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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페이스가 도대체 뭐길래?

美 버지니아주를 뒤흔들고, 패션브랜드 구찌 사과케 하고, 그래미상까지 안겨주다

블랙페이스가 도대체 뭐길래?

구찌가 이번 겨울 신상품으로 내놓았다가 판매를 중단한 터틀넥 스웨터. [구찌 홈페이지]

구찌가 이번 겨울 신상품으로 내놓았다가 판매를 중단한 터틀넥 스웨터. [구찌 홈페이지]

미국에선 2월을 ‘블랙페이스의 달’로 부른다. 베이비페이스도 아니고, 노스페이스도 아니고 블랙페이스라니. 거기엔 유명 브랜드 구찌도 등장하다 보니 무슨 상표명인가 하는 사람도 있다. 

블랙페이스는 비흑인이 흑인 얼굴을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분장한 것을 말한다. 석탄이나 구두약으로 얼굴을 까맣게 칠하고, 입술을 두껍고 붉게 과장되게 칠한 뒤 짐승 동작을 흉내 내며 어릿광대짓을 하는 것을 뜻한다.


‘점프 짐 크로’부터 ‘시커먼스’까지

1900년 백인 배우가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미국 민스트럴쇼 홍보 포스터. [위키피디아]

1900년 백인 배우가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미국 민스트럴쇼 홍보 포스터. [위키피디아]

사실 용어가 낯설어 그렇지, 한국에서도 익숙한 분장이다.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KBS 2TV ‘쇼 비디오 자키’에서 개그맨 장두석과 이봉원이 흑인 분장을 하고 웃음을 유발하던 ‘시커먼스’가 대표적이다. 당시만 해도 거기에 숨어 있는 인종차별성을 자각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만 그렇게 무심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 BBC에서도 1978년까지 ‘The Black and White Minstrel Show’라는 이름으로 백인들이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코미디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그 시작이 1958년부터였다고 하니 20년이나 방영된 장수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 제목에 들어간 ‘민스트럴쇼(Minstrel Show)’는 1863년까지 흑인노예제를 유지했던 미국에서 시작됐다. 백인들이 블랙페이스 분장으로 노예 흉내를 내며 춤과 노래를 곁들인 상황극을 펼친 것이다. 1830년대 인기를 얻기 시작해 19세기 말까지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19세기 말 뮤지컬의 전신 중 하나인 보드빌쇼에 밀려 무대에서 사라졌고, 1910년대가 되면서 프로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 고등학교 학예회나 지방공연에서는 단골 공연물로 살아남았다. 



민스트럴은 본디 중세 유럽의 음유시인을 뜻했는데, 후대에 오면서 음악을 곁들인 익살극과 광대극을 의미하게 됐다. 이게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흑인광대극으로 바뀐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민스트럴쇼를 탄생시킨 사람이 영국에서 이민 간 코미디언이었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이민 온 코미디언 토머스 다트머스 라이스가 1828년 블랙페이스 분장을 하고 춤추며 부른 ‘점프 짐 크로(Jump Jim Crow)’라는 노래가 그 기원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짐 크로에 대해서는 흑인노예 사이에 전승되던 노래 속 괴짜 주인공이라는 주장과 라이스가 직접 만났던 다리를 절룩거리고 어깨가 비틀어진 실존 흑인이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분명한 점은 이 노래가 유행하면서 우스꽝스러운 흑인 분장으로 춤추며 이 노래를 부르던 것이 농촌 출신 흑인 짐 크로와 도시 출신 흑인 집 쿤(Zip Coon)의 만담 형식 막간극을 거쳐 독립된 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흑백분리법 명칭의 기원

19세기 블랙페이스 유행을 불러온 흑인 캐릭터 짐 크로(왼쪽)와 ‘This is America’ 뮤직비디오에서 그 몸짓을 흉내 내며 총질을 하고 있는 가수 차일디시 감비노. [위키피디아]

19세기 블랙페이스 유행을 불러온 흑인 캐릭터 짐 크로(왼쪽)와 ‘This is America’ 뮤직비디오에서 그 몸짓을 흉내 내며 총질을 하고 있는 가수 차일디시 감비노. [위키피디아]

물론 1828년 전에도 흑인 얼굴을 희화화하는 유희는 있었다. 1810년대 이미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광대들이 미국 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공식 쇼의 형태로 발전된 것은 짐 크로라는 구체적 캐릭터의 탄생에서 비롯했다. 

