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4

2007.09.25

사진, 예술과 놀이의 경계에 서다

회화 대체용으로 등장 후 독자적 예술장르 거쳐 새로운 놀이문화로

  • 김수혁 사진아트센터 boda 대표·연세대 영상대학원 겸임교수

    입력2007-09-28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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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예술과 놀이의 경계에 서다

    도로시아 랭의 1936년 작 ‘Migrant Mother, Nipomo California’.

    사진기와 사진술이 최초로 공표된 것은 1839년 8월19일, 프랑스 학사원에서 열린 미술과 과학 아카데미에서였다. 이후 사진은 수개월도 채 안 돼 새로운 기술과 예술로 발전하며 전 유럽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당시 사진을 처음 접한 많은 사람들은 “조물주가 창조해낸 위대한 마법의 발명품”이라며 놀라워했지만, 화가 폴 들라로슈(P. Delaroche) 같은 이들은 “오늘부터 회화는 생명을 잃었다”며 사진을 발명한 다게르에게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당시 많은 이들을 사로잡은 분야는 ‘초상사진’과 ‘풍경사진’이었다. 화가가 그려내는 초상화나 그림이 왕족이나 귀족만 소유할 수 있었다면, 사진은 정확한 데다 저렴하기까지 해 점차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서민과 중산층으로 빠르게 유행했다. 최초의 사진가들은 대부분 화가 출신이었으며, 때문에 그들의 사진 역시 회화기법을 응용한 회화풍 사진이 많았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회화와 다른 매체로 자리잡게 된 것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폴 스트랜드에 의한 ‘사진 분리파 운동’에서부터였다. 1903

    ~1917년까지 전개된 ‘사진 분리파 운동’은 “사진의 독자적인 시각적 특성을 찾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사진이 갖고 있는 기계적 기록성과 렌즈의 사실적인 정밀성에 관한 미학을 주장했는데, 바로 이 시각운동이 현대사진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사진인쇄술이 발달하고 신문, 잡지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저널리즘 사진도 늘게 됐다. 아울러 1930년에는 워커 에번스와 도로시아 랭, 두 사진가에 의해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용어와 형식이 정립된다. 사실 다큐멘터리 사진은 1910년경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제이콥 리스와 사회학자 출신의 사진가 루이스 하인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철저한 시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대상에 사진가의 개인적 관점(시각과 주제의식)을 실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찍는 사진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로 수많은 이민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내야 했는데, 이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사진으로 이끈 최초의 다큐멘터리 작가들인 셈이다.

    1930년에서 50년까지가 저널리즘 사진이 정착하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형식이 정립되는 시기였다면,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며 사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된다.

    1930~50년 저널리즘 사진 정착

    사진, 예술과 놀이의 경계에 서다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1907년 작 ‘삼등선실’.

    로버트 프랭크와 윌리엄 클라인이 등장한 이후 리 프리들랜더, 다이안 아버스, 게리 위노그랜드 등 3명의 작가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뉴 다큐멘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선보인 것이다. 이 작가들은 대상의 선택과 표현방법이 공적이고 객관적이던 이전의 다큐멘터리 사진과 달리, 개인의 처지와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들 통해 다큐멘터리 사진은 저널리즘 성향과 사회적인 경향에서 벗어나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이 처음 선보인 것은 1966년 주명덕의 ‘홀트씨 고아원’전이다. 그러나 사회적 성격이 강했던 주명덕의 사진작업은 1970년대 유신 발표 이후 억압된 정치상황으로 더는 확대되지 못했고, 이후 강용석이 80년대 미군부대와 주변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동두천 기념사진’ 시리즈를 발표한 뒤 다시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맥이 이어지게 된다. 이 밖에도 정해창 임응식 한정식 등이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으로는 1970년에 이르러 컬러사진이 가진 원색의 느낌을 거부하고 ‘뉴 컬러(New Color)’를 표방하는 흑백 및 컬러사진 계열의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단순하고 낭만적인 생각을 지향하는 사진가들이었다. 이들 역시 사진 분리파 운동처럼 사진의 기록성을 중시했는데 윌리엄 크리스천베리, 조엘 메이어로위츠, 존 팔 등 많은 작가들이 ‘뉴 컬러’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70년 후반에 이르러서는 ‘뉴 토포그래피(New Topography)’라는 사진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이론적 경향이 강한 사진작가와 개념적인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기존의 사진에 대한 관념을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예컨대 사진을 만들기 위해 대상이나 상황이 연출되거나 작가에 의해 다른 방법으로 복제된 사실 등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기존 사진의 성격(기록성, 진실성 등)을 뒤엎는 것이다.

