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9

2015.08.03

100년 전 유럽 중산층의 어두운 속살

브누와 자코 감독의 ‘어느 하녀의 일기’

  •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5-08-03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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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유럽 중산층의 어두운 속살
    일기, 그리고 하녀. 이 두 가지 보통명사만으로도 호기심이 생긴다. 일기라는 것은 일종의 고백을 전제로 한다. 하녀라는 명사는 어떤가. 김기영 감독이 연출한 우리 영화 ‘하녀’와 그것의 리메이크 작인 전도연 주연 임상수 연출의 ‘하녀’에 이르기까지, 하녀라는 말에서는 몇 가지 폭력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주인’으로부터의 성적 학대, ‘안주인’의 괴롭힘, 동료들의 따돌림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는 일기와 하녀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이 모든 이미지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그러니 1900년 옥타브 미르보가 소설 ‘어느 하녀의 일기’를 썼을 때 이는 일종의 스캔들이자 사건이었다.

    이 작품을 극화한 영화 ‘어느 하녀의 일기’에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가장 뜨거운 여배우 레아 세이두가 출연한다. 세이두는 ‘어느 하녀의 일기’를 연출한 감독의 전작 ‘페어웰, 마이 퀸’에서 이미 왕후의 하녀로 등장한 바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이어 세 번째로 하녀 연기를 했는데, 중요한 건 이번엔 하녀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다. 하녀의 눈에 비친 1900년대 초반 프랑스 중산층의 모습이 영화의 속살이다.

    하녀 셀레스틴은 똑떨어지는 이름만큼이나 독특한 성격의 하녀다. 하녀답지 않게 자존심이 세고 주인의 손길을 거부할 만큼 주체적이지만, 안주인의 히스테리는 받아주는 게 더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영화에는 꽤나 재미있는 차별이 등장하는데, 파리 상류층 하녀가 자신을 지방 및 변두리 하녀와 구분 짓는 게 그것이다. 셀레스틴은 자신이 파리 상류층의 하녀로만 일했다는 것을 자존심의 근거로 삼는다. 물론 그가 프로방스, 즉 시골의 하녀로 오게 된 데는 어떤 사연이 있다. ‘일기’는 바로 이 측면에서 셀레스틴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과거 이야기들을 꺼내준다.

    흥미로운 건 셀레스틴이 겨우 열두 살에 오렌지 하나를 대가로 처녀성을 빼앗긴 이야기 따위는 비밀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일쯤은 하녀에게 너무 흔해 숨길 일도 안 되는 것이다. 대개 하녀는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냄새 나는 주인 남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마을마다 한 명씩은 아이 떼는 기술을 가진 하녀가 있을 정도로 그 시절 하녀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다.

    2층 장 속에 있는 바늘, 실, 가위를 하나씩 가져오라고 명하는 안주인의 히스테리나 겨우 배 하나 쥐어주며 잠자리를 요구하는 바깥주인의 난봉을 겪으면서도 하녀들은 입을 모아 그들을 ‘좋은 주인’이라고 평한다. 적어도 그들은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죽이는 변태도, 품삯을 떼먹는 사기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이 고작 100여 년 전 유럽에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이다. 셀레스틴은 일기에 ‘착하고 훌륭한 하녀가 되기로 했다. 그는 악마처럼 날 사로잡고 구속했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가 가자는 데로 가고 하라는 대로 할 거다’라고 쓴다. 어느 가문의 하녀 처지에서 벗어나면서, 그 대신 어떤 남자의 선택에 전적으로 구속된 삶을 택한 것이다. 선택이라기보다 수평이동이라고 보는 편이 옳아 보인다. 사실 하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게 없다. 좀 더 나쁜 남자를 만나느냐 아니면 선한 척할 줄 아는, 연기하는 남자를 만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결혼도 셀레스틴을 하녀라는 지위에서 자유롭게 해주진 않을 듯싶다. 그래서 그 ‘행복’이라는 기록이 가슴에 오래도록 남는다. 과연 셀레스틴은 정말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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