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도시 전체가 무지개로 물들다

샌프란시스코 ‘2018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 관람기

  • 입력2018-07-10 10: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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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는 ‘2018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뉴시스=AP]

    6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는 ‘2018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뉴시스=AP]

    자유의 여신상, 할리우드 사인, 그랜드캐니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금문교…. 

    ‘미국’ 하면 떠오르는 랜드마크는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금문교(골든게이트 브리지)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6월 말 기자는 미국 서부를 방문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비롯해 굴곡진 언덕을 오가는 케이블카, 구불구불한 꽃길로 여러 영화에 등장한 바 있는 롬바드 스트리트, ‘악마의 섬’으로 불리던 앨커트래즈, 맛집이 즐비한 피어39 등을 둘러봤다.

    전날부터 축제 열기 달아올라

    무지개 조명으로 환한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왼쪽).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코스인 부두 ‘피어39’ 입구에도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다. [정혜연 기자]

    무지개 조명으로 환한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왼쪽). 관광객들의 필수 여행코스인 부두 ‘피어39’ 입구에도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다. [정혜연 기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6월 23일 토요일, 2층 관광버스인 ‘빅버스’를 타고 도심을 도는 내내 곳곳에 내걸린 무지개 깃발이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을 최초로 합법화한 도시인 데다, 동성애자가 모여 사는 동네인 ‘카스트로 거리’도 있는 만큼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그들을 지지하고 이해한다는 뜻으로 동성애자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내걸어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도시 야경을 보려고 들른 힐튼 샌프란시스코 유니언스퀘어 호텔의 46층 라운지바 ‘시티스케이프’에서 생각이 바뀌었다. 낮에 본 시청 건물은 무지개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고, 무지개 조명을 비춘 다른 빌딩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종업원에게 시청 건물에 무지개 조명을 비추는 이유를 묻자 “내일이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LGBT란 L(레즈비언 : 여성 동성애자), G(게이 : 남성 동성애자), B(바이섹슈얼 : 양성애자), T(트랜스젠더 : 성전환 여성 혹은 남성)를 통칭하는 용어다.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높이고 성소수자를 알리기 위한 행진으로, 1970년 6월 스톤월 항쟁을 기념하는 첫 번째 퍼레이드가 뉴욕, 로스앤젤레스(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에서 열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전통 있는 축제다. 그제야 낮에 본 무지개 깃발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종업원은 “내일 하루 종일 퍼레이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아침 일찍 마켓 스트리트 쪽으로 가볼 것을 권했다. 



    이튿날 아침부터 도심 전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스마트폰 구글맵을 뒤지며 걷는 동안 무지개 티셔츠, 깃털 목도리, 타이즈 등 동성연애자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한껏 치장한 사람들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무지개 타이즈를 입히고 자신들은 무지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걸어가는 부모도 있었다. 다소 수위 높은 의상으로 눈길을 돌리게 하는 이도 있었다. 삼각팬티 차림에 가터벨트와 멜빵벨트로 포인트를 준 남성, 절묘하게 젖꼭지만 가린 티셔츠를 입은 여성, 아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신발만 신은 남성 등은 문화적 충격을 안겼다. 

    기묘한 의상들을 한참 구경하며 따라 걷다 보니 바리게이트로 통제한 거리가 나왔다. 전날 종업원이 말해준 마켓 스트리트였다. 퍼레이드는 대략 오전 10시부터 지하철 다섯 정거장 정도 거리만큼 4차선 도로를 통제하고 이어졌다. 쩌렁쩌렁한 음악 소리와 함께 느린 걸음으로 퍼레이드가 이어졌다. 일찌감치 퍼레이드 참여를 예약한 시민단체를 비롯해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알래스카항공, BMW 등의 직원들이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내로라하는 세계 유수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여한 것은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기업명을 알록달록하게 꾸민 퍼레이드 차량에 올라타거나 기업명이 적힌 패널, 풍선을 들고 행진하는 등 참여 방식도 다양했다. 한국에서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이 동성애자 퍼레이드에 스폰서로 참여했다면 뒷말이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해당 기업들은 올해뿐 아니라 꽤 오랜 기간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후원하고, 나아가 임직원들이 행렬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손 꼭 잡은 동성애 커플의 환한 미소

     화려한 의상, 무지개 색깔이 들어간 아이템 등으로 치장한 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눈길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한 의상을 입은 사람도 간간이 있었다. [뉴시스=AP]

    화려한 의상, 무지개 색깔이 들어간 아이템 등으로 치장한 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눈길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민망한 의상을 입은 사람도 간간이 있었다. [뉴시스=AP]