    더불어 1980년대 컴퓨터, 무선전화, 인터넷의 발달과 가상현실의 가능성은 모든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는 사진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바라 카스텐, 신디 셔먼, 샌디 스코글런드, 로리 시몬스 등 이론이 강한 사진가들은 ‘구성주의 사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고, 본인들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Photographer’ 대신 ‘Artist’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사진, 예술과 놀이의 경계에 서다

    조엘 메이어로위츠의 1977년 작 ‘Porch, Provincetown’(왼쪽), 린코 가와우치의 2005년 작 ‘Cui Cui’ 시리즈 중 일부.

    디카와 인터넷 등장으로 사진은 다양하게 변화 발전

    이들은 ‘자아’의 발견과 ‘성 정체성’에 대한 작업,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의한 ‘가상현실’ 등을 드러냄으로써 사진적 표현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시기 한국 역시 ‘혁명적 사진가’로 일컬어지는 구본창 황규태 등이 등장했으며 오상택 등 많은 젊은 작가가 비슷한 계열에 서서 활동했다.

    이후 1980년 중반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30년간 예술 전반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다. 사진의 경우 전통적인 미술계에서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 노력한 결과 이제 미술계의 중심에 서 있게 됐지만 진실성, 신뢰성, 사회공학, 재현의 속성 등에서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아날로그 사진에서 사진의 독자적 의미는 ‘기록성’에 있었다. 그리고 이 ‘기록성’은 ‘사실성’으로, ‘사실성’은 ‘진실성’으로, ‘진실성’은 ‘믿음’으로 이해됐다. 디지털 사진도 처음에는 아날로그가 갖고 있는 독자적 의미인 ‘기록성’을 유지했지만, ‘포토샵’을 통해 사진의 수정이나 변형이 손쉬워지면서 아날로그가 갖고 있던 사진의 진실성은 조금씩 손상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진실성의 결여(또는 거부) 대신 사진은 표현방식의 다양성을 추구하게 됐다.

    1990년대 디지털 사진에 이르러 작가의 의식과 시각을 통해 사진을 재구성하고 ‘만든다’라는 개념은 더욱 강화됐다. ‘찍는 것(Shooting)’을 넘어 ‘만든다(Making)’라고 할 만큼 생산의 개념적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근래 들어 UCC 문화란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 UCC란 User Created Contents의 약자로 일반 사용자들이 직접 만들어 유통하는 콘텐츠, 즉 사용자 제작 콘텐츠를 말한다. UCC는 텍스트에 이어 최근 이미지, 동영상, 음악 등 멀티미디어로 분야를 확대해가는 추세다.

    또 최근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적 확산과 인터넷 발전은 ‘디카 문화’를 만들어냈다. 10~30대 대다수는 이제 사진으로 의사소통하기(비주얼 의사소통), 자기표현, 정보 공유, 기발한 아이디어로 재미있게 합성한 합성사진 등을 하며 사진을 새로운 놀이문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처럼 다게르에 의해 등장한 사진은 회화의 대체에서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그리고 이제는 디카 문화와 UCC 문화를 낳으며 다양한 성격으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사진미학 교실은 주간동아, (사)문화문, 사진아트센터 boda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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