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0

2017.03.22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고전이 주는 쾌감, 신인이 선사하는 기쁨

음악과 음식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7-03-17 18: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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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으로 하나의 감각이 발달하면 그 ‘느낌’을 알게 된다. 좋은 게 기관을 타고 뇌에 도달했을 때의 쾌감이 뭔지를 안다는 얘기다. 인생을 바꿀 만한 음악을 들었을 때 그렇다. 그동안 먹은 음식들이 그저 영양공급원이었다고 느껴지는 한 끼를 먹었을 때 그렇다. 심장을 불태우는 듯한 사랑에 빠졌을 때도, 천사와 신들이 앞에서 합주하는 듯한 오디오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쾌감은 암처럼 전이되기 마련이다. 한번 자극된 쾌락중추는 좀처럼 그 느낌을 잊지 않는다.

    어찌하다 보니 음악을 듣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업이 됐다. 이 업으로 생계를 책임진 지 10여 년이 되다 보니, 판단 기준과 음악에 대한 생각도 몇 번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변의 원칙이 있다. 본류와 아류의 차이는 언제 어떻게든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 하나의 시대를 여는 음악이 있다. 그 음악을 따라가는 음악이 있다. 전자가 대중을 따라오게 하는 음악이라면, 후자는 대중을 따라가는 음악이다. 전자 음악의 공통점이 있다면 대중영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영향을 받은 음악을 지향하되 이를 뛰어넘는 무엇을 더한다. 이 더함의 과정은 철저한 자기 욕망과 만족이 투영되며 이뤄진다. 달콤하고 청승맞은 대중영합적 얄팍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각의 시대다. 음악 못지않게 오랫동안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지인들은 좋은 음악보다 맛집 정보를 물어보곤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음악 이야기보다 음식 이야기에 ‘좋아요’가 훨씬 많다. 곰곰이 생각해봤다. 음악과 음식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혀와 귀는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

    한 해에도 몇 번씩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음식이 바뀐다. 그걸 보면서 나는 멜론 실시간 차트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음악들을 떠올린다. ‘과연 이 음악들이 1년 후에도 사람들에게 기억될지’ 하는 회의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치즈와 버터를 퍼붓고 단짠(단것을 먹으면 짠 음식을 먹고 싶다는 신조어)으로 승부하는 그런 음식들이 잠깐 반짝였다 사라지는 음악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SNS에 올렸을 때 그럴싸해 보이려고 비주얼에만 치중한 빙수와 케이크를 맛보면 기만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늘 한결같은 음식을 찾아다녔다. 세대를 넘겨 한 끼 식사와 하룻밤 술자리를 책임지던 식당들이 우선이다. 우래옥, 하동관은 물론이요, 20년은 젊은 축에 들어가는 서울 을지로 뒷골목의 식당들에 가면 비틀스나 너바나를 듣는 기분이 든다. 세월을 이겨내고 주변인들의 혀를 만족시키는 하나의 전범이 된 음식들 말이다. 고전이 주는 쾌감이 있으면 신인이 선사하는 기쁨도 있는 법. 이제 막 재생되기 시작한 옛 동네들도 다닌다. 작고 단아한 외관의 가게에 눈이 간다. 가게 이름부터 외관까지 촉이 온다. 커버와 밴드 이름만으로 음반을 고를 때의 기분이다.



    실패할 때도 물론 있다. 그러나 성공할 때가 더 많다. 좋은 재료로 균형 있게 요리하되, 만든 이의 의도와 정성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한 이의 의욕과 결의가 느껴지는 것이다. 기쁘다. 아무도 모르는 신인 뮤지션을 발굴해 소개할 때 음악 평론가는 최고의 보람을 느낀다. 그런 식당에서 몇 숟가락을 드는 건 그 환희의 순간과 다름없다. 귀와 혀가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다. 음악이건 음식이건 마찬가지다. 돈만 생각하고 만드는 음악은 트렌드다. 먹고사는 것만 염두에 두고 만드는 음식도 그렇다. 트렌드는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 스타일이 만든다. 그런 음악과 음식이 당연한 사회의 문화는 풍성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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