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한국, 노벨상은 글렀다

日 과학자 올해 생리의학상 등 지금까지 24명 받았지만 한국은 못 받는 이유

  • 입력2018-10-15 11:3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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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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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쯤 전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의 과학자 여럿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시아 과학자의 목소리를 한자리에 모으는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인터뷰한 과학자 중에는 200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스카와 도시히데 같은 원로 과학자는 물론, 이제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서 경력을 시작한 20대 과학자도 있었다. 특히 일본 과학자 10명이 포함돼 있었다. 그들과 짧게는 두세 시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인터뷰하다 보니 흥미로운 공통점이 몇 가지 보였다. 예를 들어 60, 70대 이상인 원로 과학자는 너나없이 사진 찍기나 클래식 음악 연주 같은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들어보니 어렸을 때부터 취미였단다. 사정은 이랬다.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현 일본 과학의 초석을 닦은 원로 과학자 상당수는 이른바 명문가 자제였다. 더구나 그들의 가족이나 지인 중에는 과학 엘리트가 많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이 강대국으로 굴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과학 엘리트 네트워크를 통해 다음 세대 과학자가 성장했다. 이들이 패전 후 일본 기초 과학을 재건한 것이다.

    첫 번째 노벨상도 일본 과학자가 받을 뻔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이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에게 돌아가면서 다시 한 번 일본 기초 과학의 힘에 세상이 놀라고 있다. 1949년 유카와 히데키가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래 (일본계를 포함하면) 노벨상만 24명이 수상했다. 2015년에는 노벨물리학상(가지타 다카아키)과 생리의학상(오무라 사토시)이 동시에 일본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10년 전 일본 과학자 인터뷰를 복기해보면 일본이 이렇게 잇달아 노벨상을 받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먼저 일본은 이미 100년 전부터 기초 과학에 한해서는 전 세계 네트워크와 연결돼 있었다. 201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오무라 사토시가 소속된 기타사토대가 그 증거다. 

    기타사토대의 이름은 일본 생물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에서 따온 것이다. 기타사토는 1885년 프랑스 루이 파스퇴르와 함께 현대 세균학의 기초를 닦던 독일 하인리히 코흐의 제자로 들어갔다. 기타사토는 그 실험실에서 1889년 파상풍균을 최초로 배양하고, 동료 에밀 폰 베링과 함께 전염병에 걸린 동물의 혈청을 이용한 예방법을 개발했다. 베링은 디프테리아를 예방하는 혈청 요법을 개발한 공으로 1901년 첫 번째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연구 성과만 놓고 보면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일을 했던 기타사토도 첫 번째 노벨생리의학상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가 유럽인이었다면 베링과 함께 공동수상자로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이렇듯 일본 과학자는 첫 번째 노벨상의 유력 후보이기도 했다. 



    기타사토는 1892년 일본으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2015년 오무라 사토시 기타사토대 교수는 기생충 치료약 ‘이버멕틴’을 개발해 인류의 고통을 덜어준 공으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오무라의 연구는 기타사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100년 이상의 연구 역량이 축적된 결과다. 

    이뿐 아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22년 일본으로 가던 배에서 자신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서구와는 독립적으로 연구 역량을 축적하던 일본 물리학자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일본 물리학은 앞에서 언급한 194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에서부터 2015년 수상자 가지타 다카아키까지 이어진다.

    유행 좇는 한국 과학자, 이유는?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의대 명예교수. [동아DB]

    2018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의대 명예교수. [동아DB]

    100년 이상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해온 기초 과학의 두꺼운 토양 외에도 일본 과학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일본 과학자는 연구 주제를 쉽게 바꾸지 않는다. 예를 들어 40년 전 과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할 때 자신이 집중하던 연구 주제가 있으면 끈질기게 그것만 파고드는 풍토가 있다. 

    내가 인터뷰했던 일본 과학자 10명은 예외 없이 20대 때 자신을 사로잡은 주제를 계속해서 연구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이 덧붙어 연구가 확장되는 한이 있어도 유행에 따라 이 주제, 저 주제로 이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국 과학계는 사정이 다르다. 

    이 문제를 놓고 40대 후반의 한 국내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20대 때 국제학회에서 만난 일본 과학자가 10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똑같은 연구 주제를 잡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고백했다. 

    “왜 새로운 성과도 안 나오는 낡은 주제를 계속 연구하느냐고 물으니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라고 답하더군요.” 

    핵심이 바로 이 답변에 들어 있다. 바로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묵묵히 한 가지 연구 주제만 파고든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청색 LED(발광다이오드) 개발에 기여한 공으로 2014년 노벨물리학상을 제자(아마노 히로시)와 공동수상한 아카사키 이사무는 이렇게 말했다. 그도 40년간 똑같은 연구에 매달렸다. 

    “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해서 하다 보니 어쩌다 노벨상까지 받게 됐습니다.” 

    2008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시모무라 오사무는 어떤가.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녹색형광단백질(GFP)’ 연구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 녹색형광단백질의 원천은 바닷속에서 빛나는 해파리다. 시모무라는 1960년부터 50년 가까이 해파리 같은 발광 생물의 원리를 해명하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해파리 외길 인생 50년에 노벨상이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일본 과학자가 수십 년 동안 한 가지 연구 주제에 몰두하는 일은 일본 특유의 ‘장인’ 전통과도 맞닿아 있으리라.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이렇게 뚝심 있는 기초 과학 연구가 가능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다. 

    한국은 어떤가. 2016년 3월 알파고가 이세돌 프로바둑기사 9단을 이기는 모습을 보자마자 인공지능(AI) 광풍이 불었다. 또 ‘적폐의 여왕’으로 규정돼 감방에 갇혀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족보도 없는 용어를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핵심으로 내세운 것도 이때부터다. 그런데 적폐 대통령을 자리에서 내리고 뽑아놓은 현 대통령도 과학기술 정책에서는 똑같은 말을 되뇐다. 

    장담컨대 ‘4차 산업혁명’ 같은 뜬구름 잡는 식의 주문으로는 결코 새로운 먹을거리를 만들어낼 수 없고, 노벨상도 언감생심이다. 도대체 누가 대통령을 홀리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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