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2

2015.04.06

시민의 죽음, 세례 요한의 순교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리바이어던’

  • 한창호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5-04-06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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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영화 안에는 책, 그림, 오페라 등 다양한 문화예술 장르가 공존합니다.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영화와 오페라 : 매혹의 아리아, 스크린에 흐르다’ 등을 쓴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이번 주부터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운 영화 읽기를 제안합니다.〈편집자 주〉

    살로메가 원한 것은 세례 요한의 목이었다. 잔칫날 의부 헤롯 왕 앞에서 아름다운 춤을 춘 대가로 받은 상이다.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내린 성인으로 유명하지만, 헤롯에겐 왕권을 비판하는 ‘광야의 포효하는 저항자’였다. 요한은 헤롯의 부패, 살로메 모친과의 간음, 그리고 부패한 권력에 봉사하는 유대 성직자들의 변절 등에 천벌의 심판을 내렸다. 불안했던 살로메의 모친은 딸을 사주해 결국 요한의 목을 베고야 만다. ‘리바이어던’의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는 현대 시민의 운명을 요한의 애통한 비극과 비교한다. ‘목이 잘린 세례 요한’의 벽화를 인용하면서다.

    ‘리바이어던’은 러시아 북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현실 권력에 맞선 어느 시민의 몰락을 그린 사회 비판 드라마다(2014년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 시장은 검찰과 경찰은 물론, 법원까지 권력의 하수인으로 부린다. 민주주의의 삼권분립 같은 가치는 내팽개친 지 오래다. 시장은 해변 지역에서 개발사업을 벌이려 하는데, 하필 그곳에 사는 콜랴라는 평범한 남자가 주거 이전을 거부한다. 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뜻에서다.

    영화 제목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 ‘욥기’에 등장하는 거대한 동물 이름이자, 정치학자 토머스 홉스의 저서 제목이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혼돈을 피하기 위해선 국가 같은 거대 조직이 필요하다고 봤고, 그 국가는 인간의 힘을 넘는 존재인 리바이어던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알다시피 이런 긍정적인 의미의 리바이어던이 부정적인 폭력의 괴물로 변하는 것은 국가가 권력을 남용할 때다. 영화 ‘리바이어던’은 괴물로 변한 국가의 권력 앞에 저항하다, 끝없이 고통을 당하는 시민을 그린다.

    시민의 죽음, 세례 요한의 순교

    ‘세례 요한의 머리와 살로메’, 카라바조, 90.5X167cm, 캔버스에 유채,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콜랴는 변호사 친구의 도움을 받아 시장과의 한판 싸움을 준비한다. 하지만 고발장을 받아줄 관계기관, 곧 경찰과 검찰, 법원은 콜랴만 나타나면 텅 비어버린다. 이들 기관은 이미 시장의 하수인이고, 시민을 위하는 곳은 찾을 수 없다. 그 와중에 10대 아들은 새로 맞은 아내를 엄마로 받아들이지 않고 걸핏하면 욕설을 퍼붓는다. 시장과의 싸움은 예상대로 패배의 길로 치닫고, 가족도 붕괴 직전이다.



    마음 둘 곳 없는 콜랴는 어느 날 밤, 아들이 또래들과 자주 어울리는 폐허가 된 교회를 찾아간다. 모든 걸 포기하려 할 때 그의 눈에 흐릿한 벽화가 들어온다. 벽엔 무명화가의 ‘목이 올려진 세례 요한’이 그려져 있다. 요한은 쓰러져 있고, 살로메의 쟁반에는 이미 그의 목이 담긴 상태다. 콜랴가 요한을 바라보는 이 순간은 부패 권력에 맞서다 목이 잘린 순교자의 운명이 평범한 남자의 미래와 겹쳐지는 순간이다. 더 나아가 영화는 콜랴와 10대들이 모여 있는 폐허 전체를 마치 성화의 후광처럼 묘사해, 이들 모두가 순교의 희생자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안에서 피운 모닥불 때문에 이 폐허는 멀리서 보면 금색의 반원형을 하고 있다. 콜랴의 추락이 비극으로만 비치지 않는 것은, 시민을 이처럼 순교의 희생자로 암시하기 때문일 테다. 비극적인 죽음의 드라마에 황금빛 후광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불빛처럼 일렁이는 순간이 이 영화의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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