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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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용의 俗 담은 우리말

또 하나의 명절, 대보름

‘개 보름 쇠듯’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aristopica@gmail.com

    입력2017-02-03 16: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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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의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대보름은 그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습니다. 잣불 켜고 귀밝이술 마시고 부럼 깨고, 또 오곡밥 지어 먹으며 더위팔기를 하고 달집태우기에 달맞이, 풍년을 비는 다양한 행사까지, 정월 대보름은 설이나 한가위 못지않은 큰 명절이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오곡밥에 아홉 가지 나물을 먹고 얼굴이 새카매지도록 쥐불놀이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부럼과 오곡밥, 그리고 달집태우기 정도만 남아 아쉽기만 합니다.

    그런데 정월대보름엔 개에게 밥을 주지 않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예 대보름날 하루를 굶기거나 달이 뜨는 때 저녁 한 끼만 주었지요. 이를 ‘개보름쇠기’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온종일 먹고 마시고 흥겨운데, 개는 쫄쫄 굶기만 하니 그저 처량한 하루입니다. 그래서 ‘개 보름 쇠듯 (한다)’이라는 속담도 생겼습니다. 명절을 남들처럼 잘 먹고 흥겹게 보내지 못하고 쓸쓸하게 지내는 경우 이 속담을 씁니다.

    그런데 왜 대보름날 개를 굶겼을까요. 속설에 따르면 대보름날 개에게 밥을 주면 개가 파리해지거나 개밥에 파리가 꾀어 개를 굶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굶기면 더 여위어 파리해지지 않을까요. 개밥에 파리가 들끓어 안 준다면 한겨울 빼고 노상 굶겨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이 속설을 믿을 수 없을 듯합니다.

    개와 보름의 관계를 찾아보다 개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요. 개의 조상이 늑대고 늑대는 육식을 합니다. 그러던 늑대가 개라는 가축이 되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잡식성으로 바뀐 것이지요. 잡식성으로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개의 소화기관이 인간만큼 기능을 하진 못하겠지요. 개가 참외를 먹고 싼 똥에 섞여 나온 참외 씨가 아무데서 나 움튼 것을 개똥참외라고 합니다. 사람도 그렇듯, 개 역시 참외 씨를 소화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체질에 따라 어떤 사람은 소화기관이 허약해 오곡밥을 먹으면 신물이 올라오거나 가스가 차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개에게 오곡밥은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는 소화불량에 걸리면 몸이 비쩍 마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른다, 여윈다, 파리해진다, 파리가 꾄다 식으로 속설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개 먹이자고 오곡밥 말고 따로 밥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테고요.



    또한 월견상극(月犬相剋)이란 말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개(또는 늑대)와 달은 상극이라고 봤습니다. 달이 뜨는 밤에 개나 늑대는 우짖거든요. 세계 민담에도 월식은 개나 늑대가 달을 물어서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요. 그리고 달은 여성과 출산, 생산을 뜻합니다. 그래서 부녀자들이 대보름달의 정기를 받으려 언덕에 올라 달맞이를 했고, 달의 크기로 한 해 농사를 점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소중한 날 개가 짖으면 부정이 타겠다 싶었겠지요. 그래서 일부러 개를 굶겨 짖을 기운을 빼버린 건 아니었을까요.

    개는 이유도 모른 채 굶고, 사람들은 밤이 깊도록 먹고 마시니 이처럼 처량한 신세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객지에 혼자 나와 고향에 갈 처지가 못 돼 집에서 하루 종일 TV를 보며 명절을 보내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명절증후군’을 겪는 이는 속도 모르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 합니다. 정말 그게 부러운 일일까요. 주변은 흥청거리는데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이 혼자 보내는 적막함이란 어쩌면 고독보다 상실감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주변에 명절을 ‘개 보름 쇠듯’ 보낸 이웃이 있을 것입니다. 문 두드려 오곡밥 한 그릇, 부럼 한 줌 건네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김승용은 국어학과 고전문학을 즐기며, 특히 전통문화 탐구와 그 가치의 현대적 재발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속담이 우리 언어문화 속에서 더욱 살찌고 자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자 10년간 자료 수집과 집필 끝에 2016년 ‘우리말 절대지식’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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