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43

2016.06.22

한창호의 시네+아트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

가족의 아픔, 피아노의 울음

  •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6-06-20 09:2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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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 베냐민은 피아노를 보며 중산층 가정의 우울과 공포를 떠올린다. 1926년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고 있던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다.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 된 세상에서 잠시 살며, 아마 베냐민은 상대적으로 유럽 부르주아 문명의 억압을 더욱 절실하게 실감했을 테다. 말하자면 가정 한복판에 놓여 있는 가구 피아노는 중산층 가족의 억압과 상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규율을 익히고, 훈련하고, 인내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한 가족에게 멜랑콜리는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공포감마저 불러일으킨다는 해석이다(발터 베냐민의 ‘모스크바 일기’).

    영화 ‘피아니스트’(2001)의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빈 음악학교 교수이자 피아노 연주자인 에리카(이자벨 위페르 분)다. 에리카는 모친의 스파르타식 지도 아래 피아니스트로 키워졌다. 모친은 딸의 재능을 일찌감치 발견했고, 그 재능을 키우려고 딸에게 엄격했다. 그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고 생각하는데, 마찬가지로 딸도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고 여긴다. 모친의 억압과 독려 덕에 피아니스트가 됐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를 위한 삶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이다. 마흔이 넘은 에리카는 여전히 피아노 레슨을 받던 10대 시절처럼 거의 매일 엄마와 다투고 금방 화해하며 살고 있다. 영화 도입부, 귀가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서로 죽일 듯 싸우는 모녀의 모습은 두 사람 모두 정상이 아님을 한눈에 알게 한다.

    에리카의 슈베르트 피아노 연주를 듣고 찾아온 학생이 발터(브누아 마지멜 분)다. 상류층 아들로, 금발에 외모까지 준수하다. 발터의 접근은 청년의 충동에 가깝다. 피아노를 배우겠다던 그는 점점 에리카에게 사랑을 요구한다. 그런데 관객은 에리카의 비정상성을 이미 봤기에, 사랑의 위험을 금방 짐작한다. 에리카는 정상적인 (성)관계를 못 한다. 충동적으로 화려하고 야한 옷을 사거나(도입부의 싸움 이유), 숨어서 남들의 섹스 장면을 구경하고, 끔찍하게도 성기에 자해까지 하며 오르가슴을 느낀다. ‘피아노의 억압’이 에리카를 성도착자로 만든 것이다.

    발터의 끊임없는 구애를 결국 받아들인 뒤 에리카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편지에 쓴다.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지에 써놓은 내용은 보통 우리가 ‘사도마조히즘’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먼저 노끈으로 몸을 묶은 뒤 스타킹으로 입을 막고 채찍으로 때려달라는 것. 그 모든 행위를 어머니 방 앞에서 해달라는 요구도 덧붙였다. 어안이 벙벙한 내용이지만, 병든 에리카를 받아들인 관객이라면 그게 에리카식의 간절한 연애편지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에리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힘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이 영화를 감독한 미하엘 하네케는 스웨덴 잉마르 베리만 감독, 또는 제정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와 종종 비교된다. 가족의 갈등과 아픔에 대한 예리한 시선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는 가족의 모든 것을 ‘피아노’로 압축했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피아노는 종종 사람 울음처럼 들린다. 특히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2악장(안단티노)의 울음이 가장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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