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포인트 시사 레슨

5·18은 기억하면서 6·4는 왜 모르쇠

30주년 맞은 ‘톈안먼 사태’에 대한 한국의 이상한 침묵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06-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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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6월 4일 인민해방군에 맞서 싸우면서 불길이 치솟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 베이징 시민(위)과 톈안먼 광장 시위대 앞에서 깃발을 흔드는 여대생. [Robert Croma]

    1989년 6월 4일 인민해방군에 맞서 싸우면서 불길이 치솟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 베이징 시민(위)과 톈안먼 광장 시위대 앞에서 깃발을 흔드는 여대생. [Robert Croma]

    중국은 올해 의미 깊은 2가지 기념일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맞고 있다. 5·4운동 100주년과 6·4 톈안먼(天安門) 사건 30주년이다. 

    두 사건은 한국의 3·1운동과 5·18민주화운동을 빼닮았다. 1919년 발발한 5·4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민족자결주의 영향 아래 발생한 항일민족주의 운동이라면, 1989년 일어난 6·4 톈안먼 사건은 1980년대 독재에 맞선 민주화투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00주년 맞은 3·1과 5·4의 온도차

    톈안먼 사건 때 광장에 세워진 높이 8m의 ‘자유의 여신’ 석고조각상.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톈안먼 사건 때 광장에 세워진 높이 8m의 ‘자유의 여신’ 석고조각상. [Institute for Advanced Study]

    한국에선 올해 100주년 맞은 3·1운동뿐 아니라 39주년을 맞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기념사까지 낭독했다. 지난 정부에선 한동안 불리지 못했던 ‘님을 위한 행진곡’도 3년째 제창됐다. 

    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4월 3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5·4운동 100주년 대회에서는 1시간 넘게 연설했다. 그는 “5·4운동은 민족이 위기를 맞았을 때 청년 지식인이 선봉에 서고,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이뤄낸 반제국·반봉건주의의 위대한 애국 혁명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정작 ‘항일’이나 ‘일본’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동안 소원했다 최근 밀월단계로 접어든 중·일 관계를 감안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미래지향적’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친일잔재청산’을 강조했던 문 대통령의 연설과 큰 차이를 드러냈다. 문 대통령 연설에서는 ‘친일’(6회), ‘일제’(4회), ‘일본’(4회)이란 단어가 모두 14차례 등장했다. 



    그 대신 시 주석은 “당과 인민이 하나로 단결해 민족 부흥의 길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5·4운동의 정신을 발현하는 것”이라며 ‘애국’이라는 단어를 19차례나 언급했다. 그는 “역사는 예부터 애국주의가 중화민족의 피에 흐르고 있고, 중국 인민과 중화민족이 민족 독립과 민족 존엄을 지키도록 하는 강력한 정신력임을 보여줬다”며 “현대 중국에서 애국주의 본질은 국가와 당,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사랑을 고도로 통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5·4운동을 주도한 베이징대 학생들이 70년 뒤 공산당 일당독재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민주화를 요구한 톈안먼 사건의 재점화를 차단하려는 견강부회의 논리였다. 이는 ‘민주’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등장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국가위령제 5·18 vs 국가적 금기 6·4

    3·1운동과 5·4운동 100주년을 맞은 양국의 이런 온도차는 양국 국민의 분출하는 민주화 요구를 탱크, 기관총까지 동원해 유혈 진압한 5·18과 6·4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앞에서 언급했듯 한국에서 5·18은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격상된 것을 넘어 이제 국가 차원의 위령제 날이 됐고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그 제사장을 맡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6·4는 중국에서 여전히 ‘사건’ 내지 ‘사태’라는 사슬에 묶여 있을뿐더러,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저주받은 날’이다. 

    중국은 만리장성에 빗대 ‘만리방화벽’으로 불리는 강력한 인터넷 통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30주년을 맞은 올해 초부터 6·4 관련 단어나 인물명이 등장하는 게시물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이를 게시한 인사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하고 있다. 5월 28일 ‘AAC예술중국’ 시상식에서 ‘올해의 청년 예술가’상을 받은 미술가 장웨(34)가 수상소감을 얘기하며 톈안먼 광장에 대해 언급했다 온라인 봉쇄를 당했다고 홍콩 ‘밍보’가 29일 보도했다. 장웨가 “톈안먼 시위 30주년을 맞아 톈안먼 광장과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상을 받으니 부끄럽다”고 소감을 밝히자 중국 당국이 관련 뉴스를 삭제하고 장웨가 이전에 쓴 글이나 발언에 대한 접근까지 차단했다는 것이다. 

