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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는 누구를 보고 싶어 했을까

당신이 모르는 헬렌 켈러의 진면목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는 누구를 보고 싶어 했을까

젊은 날의 헬렌 켈러. [사진 제공·헬렌켈러재단]

젊은 날의 헬렌 켈러. [사진 제공·헬렌켈러재단]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6월 1일로 50주기를 맞는 헬렌 켈러(1880~1968)가 남긴 말이다. 1903년 발표된 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에 실려 있다. 여기서 사랑하는 이는 누구일까. 태어난 지 19개월 됐을 때 걸린 열병(뇌수막염 또는 성홍열로 추정)의 부작용으로 눈멀고 귀 멀고 말 못하는 3중장애를 짊어진 그를 극진히 돌봐준 부모일 수 있다. 아니면 일곱 살 때 가정교사가 돼 읽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 그를 미국 최초 시청각장애 여대생이자 사회운동가로 키워낸 앤 설리번(1866~1936) 선생일 수도 있다.


“기쁨의 작은 섬”

헬렌 켈러의 약혼을 다룬 유튜브 동영상에 소개된 피터 페이건의 사진(왼쪽)과 소설 ‘헬렌  켈러 인 러브’의 표지. [사진 제공·소담출판사]

헬렌 켈러의 약혼을 다룬 유튜브 동영상에 소개된 피터 페이건의 사진(왼쪽)과 소설 ‘헬렌 켈러 인 러브’의 표지. [사진 제공·소담출판사]

하지만 그 사랑하는 이가 남성일 수 있음을 대부분 사람은 떠올리지 못한다. 켈러는 중증 장애인인 데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세기 기적으로 불리는 켈러를 ‘성녀’처럼 취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이런 관점이 장애인에 대한 또 다른 차별을 재생산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켈러에겐 사랑하는 남성이 있었다. 그것도 일곱 살 연하의 멀쑥한 남자였다. 

도로시 허먼이 1998년 발표한 평전 ‘헬렌 켈러 A Life’(원제 ‘Helen Keller: A Life’)에는 1916년 서른여섯 살이던 켈러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소개됐다. 당시 켈러는 전미 순회강연 중이었다. 그런 켈러의 수발을 들어주던 설리번이 결핵으로 요양을 떠나게 됐다. 임시 대타로 스물아홉 살의 ‘보스턴헤럴드’ 신문기자였던 피터 페이건이 발탁됐다. 

페이건은 점자를 금세 익혀 신문과 책에 적힌 내용을 헬런의 손바닥에 적어주기 시작했고, 둘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켈러는 반평생 자신을 돌봐준 설리번의 건강이 악화되자 홀로 남겨질까 봐 두려움에 떨었는데, 페이건이 그 공백을 메워주며 부드럽게 다가섰던 것. 그때 상황을 켈러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사랑은 무력함과 고립감에 빠져 있던 나를 비춰주는 밝은 태양이었다. 사랑받는다는 달콤함이 나를 매혹시켰고 남자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페이건은 켈러에게 아름답다고 말해준 최초의 남성이자, 켈러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었다고 한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고, 두 사람의 혼인허가서가 법원에 제출된 것을 안 당시 보스턴 지역 신문에 둘의 약혼을 알리는 기사까지 났다. 

하지만 뒤늦게 이를 안 켈러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혔다. 설리번 역시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했다. 설리번의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1914년부터 남편과 별거 상태였다. 그 남편의 추천으로 채용된 페이건은 해고됐으며, 켈러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본가로 끌려갔다. 켈러의 형부는 페이건에게 총까지 겨누며 협박했고 둘이 나눈 편지는 불태워졌다. 이에 맞서 페이건과 켈러는 사랑의 도피를 결심했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나간 켈러가 하염없이 기다려도 페이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켈러는 그 사랑을 이렇게 기억했다. “어두운 물결에 둘러싸인 기쁨의 작은 섬.” 페이건의 사랑 역시 일말의 진실을 포함했을 개연성이 크다. 마지막 순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페이건은 평생 켈러의 사진을 보관했다고 그의 딸 앤 페이건 진저는 증언했다. 

이 사건을 토대로 둘의 사랑을 그린 소설도 2012년 발표됐다. 어린 시절부터 켈러를 흠모했던 여성작가 로지 술탄이 쓴 ‘헬렌 켈러 인 러브’로 2013년 국내에도 번역, 출간됐다. 2016년에는 ‘기쁨의 작은 섬’이란 희곡(크리스토퍼 카슨 작)도 발표됐다. 이들 작품은 장애인이 결혼하면 또 다른 장애아를 낳을 수 있다는 당대의 사회적 편견에 맞서 평범한 여성으로서 삶을 소망한 켈러를 사랑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켈러의 사랑이 철저히 묵살된 이유가 어디 있을까. 당대 편견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켈러를 ‘엄청난 장애를 극복한 기적의 소녀’나 ‘성인’으로 기억하려는 대중의 욕망도 작동했기 때문 아닐까. 

켈러의 전기나 위인전은 성인이 된 이후 켈러에 대한 내용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켈러는 단순한 장애인권운동가가 아니라 급진적 정치운동가였다. 그는 래드클리프대를 졸업하고 4년 뒤인 1908년 미국 사회당(SP)에 입당했다. 노예농장주였고 남북전쟁 때 남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둔 여성으로선 이례적 선택이었다. 

켈러는 이 선택이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강조하며 2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첫째는 카를 마르크스와 윌리엄 모리스 등 유명 사회주의 작가들의 책을 독파하고 그것에 공감해서였고, 둘째는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주의가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사랑 앞에 두려움 없었던 진취적 여인

켈러는 특히 자본주의의 맹목적 이윤 추구가 노동자를 장애 상태에 빠뜨리며 빈곤을 양산한다고 매섭게 비판했다. 1911년 발표한 ‘맹목의 사회적 원인’이라는 논문에선 “우리의 최악의 적은 무지와 빈곤, 상업화된 우리 사회의 무의식적인 잔혹함이다. 이들이야말로 우리를 눈멀게 하는 원인이며 어린이와 노동자의 시력을 망가뜨리고 인류의 건강을 해치는 적들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당연히 러시아혁명에 환호작약했으며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블라디미르) 레닌, (토머스) 에디슨, (찰리) 채플린”이라고 답했다. 이로 인해 1949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미국 내 공산당원 리스트를 작성할 때 공산당원인 적이 없던 그의 이름도 포함됐을 정도다. 

켈러의 이런 급진적 정치성향은 성인이 된 이후 68년간 일관됐지만, 특히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9년 전후 10년간 가장 강력히 표출됐다. 켈러가 페이건을 만난 1916년 역시 그런 급진성이 한창 꽃필 때였다. 켈러는 당시 언론과 인터뷰에서 “당신은 무엇을 위해 헌신하는가. 교육인가, 혁명인가”라는 질문에 “혁명”이라고 답했다. 또한 사회주의적 평화주의에 입각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페이건은 켈러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사회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였다.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켈러 전기학자들은 설명한다. 그런 페이건은 최후의 순간에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설리번이 둘의 결혼을 반대했던 이유처럼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의존해 살아야 하는 여성을 평생 돌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켈러의 가족과 설리번의 반대에 질려버려서일까.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소설과 희곡이 잇따라 발표된 이유도 거기 있다.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켈러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진취적 여성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희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보게 허락했다면 진정 보고 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점이다.




주간동아 2018.06.06 1141호 (p6~7)

  •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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