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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

긴장감을 머금은 ‘선’

군더더기 없는 강렬함으로 본질 표현에 탁월

긴장감을 머금은 ‘선’

긴장감을 머금은 ‘선’

몬드리안의 ‘나무’. 왼쪽부터 ‘ 붉은 나무’(1908), ‘회색나무’(1911), ‘꽃 핀 사과나무’(1912), ‘검은색과 흰색의 구성 10’(1915).

선물로 받은 한라봉 나무 화분이 제법 크다. 놔둘 장소가 마땅치 않아 그늘진 곳에 두고는 바쁜 일상에 치여 옮기지 못했다. 연두색이던 한라봉 두 덩어리가 노란색으로 익어가는 동안 나뭇잎들이 말라 떨어졌고 잎 사이에 가려져 있던 나뭇가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뭇가지의 선들은 거칠고 날카로운 직선이었다. 원래 한라봉 나무는 햇빛을 듬뿍 받으며 자라야 하는 식물인데 주인을 잘못 만나 이런 고생을 한다.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에서 쭈뼛쭈뼛 모습을 드러낸 직선들이 유난히 까칠하다.

한라봉 나뭇가지의 선이 드러나는 모습에서 화가 피터르 몬드리안(Pieter Mondrian)의 ‘나무’ 연작이 떠올랐다. ‘나무’ 연작은 1908년에서 15년까지 나무를 그린 네 개의 작품으로 ‘차가운 추상’으로 불리는 몬드리안의 작품 스타일이 추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당시 화풍 그대로 나무를 묘사한 그림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간 나뭇가지들을 선으로 변형한 그림, 변형된 나뭇가지를 날렵한 곡선으로 과장해 화폭 전체를 채운 그림, 선들을 분해해 짧은 수직, 수평의 선만으로 구성한 마지막 그림까지 면에서 선으로 단순화된다.

‘나무’ 연작의 추상화 과정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단순한 선으로 본질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빛을 보지 못한 한라봉 나무 화분의 외침이 거친 직선으로 드러난 것처럼 말이다.



비 내리는 모양의 시각시

긴장감을 머금은 ‘선’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각시 ‘비가 내린다’.

몬드리안과 반대로 ‘따뜻한 추상’ 화가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또한 간결한 선이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그의 책 ‘점, 선, 면’에 따르면 선은 점이 움직여 나간 흔적이며 한곳에 머무는 성질의 점이 활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정적인 점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의 활동이 선이다. 특히 직선은 ‘무한한 움직임의 가능성을 지닌 가장 간결한 형태’로 ‘긴장’과 함께 ‘방향’을 갖는 것으로 표현돼 있다.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는 ‘긴장의 표현’이 선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말을 잘 표현한 예시가 있다.

프랑스 시인이자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 인물이던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는 실험적인 시를 창조했다. 그의 시집 ‘칼리그람’(Callimgrame·1918)에 실린 시 ‘비가 내린다(Il pleut)’는 시를 점과 선으로 표현한 시각시다. 문자를 읽고 내면 깊숙이 느끼며 감상하는 보통의 시와 달리 그의 작품은 단순화한 한 편의 그림이다. 후두두 매섭게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는 듯 빗방울 같은 문자들이 사선으로 이어져 내려와 하나의 빗줄기처럼 보인다. ‘추억 속에서 죽은 여인들의 목소리처럼 비가 내린다’는 시의 내용처럼 글자가 그리는 선의 분위기도 차갑다. 죽은 여인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서늘한 것일까. 기울어진 직선의 방향과 단순한 모양에서 긴장감이 느껴진다.

선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에칭(etching)을 빼놓을 수 없다. 에칭은 날카로운 금속 바늘을 이용해 동판에 새기는 판화 기법이다. 동판에 파라핀, 고무와 같이 부식되지 않는 성질의 막을 칠하고 바늘로 막과 아래의 동판까지 긁어 선을 그린다. 그다음 질산에 넣어 부식시키면 보호막을 입힌 부분은 남고 긁어낸 부분은 부식돼 깊이 파인다. 에칭의 선은 가늘고 섬세하지만 한번 그리면 지우고 다시 그릴 여지가 없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선이다. 독일 화가이자 디자이너, 작가인 하인리히 포겔러(Heinrich Vogeler)의 에칭 작품 ‘봄’(1897)을 보면 얇지만 예리한 선의 이미지가 잘 나타난다. 세 겹의 층으로 구성된 작품에서 가장 뒤쪽에 지평선 위 나지막한 집이 있고, 그 앞에 얇고 긴 수직선의 나무들이 집을 가린다. 나무들 앞쪽으로 단정하게 머리를 땋아 올린 여인의 옆모습이 보인다.



주름과 스팀다리미의 컬래버레이션

긴장감을 머금은 ‘선’

이불보 주름으로 그린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고흐의 ‘자화상’. 스팀다리미로 이 작품들을 말끔하게 펴는 광고 영상이 인상적이다(왼쪽부터).

한번 긁으면 수정하지 못하는 에칭의 선과 달리, 선을 그리고 지우는 모습에서 제품의 성능을 강조하는 광고가 있다. 러시아에서 제작한 ‘필립스 프로터치 스팀다리미(Philips ProTouch Steamer)’ 프로모션 영상에서 아티스트는 손과 필립스 다리미 두 가지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선 초상화를 그린다. 아티스트가 흰 이불보를 깐 화폭을 이리저리 뭉쳐 선을 그리고 다리미로 주름을 만들어 고정한다.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궁금할 무렵 작업을 끝낸 아티스트가 화폭을 세운다. 이불보 주름으로 그린 페르메이르의 회화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다. 아티스트는 이불보 선 초상화를 스팀다리미로 문질러 깨끗하게 펴고는 다시 재빠른 손놀림으로 선을 만들어 고흐의 ‘자화상’을 그리고 스팀다리미로 편다. 렘브란트의 ‘자화상’까지 만들고 지우는 작업을 반복한다. 다리미질을 예술행위로 승화하는 광고 영상을 통해 뚜렷한 선을 그리는 다리미와 어떤 강한 주름도 펴는 스팀다리미의 뛰어난 성능 및 절묘한 조합을 그대로 선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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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확실하게 할 말을 한다. ‘마음이 아파’ ‘슬퍼요’ ‘외롭다’ ‘어때, 나 잘하지? 멋지지?’ 등등. 선은 모양과 방향, 길이와 굵기를 바꿔가며 이미지로 말한다. 한라봉 나무 화분이 ‘햇빛을 주시오!’라며 거친 선으로 불평한 것처럼 말이다.

뒤늦게 공간을 만들어 화분을 볕에 내놓았다. 태양의 생명 에너지를 받으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선이 돼 ‘행복해’라고 말할까.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기다려봐야겠다.




입력 2017-10-23 15:49:11

  • 신연우 아트라이터 dal_roa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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