    4월 23일부터는 세계적인 온라인 백과사전 사이트 위키피디아의 모든 언어판과 중국 내 접속을 전면 차단했다고 영국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어떤 식으로든 톈안먼 사건 관련 정보가 중국 내로 유입되는 것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6·4는 5·18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기간도 길었던 민주화운동이다. 광주항쟁의 기간이 1980년 5월 18~27일로 10일이었다면 톈안먼항쟁은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심장병으로 급서하면서 시작돼 6월 4일 인민해방군에 의해 무력진압될 때까지 51일간 계속됐다. 시위 참여자 수 역시 5·18이 하루 최대 20만 명이었다면 6·4는 하루 최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무력진압을 위해 투입된 병력 수도 다르다. 5·18의 경우 5월 27일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에 투입된 병력이 제7공수여단과 육군 제31사단 병력을 합쳐 2만5000명가량이었다면 6·4의 경우 육군 제27군, 제38군, 제39군, 제41군, 제54군, 제65군과 공군 제15공수부대까지 합쳐 10만 명 안팎의 병력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 많은 병력이 탱크를 앞세워 기관총 사격까지 가했으니 민간인 피해 규모도 다를 수밖에 없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와 5·18기념재단 등 5·18 관련 4개 단체가 2005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5·18 민간인 사망자는 606명으로 추정된다. 항쟁 당시 사망자 165명, 행방불명자(암매장 추정) 65명, 부상 후 사망 추정자 376명이다. 6·4의 사망자는 1991년 중국 정부 발표로는 875명이지만 민간과 해외 추정치는 최소 4000명(중국 인권단체)에서 최대 1만454명(미국 백악관 기밀보고서)에 이른다. 

    5·18의 아픔을 겪은 한국으로선 이런 상황이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다. 하지만 대형서점의 중국사 코너에 가보면 톈안먼 사건을 다룬 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통사를 다룬 책들은 청나라 몰락까지 다룬 게 대부분이고, 근현대사를 다룬 책은 주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영웅적 면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국공산당에 비판적 책이라 해도 보통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만 다룰 뿐 톈안먼 사건은 비켜가기 일쑤다.

    덩샤오핑과 2차례의 톈안먼 사건

    톈안먼 사건 당시 단식투쟁 중이던 한 대학생이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덩샤오핑, 자오쯔양 (왼쪽부터) [Magnum Photos, 위키피디아]

    톈안먼 사건 당시 단식투쟁 중이던 한 대학생이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덩샤오핑, 자오쯔양 (왼쪽부터) [Magnum Photos, 위키피디아]

    이를 다룬 책은 3권 정도밖에 찾을 수 없었다.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톈안먼 사건’(2016)과 조관희 상명대 교수의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강의’(2013), 그리고 톈안먼 사건 당시 학생지도자였던 왕단이 집필한 ‘왕단의 중국 현대사’(2013) 번역서 정도다. 

    이들 책을 읽어보면 톈안먼 사건은 덩샤오핑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사실 6·4는 ‘2차 톈안먼 사건’이다. 1차 톈안먼 사건은 1976년 4월 5일 발생해 4·5사건으로 불린다. 중국 인민의 사랑을 받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1월 숨진 뒤 그 추모 분위기가 계속되자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이 이에 찬물을 끼얹는 행태를 보였다. 이에 분노한 베이징 시민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마오쩌둥 주석은 경찰력을 동원해 폭력으로 진압한 뒤 그 배후에 덩샤오핑 부주석이 있다며 그의 당내외 직무를 박탈했다. 하지만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숨지자 4·5의 주동자로 몰렸던 덩샤오핑이 민심을 얻으며 집권하게 됐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발생한 6·4에 대해 마오쩌둥 뺨치는 강경진압책을 택했다. 당시 학생시위를 ‘공산당의 지도를 부정하는 동란’이라고 비판해 사태를 악화시킨 ‘런민일보’ 4월 26일자 사설은 전날 “20만 명이 죽는다 해도 국민을 통제하고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이다”라는 덩의 연설에 추동된 것임이 밝혀졌다. 덩은 결국 1차 때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과 그를 지지한 학생, 민중을 희생시켰다. 톈안먼으로 부활의 날개를 달았던 덩이 13년 뒤 톈안먼을 배신한 셈이다. 

    그럼 6·4에 대한 한국의 무관심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 공산혁명가들을 영웅시해온 한국 진보층이 ‘미국 다음은 중국’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중국공산당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은 아닐까. 5·18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문재인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이 잇따라 친중 발언을 내놓으면서 정작 톈안먼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반면 중국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한국 보수층 역시 이를 드러내고 비판하자니 과거 5·18에 대해 침묵해왔던 자신들의 발등을 찍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듯하다. 5·18이 ‘북한 특수군 공작의 산물’이라는 토론회까지 주최한 국회의원들에게 경징계를 내린 제1야당이 ‘중국의 5·18’까지 비판할 여력이 있을까. 

    정부 차원에서 6·4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외교적 부담이 따르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민간 차원에서마저 이를 외면하는 것은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짓이다. 한국과 중국은 100년 전 3·1운동과 5·4운동을 공유했고 1980년대 5·18과 6·4로 동병상련의 경험을 나눈 특별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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