이 캐릭터는 민스트럴쇼만 탄생시킨 것이 아니다. 아둔하지만 동물적 몸짓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짐 크로는 이후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전형(스테레오타이프)으로 굳어졌다. 1950년대 이후 미국 사회에서 금기어가 된 니그로(negro)의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이로 인해 1896년 연방법원 판결을 바탕으로 남부 주 의회에서 만들어진 흑백분리법을 통틀어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이라 부르게 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다. 짐 크로 법은 1964년 흑백분리를 불법화한 민권법이 통과될 때까지 흑백 간 분리와 차별을 가져온 법적 근거로 악용됐다. 

이런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흑백차별=짐 크로=민스트럴쇼=블랙페이스’로 연결된다. 따라서 블랙페이스는 영국이나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흑인 전체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으로 간주되는 민감한 사항이다.


대학 졸업앨범에 흑인을 조롱하는 사진(왼쪽)을 실었음이 35년 만에 드러나 사퇴 위기에 몰린 랠프 노덤 미국 버지니아주 주지사. [The Virginian-Post, AP=뉴시스]

대학 졸업앨범에 흑인을 조롱하는 사진(왼쪽)을 실었음이 35년 만에 드러나 사퇴 위기에 몰린 랠프 노덤 미국 버지니아주 주지사. [The Virginian-Post, AP=뉴시스]

미국 민주당 소속인 랠프 노덤 버지니아주 주지사가 최근 거센 사퇴 논란에 휩싸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984년 이스턴버지니아의대 졸업앨범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노덤 주지사의 사진들이 2월 1일 공개됐다. 그중 하나는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악명 높은 흰색 복면을 쓴 사람 곁에 블랙페이스 분장의 인물이 서 있었다. 둘 중 한 명이 노덤 주지사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노덤 주지사는 바로 “과거의 내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며 공식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음 날인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신중히 살펴본 결과 사진 속 인물은 내가 아니다”라며 태도를 바꿨다. 다만 1984년 당시 흑인 팝스타 마이클 잭슨을 흉내 내는 텍사스의 한 댄스대회에 참가하며 얼굴을 검게 분장한 적이 있어 착각했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에 대학 파티에서 블랙페이스 분장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버지니아주 마크 헤링 검찰총장(왼쪽)과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저스틴 페어팩스 부지사. [AP=뉴시스]

1980년대에 대학 파티에서 블랙페이스 분장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버지니아주 마크 헤링 검찰총장(왼쪽)과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저스틴 페어팩스 부지사. [AP=뉴시스]

하지만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사람이 노덤 주지사가 아니더라도 KKK 단원 복장을 했을 개연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이클 잭슨 흉내를 내겠다면서 흑인 분장을 한 것 역시 블랙페이스 아니냐는 공세가 이어졌다. 여기에 2월 6일 버지니아주 서열 3위인 마크 헤링 검찰총장(주 법무장관)도 1980년대에 대학 파티에서 블랙페이스 분장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에 불을 지폈다. 서열 2위로 흑인인 저스틴 페어팩스 부지사는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어 사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다. 

이 와중에 유명 패션브랜드 구찌가 이번 겨울 신상품으로 내놓은 터틀넥 스웨터가 블랙페이스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라는 비판을 받게 됐다. 터틀넥의 목 부분을 눈 아래까지 덮을 때 입술이 노출되도록 했는데 입술 주변 스웨터 색깔이 빨간색이어서 마치 흑인의 두껍고 붉은 입술이 떠오른다는 것. 그러자 구찌는 2월 6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개당 890달러(약 100만 원)인 해당 제품의 판매를 중단했다. 

2월 10일 미국 그래미 어워드에서도 블랙페이스에 대한 비판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흑인 가수 차일디시 감비노가 부른 ‘This Is America’가 ‘올해의 노래’와 ‘올해의 레코드’ ‘베스트 뮤직비디오’ ‘베스트 랩 퍼포먼스’까지 4개상을 휩쓸었다. 미국 내 흑백차별을 우회적 가사와 충격적 장면으로 비판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 직접 출연한 감비노는 엉덩이를 쭉 뺀 채 한쪽 다리를 굽힌 독특한 포즈로 사람들에게 총질을 해댄다. 바로 백인들이 만들어낸 짐 크로의 몸동작을 역풍자한 것이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그 노래 가사 중에는 ‘나 구찌 입었다(I’m on Gucci)’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주간동아 2019.02.15 1176호 (p8~10)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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