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9·19 군사합의 놓고 두 쪽 난 예비역

향군, 정부 정책 지지·이재수 자살에 침묵… 불만 높아져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18-12-17 11: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1월 21일 ‘안보를 걱정하는 예비역 장성 모임’ 주최로 열린 9·19 군사합의 국민 대토론회. [뉴스1]

    11월 21일 ‘안보를 걱정하는 예비역 장성 모임’ 주최로 열린 9·19 군사합의 국민 대토론회. [뉴스1]

    북한의 도발이 있어야 ‘이상’이 발생하는 실(實)전선에선 ‘아직’ 이상 징후가 없지만, 정신적·심리적으로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안보 의식 전선에선 큰 이상이 발생했다.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온 9·19 군사합의를 놓고 ‘1중대’인 현역과 ‘2중대’인 예비역 사이에 ‘총질’이 오가더니, 급기야 2중대의 ‘본부소대’ 격인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와 ‘야전소대’ 격인 예비역 모임이 서로 ‘말폭탄’을 날리는 내전을 벌인 것이다.

    내전에 들어간 예비역과 현역

    10월 23일 김진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왼쪽)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만나 9·19 군사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 · 재향군인회]

    10월 23일 김진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왼쪽)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만나 9·19 군사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사진 제공 · 재향군인회]

    1중대와 2중대의 다툼부터 살펴보자. 11월 21일 전직 국방부 장관 12명 등 415명의 예비역 장성으로 구성된 ‘안보를 걱정하는 예비역 장성 모임’(안걱장)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9·19 군사합의 국민 대토론회를 열고 문재인 정부의 안보정책 전면 재검토와 보완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안걱장은 박휘락, 김태우, 송대성, 신원식 등 4인이 두 달여 만에 만들었다. 

    안걱장을 이끄는 한 인사는 “국방부가 9·19 군사합의를 제대로 검토하지 못한 것으로 안다. 청와대가 실무 부서의 의견을 듣지 않고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안을 결정한 것이다. 북한은 믿으면서 안보를 책임진 우리 군은 믿지 못하겠다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바른말을 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충성은 나라에 하는 것이지 정권에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그는 9·19 군사합의에 동의하고 물러난 송영무 전 국방부 장관과 이 합의를 추인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을 함께 비판했다. 

    현 상황은 노무현 정부 시절과 비슷하다. 그러나 당시 1중대와 2중대는 ‘내통’을 했다. 국방부는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겉으로는 ‘예’를 했지만, 속으로는 향군을 중심으로 한 예비역의 안보 강화 요구를 지지했다. 당시 국방부의 암묵적 지지 하에 향군은 서울광장에서 시위성 안보 행사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안보투쟁에 나섰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향군법)에는 향군의 정치 활동을 금한다는 조항이 있다. 당시 향군은 시위성 행사가 정치 활동이라는 비판에 대해 “정치 활동이 아니라 여야가 없는 안보 활동”이라고 반박했다. 그 시절 향군을 이끈 이는 박세직, 박세환이었다. 

    현 김진호 향군회장은 그때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9월 18일 김 회장 등 향군 간부들은 이른 시각 정부서울청사와 서울공항 일대에 모여 평양으로 떠나는 문재인 대통령 일행을 환송했다. 10월 23일 김 회장은 국방부에서 정경두 장관을 만나 약간의 우려는 전달했지만,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완충지역으로 설정해 우발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의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빚이 많은 향군, 정부 입김 개입 가능성

    11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는 국방부가 예비역들에게 9·19 군사합의에 대해 설명하는 간담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9·19 군사합의를 지지해달라”는 인사말을 했고, 조용근 국방부 대북정책과장(육군 대령)은 “이 합의가 우리 군의 대비태세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충암 유격군총연합회장(예비역 대령)과 김병관 육사 총동창회장(예비역 대장) 등은 “정부가 북한 비핵화 관련 정책을 너무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향군 관계자는 “9·19 군사합의는 유엔사와 한미연합사도 동의한 사항인데, 왜 예비역이 동의를 못 해주는가. 현역과 예비역이 분리되고 한미동맹을 못 믿겠다는 것은 또 다른 분열”이라고 일축했다. 이 지경이 되니 2중대의 내전은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안보 시위를 이어간 향군에 반대했던 표모 씨 등이 ‘평화재향군인회’(평군)를 만들었는데, 그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한 학군 2기 출신이다. 그의 대학 1년 선배인 박세환 전 향군회장은 숱한 ‘학군 출신 최초’를 기록하며 2군사령관까지 올라갔다. 이 때문에 그는 박 전 회장의 뒤를 밟아야 했는데, 마지막에는 박 전 회장이 하지 못한 ‘학군 출신 최초’ 합참의장이 되고, 이후 향군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박 전 회장은 향군 재정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국방부와 보수 세력을 대표해 많은 안보 시위를 벌였다. 2년 전 향군회장 선거 때 박 전 회장은 부산대 학군 출신인 이모 후보를 밀었다. 박 전 회장은 거동을 못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지만 안걱장에 동참했다. 

    장교 출신으로 한정할 경우 가장 많은 예비역을 배출한 조직은 학군이고, 다음이 3사다. 지난 향군회장 선거에서는 3사 출신인 신상태 씨가 1차 투표에서 1위를 했으나, 2차 투표에서 김 회장에게 역전패했다. 

    일각에선 향군이 과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 실패 등으로 빚을 많이 졌고, 부정선거 시비에도 휘말린 적이 있어 정부가 수사에 나서면 초토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부의 의중을 정면으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향군 내부에서는 김 회장의 이러한 선택을 이해해줄까. 지근거리에서 김 회장을 대하고 있는 한 인사는 “그 나이에 소신을 지켜야지, 안보에 큰 영향을 주는 일에 왜 소극적인가”라고 말했다. 

    향군은 예비역인 이재수 전 국군기무사령관의 자살에도 침묵하고 있다. 2중대 본부소대와 야전소대 간 내전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향군의 모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향군회장의 임기는 짧지만 예비역은 길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