    시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제복을 입은 소방대원들이 소방차에 올라탄 채 행렬에 참가해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바퀴 달린 쓰레기통을 끌고 가다 중간 중간 춤사위를 선보이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명물인 케이블카를 행렬 중간에 지나가도록 배치한 것 또한 인상적이었다. 이는 마치 시 전체가 ‘샌프란시스코는 동성애자를 지지하고 존중한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오후 늦게까지 이어진 퍼레이드는 놀이동산의 캐릭터 퍼레이드를 연상케 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차량에 올라타 춤추는 모습은 예사였다. 마치 이날을 위해 1년을 준비한 것처럼 화려하게 여장을 한 남성, 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 반격을 가하는 듯 올 누드로 차량에 올라타 포즈를 취하는 여성, 브라질 삼바축제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의상의 여성 등 퍼레이드에 참가한 각 단체마다 저마다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들은 퍼레이드에 손 흔들며 화답하는 시민들을 향해 무지개 색 목걸이와 팔찌, 콘돔 등 각종 기념선물을 던지기도 했다. 시민들은 이를 받으려고 함성을 지르거나 열렬히 손을 흔드는 등 자연스레 축제 열기를 더했다. 

    반면 평범한 티셔츠 차림으로 퍼레이드에 참가한 이도 상당수였다. 동성끼리 손을 잡고 걸어가는 커플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들 커플은 용기를 내 고백하는 것처럼 보였고, 손 흔들어주는 시민은 이들의 관계와 성 정체성을 존중하는 듯했다. 커플들은 그러한 시민들을 향해 환한 미소로 화답하며 축제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이 광경에서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더 뭉클한 행렬은 이어 등장한 대가족 그룹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한 가족을 이뤄 걷는 평범한 행렬이었다. 나란히 선 백발의 노인 2명 가운데 1명은 ‘Grandma(할머니)’, 다른 1명은 ‘Grandfa(할아버지)’라고 적힌 팻말을 들었고, 그 곁으로 ‘Aunt’ ‘Uncle’ 등 각자 가족 구성원을 뜻하는 팻말을 하나씩 들고 걸어갔다. 대부분 혈연으로 맺어진 경우만 진짜 가족으로 여기지만 혈연, 성별, 피부색을 떠나 오로지 마음과 마음으로 모여도 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 

    퍼레이드가 진행되는 내내 중심 거리인 마켓 스트리트는 통제됐고, 퍼레이드 참여 이외 케이블카도 운행을 멈췄다. 이 때문에 관광을 온 이들은 이동수단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걷거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다. 어렵사리 잡은 ‘우버(공유택시)’의 운전기사도 “평소 같으면 10분 걸릴 거리인데 한참 돌아가야 하니 30분은 더 소요된다. 힘들지 않으면 걸어가는 게 낫다”고 조언했다. 도시 전체가 이날 하루만큼은 주인공 자리를 성소수자들에게 내준 듯했다.

    금문교보다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알래스카항공, BMW 등 세계 유수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정혜연 기자]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알래스카항공, BMW 등 세계 유수 기업들이 스폰서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정혜연 기자]

    운전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인구가 80만 명 남짓인데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모인 인파만 100만 명이 넘는다”고. 그는 또 “샌프란시스코에 주소지를 가진 시민은 대부분 집에 있다. 퍼레이드에는 세계 각국에서 날아온 관광객과 동성애자들이 참가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뉴욕, LA, 시카고 등 미국 내 다른 도시와 유럽, 남미, 아시아 등 세계 각국에서도 열린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의 LGBT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그 의미가 조금 남달라 보인다. 2015년 UCLA 윌리엄스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LGBT 인구는 미국인 전체의 15.4%인 12만6000명으로 가장 큰 규모다. 미국 전체의 LGBT 인구는 3.5%가량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시애틀 12.9%, 보스턴 12.3%, 워싱턴DC 8.1%, 시카고 5.7%, LA 5.6%, 뉴욕 4.5% 순이다. 

    이처럼 동성애자 거주 비율이 높아 샌프란시스코는 ‘게이들의 수도’로 불린다.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는 2004년 레즈비언 커플의 결혼을 합법으로 결정하면서 미국에서 최초로 동성혼을 인정한 도시로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한 현지인 설명에 의하면 “매년 이곳에서 혼인신고를 올리는 부부 가운데 2%가량이 동성커플”이라고 한다. 

    일정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멀리 금문교가 눈에 들어왔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기 전에는 금문교가 먼저 떠올랐지만 떠날 때는 수많은 무지개 깃발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았다. 공항에 내렸을 때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공항 외벽이 무지개 조명으로 물들어 있었기 때문. 운전기사는 “공항마다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별칭으로 붙이기 좋아하는 미국 풍토에 따라 샌프란시스코국제공항은 향후 ‘하비 밀크 공항’으로 바뀔 예정”이라고 했다.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한 하비 밀크는 미국에서 동성애자로서는 최초로 선출직 공직자에 이름을 올려 화제가 된 인물이다. ‘역시 샌프란시스코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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