보는 조카에게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은데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어떻게 지내는지부터 묻게 된다는 것. 서울 금천구의 자영업자 최모(50) 씨는 지난 설 연휴 아들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다. 웬만하면 조카들에게 신상 관련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최씨는 억울했다. 그 나름 ‘명절 질문 에티켓’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각종 매체에서 조카들에게 질문을 삼가라고 해서 최대한 안 하려 했는데, 그러니 할 말이 없더라. 내 딴에는 신경 쓴다고 올해는 ‘수능 잘 봤니’라고 묻는 대신 ‘수험생활하느라 고생했다. 결과는 잘 나왔니’라는 식으로 표현을 다듬었다. 다른 조카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질문을 받은 조카들도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웃는 얼굴로 답하고 대화도 길게 이어져 나름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사촌들이 아빠의 질문에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다음부터는 신상에 관한 질문보다 같이 보고 있던 TV 프로그램 등으로 말문을 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해 섭섭했다”고 말했다.

일부 중·장년층은 이러한 세태가 불만스럽다. 경북 구미의 김모(56) 씨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데,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다. 조카는 대부분 오랜만에 만나도 인사를 꾸벅 한 뒤 휴대전화만 들여다본다. 답답한 마음에 질문을 피해 ‘대학 가기 어렵다는데 고생이 많다’는 식으로 얘기를 걸면 조카는 ‘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도로 대답하고 다시 입을 닫는다”고 했다.

그는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니 신상에 대해 묻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젊었을 때도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어른들이 지금 다니는 회사는 괜찮은지, 돈은 잘 벌고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지 등을 물었다. 우리 세대는 이 같은 질문을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가 예민한 건지, 명절만 되면 어른들 잔소리 때문에 고향에 가기 싫다는 얘기가 나온다. 직장에서도 꼰대 소리가 듣기 싫어 후배들 눈치 보느라 입을 잘 열지 않고 사는데, 명절에 찾은 고향에서도 어린 조카들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모처럼 명절을 맞아 친척들이 모였지만 자주 만나지 않아 서먹해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경우도 있다.


대면해도 데면데면

명절 친척들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은 사촌 등 또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주 못 만나는 만큼 서로에 대해 잘 모르고, 만나도 어색하다. 지난해 취업에 성공한 박모(28) 씨는 이 소식을 알리려고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가 할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다. 사촌형제의 연락처를 대부분 모르고 있었기 때문. 박씨의 취업소식에 할아버지는 크게 기뻐하며 박씨에게 용돈을 쥐어줬다. 박씨가 장손이고 사촌형제 중 처음으로 취직했으니 이 돈으로 사촌들을 모아 함께 밥이라도 한 끼 하라는 의도였다.

박씨는 기쁜 마음에 이 자리에서 사촌형제들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며 휴대전화를 들었지만 곧 당황했다. 사촌들의 전화번호가 대부분 바뀌어 있었던 것. 박씨는 “10년 전 전화번호를 교환한 후 딱히 사촌들과 연락할 일이 없어 전화번호가 바뀐지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장손이라는 녀석이 사촌형제들과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낸다며 많이 섭섭해했다”고 말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김현수(20) 씨는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인 광경을 생각하면 걱정부터 앞선다. 사촌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불편하기 때문. 어린 시절에는 모여서 함께 놀던 사촌형제들이지만 중고교를 거치면서 자주 얼굴을 못 보게 되자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김씨는 “어른들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같이 좀 놀다 오라고 용돈도 주는데, 막상 나가면 갈 곳이 없어 PC방에 앉아 각자 게임만 하다 온다”고 밝혔다.

직장인 송모(28) 씨도 또래 친척과 어색한 사이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이 불편하다. 송씨는 “이제 다들 성인이니 직장 얘기를 하면서 술이라도 한잔하다 보면 어린 시절처럼 다시 친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통해 서로 벌이를 뻔히 아는데 누구 하나 마음 다칠까 싶어 직장 얘기를 꺼내기 어렵다. 지난 설 연휴에 용기를 내 사촌들에게 직장 얘기를 꺼내볼까 했지만, 3년째 취업준비를 하는 사촌이 방구석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나도 1박 2일간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다 집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젊은 층이 나이를 막론하고 친척을 어려워하는 것을 당연한 현상이라고 봤다. 그는 “친족이 같은 동네에 살면서 경제 · 생활 공동체였던 과거와 달리, 핵가족화로 떨어져 살게 됐다. 만날 이유가 없으니 명절이나 가족 행사 등을 이유로 1년에 3~4번 얼굴을 보는 게 전부다. 자주 만나는 친척이 아니라면 어색한 것이 당연하다”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명절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면 평소에도 친척과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취미활동을 함께 해 공감할 만한 소재가 있거나, 비슷한 업종에 종사해 정보 교환 차원에서 자주 만나고 연락하다 보면 어색함을 줄일 수 있다는 것.

친척, 가장 친한 친구 될 수 있어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단어 ‘친척’

주말농장이나 스포츠 관람 등 취미를 공유하면 친척들과 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다. [동아일보, 스포츠 동아]

경기 성남시의 정모(24·여) 씨는 친척과 모이는 자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몇 번 이사는 했지만 지금 동네에 일가친척이 모여 살기 때문.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얼굴을 보니 사촌은 친한 친구처럼 편하고, 친척 어른들도 친숙하다. 정씨는 “명절에 친척 어른들이 대입이나 취업, 결혼 문제로 질문을 빙자한 잔소리를 한다는데, 나는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는 집은 달라도 자주 부대끼다 보니 (친척 어른들이) 내가 고민하는 부분을 대부분 알고 있다. 굳이 들춰내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 묻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씨에게 그렇다면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이면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한 동네에 살다 보니 이야깃거리가 많다. 지난 설 연휴에는 아버지가 운동을 해야 하는데 괜찮은 피트니스클럽이 어디냐고 묻자 각자 다녀본 인근 피트니스클럽의 장단점을 30분가량 늘어놓기도 했다”고 밝혔다.

지리적으로 멀어도 공통 관심사 때문에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사례도 있다. 부산에 사는 대학생 임모(26) 씨는 일가친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카카오톡 단체방(단톡방)이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이 단톡방에서 열띤 대화를 이어간다. 친척들은 각각 서울과 부산, 경기도에 흩어져 살지만 본가인 부산을 연고지로 둔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라 야구경기 중계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 임씨는 “굳이 중계를 보지 않고 단톡방만 확인해도 경기 내용을 알 수 있다. 명절에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도 야구라는 공통 관심사 덕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경기 안양시의 윤모(43) 씨는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일가친척이 함께 일구는 가족농장을 찾는다. 윤씨는 “아버지가 은퇴 후 소일거리로 밭을 일구고 싶다고 해 형제들과 돈을 모아 경기도 인근에 작은 밭을 구한 뒤 가족농장을 마련했다. 평소에는 아버지가 농장을 돌보고, 가끔씩 형제들이 아버지를 만나고 농사일도 도울 겸 농장을 찾기로 했다. 아이들이 농장에 놀러가는 것을 의외로 좋아해 거의 매주 방문한다. 자연히 아이들도 사촌과 친하게 지내게 됐다. 농장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생겨 명절 때도 농장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는 편이다. 이번 추석 때는 내년에 가지나 오이도 키워보자고 형에게 건의해볼 생각”이라며 웃었다.


입력 2017-09-29 10:14:47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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