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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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좋은 장면은 없다

시작과 끝의 반전

뒤집기의 생소함이 주는 깨달음

  • 신연우 아트라이터 dal_road@naver.com

    입력2017-05-08 11: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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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니가 벤자민을 안고 거실로 올라왔다. 양로원 노인들에게 소개해주려는 것이다. 아기 돌보기에 자신 있다는 할머니들이 벤자민 주위에 몰려들었다. 아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한마디 한다.

    “세상에, 내 전남편을 쏙 빼닮았어.”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백내장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관절염으로 온몸이 뻣뻣한 벤자민은 삶의 종착점을 앞둔 양로원 노인들과 비슷한 모습이다. 벤자민은 끝에서 태어나 시작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 뇌는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경험으로 각인된 패턴에 익숙하기 때문에 거꾸로 뒤집으면 당황한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 벤자민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도 시작과 끝이 뒤바뀐 생소한 패턴 때문일 것이다.

    순서를 뒤집는 방법은 수수께끼처럼 의미를 숨기기에도 효과적이다. 앞에서 뒤로 읽는 보통의 순서를 뒤집으면 완전히 새로운 의미가 등장하는 단어들이 있다. 로마를 사랑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영화 ‘로마의 휴일’의 배경이어서만은 아니다. Roma(로마)를 뒤에서 읽으면 Amor(아모르·사랑)라는 단어가 된다.

    앞에서 뒤로 읽을 때 보이지 않던 의미를 발견하는, 마치 보물찾기와 같다. 삶을 자궁에서 시작해 무덤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도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womb(자궁)의 알파벳을 살짝 바꾸면 tomb(무덤)이 되는 것은 우연일까.



    글자뿐 아니라 거꾸로 뒤집은 이미지도 쉽게 인지하기 어렵다. ‘이야기의 기원’에서 소개하는 사례를 보면 자폐아는 같은 감정을 보이는 사진들의 짝은 잘 못 맞추지만 거꾸로 뒤집은 얼굴 사진들의 짝은 보통 아이보다 잘 맞춘다고 한다. 자폐아가 감정적 의미를 느끼지 않고 평온하게 유형을 바라보는 반면, 보통 아이는 익히 알고 있는 입술, 눈, 눈썹 모양과 각도 등의 영향으로 뒤집은 장면을 파악하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뒤집어진 그림에서 찾은 또 다른 예술

    이처럼 거꾸로 뒤집으면 이미지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착안해 수수께끼를 숨긴 작품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는 그림 ‘정원사’(1590)에서 이미지를 읽는 순서를 뒤집었다. 그릇에 채소를 담은 그림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지만 거꾸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채소와 그릇의 형상이 어느새 사람처럼 보이는 새로운 패턴으로 나타난다. 채소들의 위치와 모양은 눈과 코, 볼, 입술, 머리카락, 수염이 돼 뒤집으면 드러나는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듯하다. 프랑스 생수회사 에비앙(Evian)이 2013년 제작한 TV 광고는 시간을 뒤집어 어린아이 시절을 되살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Evian Baby & Me(에비앙 아기와 나)’라는 타이틀의 광고는 도심을 걷는 평범한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유리창에 자신이 아기로 비치는 것을 발견한 남자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아기를 마주 보며 장난스럽게 춤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유리창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 아기를 발견하고 각양각색으로 춤추며,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아기를 마주 하고 상체를 들썩이는 장면으로 광고는 끝난다.

    어른의 특징을 절묘하게 빼닮은 아기와 마주 본 채 춤추는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는 광고다. 에비앙은 알프스의 특별한 물이라는 신화적 이미지가 있다. 1789년 알프스 마을 에비앙으로 요양을 온 어느 남작이 우물물을 마신 뒤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니, 에비앙을 마시면 나이 듦을 거슬러 광고처럼 아기 모습으로 되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황을 뒤집고 싶은 순간은 언제나 찾아온다. 컴퓨터 작업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Ctrl+Z(되돌리기 기능) 키를 일상에서 누르고 싶을 때가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를 바꾸고 지나간 것을 붙잡고 싶은 욕심이다.



    떨어진 꽃이 아름다운 이유

    벚나무는 욕심과 집착이 없어 보인다. 벚꽃이 만개할 무렵 어김없이 내리는 비에  금세 져 예쁘게 핀 꽃을 구경할 시간이 길지 않다. 떨어지는 벚꽃이 안타까운 것은 집착일까.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피타고라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변하며, 소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중략) 영혼도 여러 가지 형상 속으로 옮겨 다녀도 언제나 똑같다는 것이 내 가르침이오.”

    벚꽃의 끝은 나뭇잎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꽃이 길바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동안 꽃이 피었던 자리를 연둣빛 나뭇잎이 뒤덮기 시작하는 것이다. 찬바람 불고 따뜻한 공기가 스며들 무렵 벚꽃은 다시 시작점에 선다. 시작은 끝으로, 끝은 시작으로 가는 준비 과정이다. 벚나무처럼 힘을 빼고 시작과 끝을 묵묵히 바라보면, 소멸하는 것은 없으며 무한 반복하는 선물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채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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