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17

2017.12.13

강양구의 지식 블랙박스

해파리 연구에 세금을 나눠 줘야 하는 이유

‘쓸모’ 따지며 기초과학 예산 삭감한 국회, 한국 과학기술 잠재력 갉아먹었다

  • 입력2017-12-12 10: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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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바다에서 밝게 빛나는 해파리(위).일본 화학자 시모무라 오사무가 1962년 해파리에서 형광단백질을 추출한 뒤 이 물질을 이용해 인체의 비밀을 추적하는 새로운 차원의 연구가 시작됐다.[shutterstock]

    깊은 바다에서 밝게 빛나는 해파리(위).일본 화학자 시모무라 오사무가 1962년 해파리에서 형광단백질을 추출한 뒤 이 물질을 이용해 인체의 비밀을 추적하는 새로운 차원의 연구가 시작됐다.[shutterstock]

    언제부턴가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과학 잡지가 참 예뻐졌다. 표지나 투고 논문에 첨부된 사진이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학 잡지를 예쁘게 만드는 데 기여한 것 가운데 하나가 ‘녹색형광단백질’(Green Fluorescent Protein·GFP)이다.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형광녹색을 띤 쥐를 본 적이 있으리라. 

    녹색형광단백질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다. 이 단백질 덕에 생명 현상의 신비가 여럿 밝혀졌다. 예를 들어 제임스 로스먼 같은 과학자는 세포 안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이 자신이 필요한 장소로 정확히 이동하는 방법을 연구할 때 바로 이 형광단백질을 이용했다. 단백질 유전자에 형광단백질 유전자를 삽입하면 그 단백질에 형광색 꼬리표가 붙어 관찰이 가능하다. 

    로스먼은 랜디 셰크먼, 토마스 쥐트호프 등과 함께 201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만약 형광단백질이 없었다면 로스먼이 몸속 단백질 이동의 비밀을 밝히는 일이 훨씬 어려웠으리라.

    해파리와 유산균에서 시작된 과학기술 혁신

    형광현미경.[shutterstock]

    형광현미경.[shutterstock]

    형광단백질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한 것일까. 물론 과학자들의 고군분투가 있었다. 형광단백질의 기원은 수중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해파리다. 1962년 일본 시모무라 오사무가 해파리의 한 종(Aequorea victoria)에서 형광단백질을 처음 추출했다. 미국 마틴 챌피와 로저 첸은 이 형광단백질 유전자를 이용해 단백질 활동을 추적, 관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들은 이 업적으로 2008년 노벨화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이 대목에서 비운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200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챌피와 첸은 그 자리에 꼭 있었어야 할 과학자를 한 명 언급했다. 바로 더글러스 프래셔다. 그는 빛을 내는 형광단백질 유전자에 주목해 1992년 그것을 처음으로 분리하는 데 성공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프래셔는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당장 쓸모가 없어 보이는 해파리 연구에 돈을 대려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과학계를 떠나면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동료 과학자 몇몇에게 넘겨줬는데, 그 가운데 바로 노벨화학상을 받은 챌피와 첸이 포함돼 있었다. 

    200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 프래셔는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의 도요타 매장에서 시간당 8.5달러(약 9200원)를 받고 셔틀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 헤어진 동료가 자신이 한때 열정적으로 수행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약 그때 프래셔가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그의 몫이 됐을 공산이 크다. 

    로스먼의 단백질 이동 연구와 함께 형광단백질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 송기원 연세대 교수(생화학)는 이렇게 꼬집는다. 

    “로스먼 등이 2013년 노벨상을 받고 나서 이렇게 말했어요. 요즘처럼 실용적인 연구 결과만 좇는 세태에서는 이 연구를 못 했을 거라고요. 우리나라에서도 해파리 빛을 연구하는 데 연구비를 댈 정부나 기업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바로 그런 연구가 축적되면서 과학연구를 혁신할 실용적인 실험 기법이 등장했어요. 노벨상도 덤으로 받고요.” 

    선진국에서 시작된 특정 과학기술을 따라잡을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추격형’ 연구는 잘해봐야 모방에 그친다. 하지만 과학자가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연구 주제를 탐구하도록 지원해주는 풍토가 마련된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후속 연구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해파리에서 추출한 형광단백질이 그 대표적 사례다. 

    최근 ‘노벨상 0순위’로 꼽히는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CRISPR)도 좋은 예다. 크리스퍼의 기능은 2007년 덴마크 요구르트 회사에서 일하는 한 연구원이 밝혀냈다. 요구르트 발효를 책임지는 유산균 가운데 바이러스에 내성을 보이는 듯이 행동하는 것을 분석했더니 크리스퍼 유전자가 활성화돼 있었던 것이다. 요구르트 유산균을 연구하면서 특정 유전자를 정확하게 찾아 자르는, 현대 생명과학을 혁신할 기법의 단초를 발견하리라고 누가 예상했겠는가. 

    최근 유행하는 인공지능(AI) 연구도 마찬가지다. 몇 년 새 AI 연구가 각광받고 있지만 이 ‘과학기술계 아이돌’도 부침이 있었다. 뾰족한 성과가 나오지 않던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말까지는 연구 열기가 시들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딥 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새로운 기계 학습 방법이 고안되면서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런 발전이 있었던 배경에는 유행을 타지 않고 계속해서 AI 연구에 매진한 뚝심 있는 과학자의 노력과 그런 분투를 뒷받침한 기초연구의 축적이 있었다. 뇌의 비밀을 파헤치는 신경과학, 인간의 뇌를 모방한 인공신경망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수학과 통계학 등이 그것이다. 

    최근 국회가 예산 심의 과정에서 기초과학 연구비를 깎아 논란이 됐다. 이런 결정에 참여한 국회의원 상당수는 특정한 목적이 없는 기초과학 연구에 국민 세금을 나눠주는 것을 문제로 지적했다. 하지만 유행을 좇아 목적을 정하고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연구비를 몰아주던 지금까지 방식이야말로 한국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갉아먹은 중요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이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일”

    국회의원들이 기초과학 연구비를 삭감하면서 염두에 뒀던 것이 과학기술의 역할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과학기술의 쓸모 가운데 으뜸은 돈벌이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일 테다. 그런데 과연 과학기술의 유용성이 당장의 쓸모로만 평가돼야 할까. 해파리의 빛을 연구하던 과학자가 그 쓸모를 의식했다면 지속적인 탐구가 가능했을까 말이다. 

    물질을 구성하는 미지의 입자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른바 ‘가속기 프로젝트’의 예산을 따려고 동분서주하던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윌슨은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69년 의회에서 이렇게 답했다. 이 발언의 ‘가속기’를 ‘기초과학’ 혹은 ‘해파리’로 바꿔 기초과학 연구비 삭감을 결정한 국회의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가속기(기초과학 또는 해파리)는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화가인가, 좋은 조각가인가, 훌륭한 시인인가와 같은 것들. 이 나라에서 우리가 진정 존중하고 명예롭게 여기는 것, 그것을 위해 나라를 사랑하게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새로운 지식은 전적으로 국가의 명예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지킬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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