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3

2016.04.13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맥주 그리고 담배 한 모금

톰 웨이츠가 당신의 약속을 무너뜨리던 밤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6-04-11 11:4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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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화가 날 때가 있다. 맥주를 마실 때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사실에. 그것도 음악과 맥주가 함께할 때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이건 말이 안 된다. 술과 담배를 온몸으로 머금은 듯한 음악을 들을 때는 시간을 되돌려 2년 전쯤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담배 연기가 산소 농도와 자웅을 겨루던, 그 시절의 음악 술집으로.

    딱 한 잔이 아쉬운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음악 술집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다. 정말로 딱 한 잔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지켰다. 그날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바로 스스로와의 약속을 잊어버렸다. 라거 생맥주 한 잔이 위장을 채울 무렵 나오던 노래 때문이었다. 톰 웨이츠의 ‘Warm Beer And Cold Women’이었다.

    미지근한 맥주와 싸늘한 여자. 접속사를 제외하면 두 개의 형용사와 명사로 모든 상황을 말해주는 제목 아닌가. 게다가 웨이츠다. 목소리에 술과 담배를 모두 품고 있는 남자. 자신의 작품 ‘커피와 담배’에 그를 출연케 한 영화감독 짐 자무시는 이렇게 말했다. “톰 웨이츠의 음악을 모른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잃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 당신이 맥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Warm Beer And Cold Women’은 1975년 그의 첫 라이브 앨범(사진)에 담긴 곡이다. 스튜디오에 소수의 청중을 모아놓고 녹음한 이 앨범은 얼핏 들으면 미국 시카고나 뉴올리언스의 오래된 펍에서 행한 작은 공연의 기록처럼 들린다. 스튜디오의 엄숙함은 오간 데 없고, 주정뱅이들과 흥취를 나누는 듯한 현장감과 즉흥성이 일품이다. 웃음과 박수, 환호가 바의 그것처럼 생생하다.

    서울 홍대 앞에 있던, 지금은 갈 수 없는 음악 술집. 그곳 주인장은 웨이츠를 정말 좋아했다. 한껏 취하면 역에 들어서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듯 웨이츠의 노래를 틀곤 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반드시라도 좋을 만큼 웨이츠를 틀었다. 나 역시 그 가게에서 웨이츠의 노래들을 많이 알게 됐다. ‘Warm Beer And Cold Women’은 그 가게의 영업마감 노래였다.



    내일을 준비하거나 더는 맥주를 마실 수 없는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엔 지지부진함이 남게 마련이다. 잃어버린 시간 위에 올라타 있는 손님들이 끝내지 못한 문장의 말줄임표처럼 떠돈다. 그 바의 단골들에게 ‘Warm Beer And Cold Women’은 퇴근을 알리는 알람과 같았다. 텅 빈 바위에 놓인 식어 빠진 맥주잔을 치우면, 찌든 담배연기도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노래가 다 끝나기도 전 나는 남은 맥주보다 차가웠던 밤공기 속으로 흘러나왔다.

    비교적 쉽지 않은 노래 멜로디를 따라 부르게 될 즈음, 그 바의 문이 닫혔다. 주인장이 세상을 떠났다. 수영하듯 한강에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조금은, 아니 꽤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자리에 다른 술집이 들어오기도 전 충격은 적잖이 무뎌졌던 것 같다. 다른 음악 술집을 찾아내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Warm Beer And Cold Women’을 마감 노래로 틀지 않던.

    강물을 찾아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누처럼 새로운 음악 술집을 전전했다. 그러길 10년쯤 만에 딱 한 잔을 위해 찾은 곳에서 ‘Warm Beer And Cold Women’을 들었다. 손님은 나밖에 없었다. 주인 형에게 간청했다. 그리고 나는 금지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상을 떠난 그 바의 주인장보다 그 바에서 함께 음악을 듣고 취했던, 젊었던 그녀들이 떠올랐다. 맥주잔이 식을 틈을 주지 않았던, 아니 이미 맥주 온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마음을 달아오르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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