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54

2016.09.07

강유정의 영화觀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 외국인을 대하듯 사랑할 때

  •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입력2016-09-02 16: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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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최악의 하루’는 최악의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원제가 ‘최악의 여자’인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이야기하기’라는 서사의 본질을 리드미컬하게 재해석한다. 가령 영화는 누군가의 눈을 통해 중계되는 이야기다. 그 누군가는 주로 카메라에 밀착된 눈이다. 소설에서는 조금 다르게 누군가 본 이야기가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그런데 영화 ‘최악의 하루’는 소설을 쓰는 료헤이(이와세 료 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해 그의 목소리로 끝난다. 한편 그 이야기 속 여주인공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다. 그는 영화 ‘최악의 하루’의 주연이자 동시에 어떤 연극의 작은 배역을 맡은 배우이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여주고 또 보이는 상황 가운데서 ‘최악의 하루’는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거짓말과 진실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말이다.

    소설이란 무릇 거짓말하기다.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허구라고 부른다. 그런데 두 거짓말쟁이가 마주친다. 한 사람은 거짓말하기를 직업으로 삼은 소설가이고, 다른 한 사람 역시 남의 삶을 자기 것인 양 하는 게 일인 배우다. 극중 여배우 은희(한예리 분)는 이렇게 말한다.

    “거짓이라고는 해도 연기하는 그 순간순간만큼은 진실인걸요. 진짜 그 사람이 되는걸요.”

    영화 속에서 은희는 정말 연기하듯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른 성격의 여성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갑내기 남자를 만날 때는 톡톡 튀는 장난꾸러기였다 유부남을 만날 때는 멜로드라마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뚝뚝 흘린다. 어떤 점에서 은희가 자신에게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순간은 세 남자 가운데 가장 낯선 사람, 소설가 료헤이를 만날 때다. 그나마 솔직할 수 있는 이유가 아이러니한데, 료헤이는 한국어를 못하고 은희는 일본어를 못한다. 그러니 서로 서툰 영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은희는 이렇게 말한다.



    “영어로 말하다 보니 거짓말을 하기 어렵네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외국인을 대하듯 사랑을 할 때 본질에 좀 더 가까워지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단어에 최대한의 의미를 담으려 할 때, 그리고 당연히 자기 말에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전제하고, 그래서 상대방으로부터 의외의 말을 들었을 때 그러려니 이해하는 것, 그게 바로 외국인과 대화다. 말의 뒷면을 파헤치는 게 아니라 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말이다.

    영화 속 소설가 료헤이의 모습에 어쩐지 김종관 감독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물들에게 최대한 해피엔딩을 열어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결이랄지, 하루 동안 달라지는 골목길의 체온, 걸음걸이에서 전달되는 감정의 파고를 살리는 그 섬세함은 김 감독만의 개성이라 할 수 있다. 김 감독은 우리 주변에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주목하고, 또 가까스로 드러내는 감정의 조각을 놓치지 않는 예민한 거름망을 가진 관찰자다.

    최악의 하루였지만 어쩌면 은희는 최고의 하루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거짓말은 들통 나기를 기다리는 진실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지제크의 말처럼 잘못된 단서가 진실의 지름길이며, 프로이트의 말처럼 농담이야말로 진심이 아니던가. 어쩌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렇듯 하루하루 다른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다양한 깊이와 색깔을 가진 배우 한예리의 매력이 화면 가득 증폭된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환절기, 골목길과 산책길의 미묘한 변화를 영상으로 담은, 섬세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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