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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시네+아트

죽음이 남긴 이별의 고통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

죽음이 남긴 이별의 고통

[사진 제공·오드]

[사진 제공·오드]

그리스 중견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매력은 알레고리에 있다. 그의 출세작 ‘송곳니’(2009)처럼 억압적인 가부장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실상은 억지를 부리는 현대 정치의 부조리를 성찰하는 식이다. 또 짝을 이루지 못하면, 곧 가족이라는 사회 제도 속에 머물지 않으면 죽어서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더 랍스터’(2015)의 우화는 어떤가. 란티모스의 부조리극은 겉으로는 가족 이야기에 집중하지만, 사실은 이솝 우화처럼 공동체의 모순을 의식하게 만든다. 

‘킬링 디어’는 죽음은 죽음으로 되갚는다는 내용의 복수극이다. 이야기의 원천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왔다. 여신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인 죄(실수)로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양으로 바쳐야 했던 그리스 왕 아가멤논의 이야기다. 신화가 전개되는 공간은 현대 미국이다. 스티븐(콜린 패럴 분)은 유명 심장전문의다. 아내(니콜 키드먼 분)도 안과의사고, 이들 부부에겐 막 10대에 들어선 아들과 딸이 있다. 궁궐 같은 큰 집, 꽃과 잔디밭으로 장식된 정원, 모든 것이 수학적으로 균형 잡힌 실내 등 스티븐 가족은 행복의 정점에 있는 것 같다.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스티븐이 종종 10대 소년 마틴(배리 케오간 분)을 만나는 점인데 그 관계가 성적 일탈 같기도 하고, 내키지 않는 의학적 봉사 활동 같기도 하다. 마틴은 간혹 광기인지, 지적장애인지 모를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소년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틴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를 스티븐의 가족도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는다. 알고 보니 스티븐은 과거에 술을 마신 상태에서 마틴의 부친을 수술했고 수술 직후 환자가 죽었다. 전문가(권력자)의 한순간의 경솔한 행동이 사람 생명을 뺏어간 것이다. 

말하자면 마틴은 의사 스티븐도 가족의 죽음이 남긴 고통을 고스란히 맛보기를 원한다. 보통의 복수극과 다른 점은 죄(실수)를 지은 스티븐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도 마틴처럼 죽음의 이별이 남긴 고통을 그대로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티븐은 가족 가운데 희생될 한 명을 선택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가족이 죽을 것이란 마틴의 예언을 듣는다. 이때부터 ‘킬링 디어’엔 미하엘 하네케의 가족살해드라마 ‘퍼니 게임’(1997), 또는 아이들에게 악령이 끼어드는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1973) 같은 호러의 공포가 덧씌워진다. 무척이나 평화롭고 안정돼 보이던 가족은 졸지에 악령과 신화 같은 공포 속에 내몰리는 것이다. 

죽임의 죄는 그 죽음이 남긴 고통을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란 마틴의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알레고리 형식의 미덕은 내용을 단일한 의미로 읽기보다 관객의 광범위한 개입에 해석을 양도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란티모스는 수많은 무고한 목숨이 희생되는 현대 정치의 현실을 의식한 듯하다.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를 빌리자면 ‘호모 사케르’의 시대, 곧 ‘권력에 의해 희생되는 허망한 삶’의 시대에 대한 염려가 깔려 있다. 죽임의 장본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보다 그 죽음이 남긴 이별의 고통을 상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자주 무고한 죽음과 이별이라는, ‘비현실’의 고통 속에서 울며 산다.




주간동아 2018.07.31 1149호 (p80~80)

  • | 영화평론가 hans42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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